나영정(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맞이해서 전쟁없는세상은 군사주의와 장애를 주제로 하는 글 두 편을 마련했습니다. 첫번째 글로 군사주의와 장애 여성의 삶에 대해서 나영정 활동가님을 글을 싣습니다. 나영정님은 장애여성공감에서 활동하고 있고,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에서도 활동했던 평화활동가이기도 합니다.
‘도망도 못가고’
장애여성공감 회원 사이에서 꽤 오래전에 회자되던 말이었다. 전동휠체어가 많이 보급되지 않고 활동보조제도가 없던 시절 데이트폭력이 발생해도 속수무책이라는 경험을 나누면서 나왔던 말이다. 폭력의 피해를 당해도, 갈등이 있어도 그 자리를 뜰 수 없고, 내가 다시 집에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바로 그 상대방의 손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 울지 못할 상황. 그 이야기는 “전쟁이 난다면? 지진이 난다면? 불이 난다면?”이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유사시에 어디 움직이지도 못하고 이 자리에서 꼼짝없이 죽겠구나 했다. 최근 한반도에 또다시 무력발생에 대한 우려가 많다. ‘도망도 못가고’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삶에서 나의 결정을 확보해나가는 것과 나의 운명을 타인에게, 국가에게 넘기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많은 장애인들이 집에 불이 났을 때 방문을 지척에 두고 한 두 걸음을 옮기지 못해서 목숨을 잃고 있다. 광화문에서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농성을 한지 4년, 그 사에 놓여진 영정의 주인공 중에는 불을 피하지 못해서 살던 집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던 이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다. 화재로 인한 죽음은 장애등급이 나눈 권리의 제한이 직접적인 사인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장애인의 삶을 다룬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다큐를 통해서 재난 이후의 장애인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장애인의 경우 대피하는 것을 아예 포기하거나 대피소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경우가 많았다. 대피소는 장애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애인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그러한 위기상황에서 더욱 부각되는 경험을 하게 됐다. 전쟁은 화재나 지진과 같은 재난과는 다른 차원의 ‘의지’와 ‘권력’의 분명한 방향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재난조차 국가, 계급, 인종, 성별, 장애, 나이 등에 따라 불평등하게 작동하는 마당에 전쟁은 가장 극단적으로 불평등하게 삶과 죽음의 위계가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국가폭력과 소수자
장애여성공감의 활동 과정에서 전쟁, 군사주의에 대한 고민은 구체적으로 연대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2001년 911테러가 벌어졌을 때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반대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과 연대를 하며 전쟁에 반대하고자 했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가부장제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을 때 여성을 이용하지 말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여성은 모성을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폭력의 다양한 차원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는 페미니즘과 소수자 정치를 통해서 전쟁과 군사주의의 본질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연대의 경험은 국가 안에서 소수자의 차별이 생산되고 유지되는 매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게 했고, 여성과 소수자가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의 의미를 정식화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페미니즘과 소수자 운동의 요구가 타고난 조건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별과 억압을 해석하고 어떤 입장을 세울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현재에도 끊임없이 전쟁과 테러, 파병 등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함께 했던 연대체들이 해소하면서 전쟁과 군사주의에 대항하는 활동에 참여할 직접적인 기회를 가지지 못했지만 그 경험들은 국가폭력과 재난에 대해서 장애를 가진 여성들이 소수자운동과 페미니즘 관점에서 어떻게 파악하고 대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나아가 인권에 대한 관점을 가다듬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2003년 3.8 여성의날 행진에 나서는 장애여성공감과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 연대. 장애여성들은 여성의 억압과 용기를 나타내는 다양한 옷을 입고 패션쇼를 펼쳤고,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는 전쟁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사진출처: 다름으로 닮은 여성연대
군대와 소수자의 시민권
소수자가 시민권에서 배제되거나 박탈되는 방식은 누군가의 시민될 자격과 능력,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했거나 이를 거부한다고 판단하는 것과 연결된다. 누가 군에 갈 수 있고 누가 배제되는가? 여성과 장애인이 군가산점제 위헌 소송을 제기해서 국가에 대한 의무가 누구를 배제함으로써 혜택으로 구성되고, 그것이 불평등으로 연결되는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주지하다시피 ‘모든’ 남성은 ‘성인’이 되면 국가 앞에 알몸으로 서야 한다. 국가는 그 몸들에 등급을 매기고 그에 따라 군에 올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판단한다. 이 등급은 당연히 장애등급제와 겹쳐질 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들의 몸이 비정상화되는 기준과 만난다. 트랜스젠더는 정체성으로 인해, 혼혈인은 피부색으로 인해, 그리고 낮은 학력과 ‘고아’라는 가족상황과 ‘정상범주’에서 벗어나는 몸무게와 같은 기준들도 촘촘하게 작동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군대에 적합하지 않다고 의학적/사회적 기준을 빌려서 호명되는 사회적 장애들과 핸디캡들은 역설적으로 인권과 소수자 운동의 움직임으로 다시 만난다.

서울지방병무청의 신체검사 장면. 국가는 남성들의 몸에 등급을 매기고 자격을 평가한다. 이 등급은 소수자들의 몸이 비정상화되는 기준과 만난다. 사진촐처:서울지방병무청
따라서 군에 적합한 몸이라는 기준은 국가가 ‘합법적으로’ 정해서 공표한 정상성의 위계질서이다. 군에 적합한 몸이라는 기준은 군에 갈 때만 적용되지 않는다. 가장 가치있는 몸,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몸, 가장 적절한 신체적/정신적 능력을 체현하는 몸, 의무를 수행하기에 가장 적절한 몸이기에 가장 대우받아야 하는 몸이라는 인식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전쟁 훈련과 수행은 그 몸을 가장 직접적으로 훼손한다. 근대국민국가에서 장애인에 대한 복지정책이 1, 2차 세계대전 이후 쏟아져나온 상이군인에 대한 국가 배상을 통해서 시작되었던 것은 훼손된 국가를 치료하는 의미였고, 사회적 권리로서 장애인 복지는 훨씬 나중의 일이었으며 생계부양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장애남성을 국가가 보조하는 가족주의적 모델로 시작되었다. 장애인 복지의 의미를 사회적 권리 확보라는 관점으로 확대해나가는 과정이 군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의 정상성에 도전하는 과정과 만나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역사적이면서도 현재적인 이유들이 있다.
예외적 인간 만들기
지금 군형법 92조의 6에 의거해 군 내 동성애자를 색출하고 처벌하는 마녀사냥이 벌어지고 있다. 식민적 유산으로 군형법 속에 심어진 ‘계간죄’는 ‘추행’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남북한관계라는 특수성 속에서 군기강 확립을 위해 이 조항이 필요하다고 강변되고 있지만 군대 내 동성간 성행위를 처벌하는 법이 군내 질서나 전투력에 영향을 준다는 근거는 없다. (이 땅의 군통수권을 가진 미국은 이미 이 법을 폐지했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좋다.) 군대는 국방의 의무라는 ‘신성함’을 기반으로 하는 집단생활이기에 여기에서 배제되는 이들은 신성함을 구성하는 인간성에서 제외되고, 군에 대한 시민사회의 감시와 개입 나아가 헌법적 가치를 차단하는 역할을 해왔다. 또한 이 ‘신성함’은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온갖 악행을 덮는 ‘수의’의 역할을 해왔다. 또한 이 신성한 공동체는 ‘성적 가정’이라는 가족주의적 은유로도 표현된다(1973년 ‘계간죄’ 존속 대법원 판결문). 이러한 예외적 공간은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장애인 생활시설, 감옥, 정신병원 등. 이러한 예외적 공간에서 기본적 권리가 제한되는 논리는 그 특성에 따라 달라지지만 이 예외성이 어떻게 국가권력을 공고히 하고 지배질서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인지 배제된 자들은 안다. 또한 이 예외성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성적 통제는 매우 핵심적인 기제이다. ‘군인이니까’, ‘장애인이니까’, ‘죄인이니까’라는 이유로 예외적으로 정당화되는 성적 통제는 결국은 어떤 생명이 가치 있고, 국가가 보호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표지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예외성의 확립과 유지는 지배를 보편화하기 위한 핵심적인 장치이다. 2등 시민으로 낙인찍힌 이들은 여러 가지 차원으로 권리의 제한을 받지만 동성애를 처벌하는 것, 장애인의 성적 권리를 박탈하는 것 등으로 나타나는 성적 통제가 미치는 영향은 ‘재생산권’을 박탈당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이것은 어떤 이들의 존재가 국가의 재생산에 위협이 된다고 상상하는 것이며, 그에 따라 이들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도록 만들고, 시민의 경계 밖으로 던져놓게 만든다. “국가와 가정을 위협하는 동성애”, 광화문 역사에서 농성하는 장애인에게 “빨갱이 새끼들아”라는 말은 이렇게 피어난다.

군형법상 추행최 합헌 결정 규탄 기자회견. 한국사회는 성소수자들, 장애인들의 존재가 국가의 재생산에 위협이 된다고 상상하고 그들을 시민의 경계 밖에 던져놓는다.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맞아 소수자운동이 국가주의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는 국가의 재생산, 안보, 경제성장에 도움되지 않는다는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매겨지는 등급과 지배적인 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이들을 단속하고 나아가 축출하는 이 국가의 시스템에 도전하는 사람들이다. 소수자 운동의 관점을 벼리기 위해서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 전쟁을 반대하고 군사주의에 도전하는 이들과 더 만나고 함께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