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위안부 할머니에 관한 영화를 보기 두려웠다. 아마도 십대 초반, 삼일절 즈음이었던 것 같다. TV는 오로지 일제의 만행으로 점철되었으니까. 위안부 할머니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보고 그저 답답했다. 여자아이들이 강제로 끌려가고 울음과 비명소리로 가득한 장면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알 수 없었지만 메스꺼운 갑갑함으로 남아 있다. 이후 어느 어른에게 ‘위안부’에 대해 물어도 아무도 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쪽바리’라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 후 광통신 인터넷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헬조선에 계속 살고 있는 덕분에 진보매체의 뉴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전해 듣기도 하고 혹은 무수히 퍼진 잔인한 흑백 사진으로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 잔인한 장면과 암울함을 마주하기 두려워 위안부할머니를 소재로 다룬 영화를 보기 두려웠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변명이다. 이런 이유로든 저런 이유로든 모두 핑계다. 나 살기도 힘든데 타인의 고통을 직면하기 싫었겠지. 10대 초반에 던졌던 질문에 답할 나이가 된 지금은 내게 같은 질문을 한 아이를 만나지 못하였지만 만나게 된다면 난 무슨 답을 할 수 있을까.
그러던 중 영화 <눈길>의 류보라 작가가 인터뷰 중에서 ‘십대의 여자아이들이 캐스팅 된 만큼 상처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성적인 장면들은 은유적인 장면으로 대체하였다’는 문구를 읽고 두려움을 조금 내려놓고 그런 배려를 가진 작가와 감독을 믿어보려고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 <눈길> 영어 포스터
종분과 영애, 그리고 은수의 이야기
영화의 구조는 종분이 어린시절 일제에 의해 위안소로 끌려가는 시점부터 탈출 하기까지의 기간과 종분이 영애의 이름으로 살면서 옆집의 홀로 사는 은수와 만나는 현재를 교차하여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종분은 종로의 어느 산동네 반지하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종분의 옆집에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부모와 연락두절 된 십대 여성 은수가 산다. 은수는 고등학생으로 문제아로 낙인 찍히고 정부로부터 ‘법적인 이유’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서울에서 경제적 지원이 끊긴 십대 여자로 어떤 방식으로 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지만 무엇 하나 녹록치 않다.
죽은 친구 영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종분은 바지런하다. 영화 속 대사처럼 ‘그 나이에 혼자 살면서 빌어먹지 않기’ 위해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두 손과 발을 쉴 새 없이 놀려 청소하고 뜨개질해서 가게에 삯을 받아 살아간다. 그러나 그녀가 일을 하지 못하는 틈, 잠을 자는 동안 종분은 악몽을 꾼다. 첫 시퀀스와 같이 영애가 낙태를 강요당하고 자살을 기도하는 순간 뿐일까. 위안부로 있던 좁고 어두운 방에서 폭력은 공기처럼 들숨과 날숨으로 폐부에 베어 들었을 것이다. 몸 속 깊이 베어 있는 기억을 의식적으로 잊기 위한 행동을 할 수 없는 꿈 속에서 되살아 날 것이다. 그렇기에 깨어난 종분은 두통에 진통제를 털어 먹듯 일상적인 악몽에 이불 호청을 뜯어 빤다. 종분은 일상 속에서 상처투성이에 허름한 옷을 입은 영애(김새론)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한다. ‘지 편할 때만 나타나’라는 것을 보아 일정한 주기 없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이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한 조현병(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이 아니라 7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종분에게는 현재와 함께 있는 과거 혹은 종분의 심리적 상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영화 <눈길>은 ‘일제에 의해 순결한 처녀를 빼앗겼다’는 식민지 경험에 대한 민족주의 분노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조직적인 성폭력을 당한 트라우마와 그 이후 일상을 이어가는 생존자의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의 종분과 영애는 일제시대이지만 부모에 의해 경제적으로 계급이 나뉜다. 종분은 가부장적인 홀어머니에 의해 교육의 기회를 박탈되고, 영애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전까지 학교를 다니며 교사의 꿈을 키우고 누구보다 일본제국주의 교육을 충실히 학습하는 모범생이었다. 전쟁이 극한으로 가면서 조선의 십대 여자라는 이유로 위안부로 끌려간다. 방법은 다양하다. 학교에서 제국을 위한다는 명목이나 납치하거나 공장에 간다는 거짓말로 끌려간다. 포주에 의해 그녀들은 관리 및 감시되고 일본군에 의해 성적 폭력을 당하게 된다.
할머니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위안부 영화
일본군은 자신들이 감시 가능한 일본어로만 말하도록 했다. 그들의 눈을 피해 종분과 영애는 한마디 한마디 둘 사이의 말을 모아간다. 종분은 매일 같이 반복되는 폭력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엄마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탈출하기 위해 일본 위안부들의 빨래를 대신해주고 돈을 모으고 영애와 살아남는다. 함께 소공녀를 읽고 위안부로 끌려온 언니와 함께 대추를 먹으며 함께 엄마가 해준 밥 이야기를 하면서 향수를 달래면서 조금씩 대화하고 말을 나누며 생을 나눈다. 그 시기의 그 곳의 소리의 총합을 모은다면 99%가 아마도 일본군의 명령과 기합 소리이고 나머지가 (종분과 영애와 같은)위안부들이 나눈 대화일 것이다. 영화는 이 소리에 귀 기울인다. 이건 위안부 할머니들을 주제로 한 영화이니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미디어를 통해 접했던 잔혹한 흑백사진들이 떠올랐다.

영화 <눈길>의 스틸컷.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많은 작품이 일본군의 폭력성과 만행을 자극적인 이미지로 폭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데 비해, 이 영화는 군홧발 소리와 포탄 소리 가득한 전쟁터에서 들리지 않는 십대 소녀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려 애쓴다.
일본군의 만행을 말하기 위해서 잔인함을 강조하고 일본군의 언행과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었던 폭력만을 강조한 사진들. 그 사진에는 할머니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말이 없다. 이런 말하기는 빠르고 쉬운 답만 찾는 것이다. 천성이 ‘악마 같은 쪽바리’에 의해 순결을 잃어버린 처녀 피해자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박제시켜버리면 다른 질문들이 사라져 버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중요한 다른 문제를 해결 할 수도 없게 된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일은 식민지 문제 뿐만 아니라 성차별을 비롯해 인종차별과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파괴와 같은 복합적인 원인에서 바라봐야 한다. 군대의 엄격한 규율과 폭력 그리고 전쟁의 공포 속에서 병사들의 억압된 분노를 여성에게 폭력으로 퍼붓는 구조가 과연 과거의 일본군에 의해서만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기지촌에서, 그리고 지금도 전쟁과 같은 일상에서 장소와 시간을 변주하여 반복되지 않다고 단정할 수 없다.
또한 ‘순결을 잃어버린 조국의 처녀’라는 수사는 굳이 ’순결을 강조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로 인한 여성억압’이라는 설명을 하는 것도 입 아프다. 충분히 일본군들로 인해서 힘들었는데 ‘순결순결순결순결순결’ 타령하면서 위안부할머니들에게 결핍을 강요하는지 모르겠다.
아름답고 유쾌한 자매애
은수 앞의 하루하루는 종분이 겪었던 시간과는 다르지만, 종분도 은수도 각자 다른 고통을 서로의 입장에서짐작하고 자매애로 뭉친다. 특히 은수가 나이를 속이고 술집에서 일하다 끌려간 경찰서에서 종분이 보여준 자매애는 생각보다 착하지 않고 유쾌한 방식의 자매애?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 영화로 김영옥 여사님은 나의 최애캐). 종분은 “너 같은 애들이 커서 몸 팔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는 술집 손님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은수를 편든다. 무엇보다도 종분이 은수를 감싸면서 한 말은 결국 자신이 은수와 비슷한 나이대에 누군에게 들었어야 하지만 듣지 못한 말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유쾌한 자매애를 보여주는 종분(김영옥)과 은수(조수향). 종분과 은수의 이야기는 위안부 문제를 ‘민족적인 문제’가 아니라, 십대 소녀들의 삶’으로 바라보게 한다.
나이든 종분이 이 사건 이후에 건강해진 영애를 떠나보낸다는 점에서 영화의 현재 시점은 일종의 심리극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참 아름답기는 하지만 과연 우리는 종분과 같은 처지에 놓였을 때 괴로운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결국 <눈길>은 영화이다. 위안소에서 같은 마을 사람이 바로 옆방에 있는 우연은 아주 드물 것이고, 그 극한 상황에서 보여주는 자매애와 종분과 은수의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은 어느 순간 동화 같다고 느껴진다. 일본정부와 탄핵된 반근혜 정부가 위안부할머니들을 배제한 일방적인 합의를 했다는 현실을 돌아본다면 조금은 씁쓸한 해피엔딩이었다. 고통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대를 강조한 것이라고 선의로 생각하고 싶다.
+
처음에 영화 제목 ‘눈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이 가지는 전형적인 순결한 이미지를 강조하려 한 제목이 아닌가 싶었다. 영화 마지막 즈음에 종분과 영애가 위안소에서 나와서 눈길을 하루 꼬박 걷는 장면을 보면 내 전형적인 편견을 반성했다. 눈길은 스크린 혹은 사진으로 보기에는 하얗고 예쁜 길이지만 영애와 종길이에게는 죽지 않기 위해서 걸어야 했던 혹독하고 차가운 길이었다. 위안소에서 있던 모든 일을 숨기고 결혼도 하고 예쁜 아이도 낳고 선생님도 할 거라고 말했던 영애가 죽은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