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주(미국사 연구자)

전쟁없는세상 주:

노동절을 맞이해서 전쟁없는세상은 전쟁에 맞선 노동 운동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글쓴이 박형주 님은 미국사 연구자로 고려대 사학과 대학원에서 논문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미국의 동원 정책에 대한 흑인의 반응: 1940년 징병법에 대한 저항을 중심으로>(2012)를 썼습니다.

 

노동자들, 전쟁을 지지하다

1914년 8월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이전까지 평화를 호소해 온 유럽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들은 전쟁 지지 입장으로 돌아섰다. 러시아의 볼셰비키를 포함한 소수만이 전쟁 반대 입장을 고수했을 뿐 독일과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등 교전국들의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들은 자국 지배자들의 편을 들거나 비애국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침묵의 길을 택했다. 각국에서 수백만 노동자들이 ‘인터내셔널가’ 대신 애국적인 노래를 들으며 전선행 기차에 올랐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독일 잠수함의 영국 정기선 공격에 따른 사망자 가운데 미국인이 포함된 것을 계기로 1917년 4월 미국이 1차 대전에 뛰어들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세계를 안전하게 한다는 명분이었다. 침몰한 영국 정기선에 무기가 실려 있었다는 사실은 은폐되었다. 영국의 승리가 미국의 은행가와 산업자본가들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은 모든 미국인의 번영으로 선전되었다. 다수의 미국인들이 전쟁 지지자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대중의 참전 의지가 그들 정부와 의회의 열정을 충족할 만큼은 아니었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100만 명의 병사가 필요했지만 6주 동안 겨우 73,000명만이 군대에 지원한 것이다. 곧이어 징병법(Selective Service Act)이 의회를 통과했고 선전 활동이 강화되었다. 또한 악명 높은 방첩법(Espionage Act)이 통과되어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인들을 최대 20년 동안 감옥에 가둘 수 있게 되었다. 신문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각 주에서는 자경단이 조직되어 전쟁 반대 세력 색출과 감시에 열중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노동자 조직들도 전쟁에 대한 입장을 선택해야 했다. 20세기 초 미국 노조원의 80%가 속했던 미국노동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은 전쟁에 찬성하고 선전 활동에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위원장 새뮤얼 곰퍼스(Samuel Gompers)를 중심으로 전쟁 수행 지지를 위한 조직이 결성되었고 미국 전역의 노동 지도자들이 여기에 가세했다. 파업 대신 협력을 통해 임금을 상승시키고 조직을 확대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었다.

 

워블리, 전쟁에 반대한 미국의 노동운동

반면 급진적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미국의 참전 이후에도 단호히 전쟁에 반대했다. 당시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급진적 노동자 운동이 부상한 상황이었다. 1905년 시카고에서는 빅 빌 헤이우드(‘Big Bill’ Haywood)를 비롯한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급진적 노동조합 운동가를 중심으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이 결성된 참이었다. ‘워블리(Wobblies)’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들은 대부분 백인 남성 숙련공으로 구성된 미국노동연맹을 대신해 성별, 인종, 숙련도에 따라 분열되지 않는 거대 단일 노동조합을 조직하고자 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결성에도 참여한 노련한 노동운동가 유진 뎁스(Eugene V. Debs)가 이끄는 미국 사회당(Socialist Party of America) 역시 나날이 세를 불려 가고 있었는데, 헬렌 켈러(Helen Keller)도 당원 중 하나였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 결성에 참여한 '빅 빌' 헤어우드.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1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전쟁 반대 운동을 적극 펼쳤다. 사진출처:https://en.wikipedia.org/wiki/Bill_Haywood

세계산업노동자연맹 결성에 참여한 ‘빅 빌’ 헤어우드.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1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전쟁 반대 운동을 적극 펼쳤다. 사진출처:https://en.wikipedia.org/wiki/Bill_Haywood

워블리들과 사회당원들은 1차 대전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금세 간파했고, 전쟁이 노동자의 이익이 아닌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의회의 선전 포고 다음날 사회당은 선전포고를 “미국 국민에 대한 범죄”로 규정했고, 수차례 반전 집회를 열어 전쟁과 징병, 전시 폭리취득에 항의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자본가들이여, 우리는 당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들에 맞서 싸울 것이다! 징병이라니! 노동계급이 거부하는데도 싸우게 만들 수 있는 권력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들은 반전 집회, 징병 거부, 선전 활동, 파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 반대 활동을 펼쳤고 대부분이 방첩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1918년에만 11,500여명이 정부나 전쟁을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고, 그 중 다수가 워블리와 사회당원이었다. 1917년 8월에는 필라델피아의 사회당원 찰스 셴크(Charles Schenck)가 징병법이 헌법에 위배되며 “월스트리트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인류를 상대로 저지르는 잔인무도한 행위”이므로 청년들이 징병을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전단 15,000장을 뿌렸다. 대법원은 셴크에게 6개월형을 선고했는데, 이는 방첩법 위반 사건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량 선고였다. 작가 맥스 이스트먼(Max Eastman)이 편집자였던 사회주의계 잡지 『대중(The Masses)』은 징병에 반대하는 논평을 게재했다가 법정 공방 후 폐간되었다.

오클라호마에서 가난한 농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노동계급연맹(Working Class Union)’에서도 워블리들과 사회당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입대 저지를 위해 철도와 전신선을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전국의 징병 거부자들을 위한 워싱턴 행진도 계획했다. 계획들이 실행도 되기 전에 회원들은 체포되었고 450명이 기소되었다. 지도자들에게는 3~10년형이, 다른 사람들에겐 60일~2년형이 선고되었다.

 

유진 뎁스의 법정 진술: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오래 전에 제가 모든 생명체와 혈족관계를 맺고 있음을 인식했으며 제 자신이 지구상의 가장 미천한 존재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겼습니다. 그때 말한 것처럼 만약 하층계급이 있다면 저는 그 중 하나이고, 범죄계층이 있다면 저도 그 가운데 하나이며, 한 명의 영혼이라도 감옥에 있다면 저 역시 자유롭지 않다고 지금도 말하겠습니다.    -하워드 진(Howard Zinn), 유강은 옮김, <미국 민중사> (이후, 2006)에서 인용

 

유진 뎁스는 징병에 반대해 투옥된 사회당원들을 면회한 다음 감옥 앞에서 대중 연설을 펼쳤다가 체포되었다. 청중 가운데 젊은 남성들이 있었고 뎁스의 발언이 “신병 모집이나 입대를 방해”했다는 이유였다. 재판에서 뎁스는 변호를 위한 증언과 증인 소환을 거부했고, 자신의 발언 내용을 부인하는 대신 배심원 앞에서 전쟁 반대 의견을 더욱 분명히 피력했다. 그 결과 뎁스는 10년형을 언도받았고 1921년 66세의 나이로 석방될 때까지 32개월 동안 복역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원의 법정 진술: 여러분은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이 왜 미국에 애국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담요 한 장 없는 부랑자라면,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서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뒤로 가족이 어디 사는지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면, 하는 일이 일정치 못해 투표할 자격을 가질 만큼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면, 이가 들끓는 으스스한 막노동자 합숙소에서 잠을 자면서 저들이 주는 최대한 큰 탈이 나지 않을 정도로만 썩어 버린 음식을 먹는다면, 보안관보들이 구멍이 숭숭 뚫린 조리용 깡통에 총을 쏴 그나마 입에 풀칠할 음식이 땅에 쏟아진다면, 고용주들이 당신을 굴복시키려고 생각해서 임금을 깎아 버린다면, 포드와 서와 무니에게 적용되는 법이 해리 소에게 적용되는 법과 다르다면, 법과 질서와 국가를 대표하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기습해서 누명을 씌워 감옥에 처넣고 선한 기독교인들이 환호하며 세차게 공격하라고 말한다면, 도대체 여러분은 어떻게 애국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 전쟁은 사업가들의 전쟁이며, 우리는 왜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이 감미로운 현실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 총을 맞아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하워드 진(Howard Zinn), 유강은 옮김, <미국 민중사> (이후, 2006)에서 인용

 

워블리들은 전쟁 초기 집중적 파업을 감행해 전쟁 주요 자원인 구리와 목재 생산을 방해하는 특별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자 파업 분쇄를 특명으로 광산 소유주들의 후원을 받은 자경단원들이 투입되었다. 이들은 연방 정부와 주지사의 묵인 아래 노조 사무실을 습격하고 조직가들을 납치해 린치를 가했다.

하지만 자경단만으로는 워블리를 잠재울 수 없었다. 1917년 9월 수사관들이 전국의 연맹 회관 48곳에 일제히 들이닥쳐 각종 법정 증거를 압수했고, 같은 달 연맹 지도자 165명이 징병 방해 모의와 탈영 선동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1918년 기소된 101명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되었고 총 250만 달러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특히 헤이우드를 포함한 15명에게는 20년, 33명에게는 10년이라는 중형이 선고되었다. 헤이우드는 보석으로 풀려나온 상태에서 당시 혁명이 한창인 러시아로 망명했고 10년 후 그곳에서 사망했다.

1차 대전이 끝나고도 미국의 급진주의자들은 이전의 기세를 회복할 수 없었다. 일망타진된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지도자들은 여전히 감옥 안에 있었고, 오른쪽에서는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 세를 불린 미국노동연맹이, 왼쪽에서는 워블리들의 직접행동과 신디컬리즘 대신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민주집중제 개념을 채택한 적색 노조가 부상하고 있었다. 사회당 역시 약화를 피할 수 없었고, 이전 이들의 전투적인 활동은 새롭게 조직된 공산당의 역할이 되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전쟁반대 운동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2차 대전 참전을 결정했을 때 미국에는 전쟁과 징병에 반대하는 조직적인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분열된 사회당은 분명한 전쟁 반대 입장조차 내놓지 않았고, 사회당에 이어 부상한 공산당은 소련의 참전 이후 전쟁 불개입 입장을 철회하며 열렬한 전쟁 지지 입장으로 돌아섰다. 1차 대전 당시 사회당 소속으로 흑인 청년들에게 징병을 거부하고 급진적 노동조합에 가입할 것을 촉구한 흑인 노조 지도자 A. 필립 랜돌프(A. Philip Randolph)는 대통령에게 군과 방위산업 분야에서의 차별 개선 조치를 약속받은 후 예정된 대규모 집회를 취소했다.

오직 사회당에서 갈라져 나온 트로츠키주의 계열의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만이 분명한 전쟁 반대 입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극히 미약했고, 당원들은 곧 강화된 방첩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고 말았다. 전쟁 반대는 이제 조직된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아니라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들, 그리고 미국 정부에 충성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자들과 흑인 민족주의자들의 몫으로 넘어갔다.

 

“당신은 이미 죽었잖아요.”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지배계급을 위한 것임을 폭로하고 법정에서 물러섬 없이 자신의 신념을 표현한 사회당원들과 워블리들은 결국 잊혀진 것일까?

1차대전 당시 전쟁에 저항했던 노동운동가 유진 뎁스의 사진 앞에 앉아있는 버니 샌더스. 사진출처: https://popularresistance.org/bernie-sanders-is-no-eugene-debs/

1차대전 당시 전쟁에 저항했던 노동운동가 유진 뎁스의 사진 앞에 앉아있는 버니 샌더스. 사진출처: https://popularresistance.org/bernie-sanders-is-no-eugene-debs/

그렇지만은 않다. 1979년 <노동조합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이며 혁명가인 유진 뎁스>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38세의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는 그로부터 2년 후 벌링턴(Burlington) 시의 시장으로 당선되며 정치 행보를 시작했고, 백여 년 전의 뎁스와 마찬가지로 최근 대선에 도전해 돌풍을 일으켰다. 2011년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집회에서 가수 존 바에즈(Joan Baez)는 1969년 우드스톡(Woodstock) 무대에서 자신이 부른 “조 힐(Joe Hill)”이라는 노래로 다시금 저항과 연대를 외쳤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전설적인 활동가이자 작곡가인 조 힐은 1915년 증거가 불충분한 살인 혐의로 솔트레이크(Salt Lake) 시에서 사형당했다. 힐이 사망한 지 백 년이 지난 2015년 솔트레이크 시에서는 누군가 힐의 얼굴 위로 미국 국기를 그려넣는 벽화 훼손 사건이 일어났다. 워블리들과 사회당원들이 전쟁과 징병에 반대해 체포당한 지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의 지배계급은 그들을 죽이지도 떨치지도 못한 것 같다.

미국 국기로 훼손당한 조힐의 벽화. 조힐은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전설적인 활동가이자 작곡가였다. 훼손당하지 않은 벽화 원본 이미지는 이 글 맨 앞에 실려있다. 사진출처:http://local.sltrib.com/charts/joehill/mural.html

미국 국기로 훼손당한 조힐의 벽화. 조힐은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전설적인 활동가이자 작곡가였다. 훼손당하지 않은 벽화 원본 이미지는 이 글 맨 앞에 실려있다. 사진출처:http://local.sltrib.com/charts/joehill/mural.html

미국 노동운동의 성가인 “조 힐”은 꿈에서 조 힐을 만나 “아니 당신은 이미 죽었잖아요”라며 놀라는 이에게 조 힐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 노동자가 권리를 지키려는 바로 그곳에서 조 힐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조의 이 말대로라면 그는 2017년 현재 성주 소성리 마을회관에도, 광화문 고공단식농성장에도 살아 있는 셈이다. 백 년 전 사형시킨 조 힐을 여전히 지우려 애쓰는 지배계급만큼이나 지금 노동자 계급도 그를 발견하고 영원히 살아 있게 돕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