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예은 (평화활동가)

 

갖고 싶어 새로운 이름
다르게 살아 보고 싶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시작하는 듯 새로운 인생
— 시와, 〈새 이름을 갖고 싶어〉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신지. 나는 자주 다르게 살고 싶었고, 정말로 삶을 처음부터 다시, 새로운 이름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면 시와의 노래를 한숨처럼 흥얼거렸다. 노래가 나를 다른 삶으로 데려줄 것만 같아서, 주문처럼 불렀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 괴로움 / 외로움 / 그리움 /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최승자, 〈내 청춘의 영원한〉)이라는 최승자 시인의 시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면, 다른 것, 다른 곳, 다른 삶에 대한 열망은 보편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다르게 살고 싶은가. 전쟁과 폭력으로 생명이 매일 죽임당하는 세상에서, 무수한 존재들이 차별과 혐오, 착취와 빈곤으로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는가. 전쟁없는세상은 말한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며 재밌게 다르게 살자고. 군대를 거부하고, 무기의 생산과 수출을 감시하고,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 앞에서 공존할 수 있는 법을 고민하며, 소수자, 비인간 동물과 연대하면서. 22년 만에 처음 진행한 전쟁없는세상의 후원 행사 〈평화의 항해〉에 참여해 늦은 새벽까지 남아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생각했다. 정말 이들과 함께 말하고 노래하다 보면 다르게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내가 전쟁없는세상을 처음 만난 것은 언젠가의 퀴어문화축제에서였다. ‘퀴어천국에는 군대가 없다!’는 문구가 붉게 적힌 피켓이 있었다. 퀴어천국도 군대 없음도 모두 낯설고 호기로운 선언 같았는데, 아래에 이어진 ‘퀴어운동과 반군사주의운동이 연대해야 하는 6가지 이유’를 읽으면서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군사주의가 젠더 규범을 영속시키고 계층적 질서를 재창출하고 있으므로 국가 간의 전쟁, 성소수자 차별과 가부장제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구조적, 개인적 폭력에 반대하는 반군사주의 운동이 퀴어운동과 만난다는 내용이었다. 선언 같은 말로 놀라게 한 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그것이 전쟁없는세상이 세상에 말을 거는 방식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복작복작한 축제의 날도 잊고 지내다, 이들을 다시 만난 건 평화운동을 시작하게 되면서다. 무기박람회저항행동 운영위원회 회의를 하던 날, 각기 다른 사람들이 참여연대 사무실에 모였다. 쿠피예를 두르고 수영 가방을 멘 사람, 뜨개질을 하며 말하는 사람, 작은 핸드폰 화면을 보며 회의를 이끌어 가는 사람, 커다란 노란배 목걸이를 한 사람, 골똘한 표정으로 곱슬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사람이 커다란 나무 책상에 둘러앉았다. 이들과 회의하는 것은 즐거웠다. 무기박람회를 없애자는 커다란 목표 아래 구체적 행동을 고민했다. 강한 반대와 소극적 찬성 같은 기준을 제시하며 합의하고,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만큼의 일을 정했다. 새로 온 나도 자연스레 맞아주며 긴장한 초보 활동가에게 곁을 내어주었다. 기후정의행진, ADEX 저항행동을 함께하며 나는 평화운동의 즐거움을 배워갔다. 매일 전쟁과 학살, 고조되는 군사적 긴장을 모니터링하며 분노와 고통이 평화운동의 정동인 걸까 생각하던 내게, 이들은 여기 즐거움과 기쁨도 있다고 온몸으로 말해주었다.

지난 12월 5일 저녁 〈평화의 항해〉에 참여한 이들도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환대받기, 무엇이 되지 않아도,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는 감각 느끼기, 안전하게 즐겁기, 목표를 크게 외쳐보기. 그렇기에 전쟁없는세상과 20여 년을 함께한 사람도, 나처럼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도 모두 웃으며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홍대 한복판에, 전쟁없는세상에 대한 애정과 응원을 가득 담은 사람들이 모였다.

손으로 뜬 팔레스타인 연대 겨울용품, 고양이 장난감, 전쟁없는세상에서 만든 책들이 사람들을 가장 먼저 맞이했다. 활동을 하며 만난 동료, 친구, 서로 잘 모르지만 그곳에 함께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든든한 이들과 함께 행사를 즐겼다. 전쟁없는세상의 지난 22년을 돌아보며 저마다의 흔적을 찾고, 전쟁없는세상에 관한 단어를 곰곰 떠올려보며, 엄청난 부자가 되면 평화공원을 만들자는 내용의 시를 썼다. 20여 년 전 병역거부운동 기자회견 자리에서도 노래했던 시와의 공연을 보며 두 손 모으고, 주영호(펭귄)의 ‘술독 밑 블루스’를 따라 부르며 웃었다. 무기박람회 탱크 위 공연을 재현한 펭귄과 쭈야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고, 바디퍼커션그룹 녹녹의 안내에 따라 우리 모두의 몸을 악기로 만들었다. 경매 행사에서는 다들 어설프게 천 원, 오천 원씩 겨우 값을 올려가며 물건을 거래했는데, 그게 참 즐거웠다.

전쟁없는세상다운 후원 행사였다고, 누군가 말했다. 전쟁없는세상다운 것이 무엇인지 다 알 수는 없지만 ‘폭력과 과로는 싫어하고 칭찬과 격려는 아끼지 않는’, ‘함께 춤추고, 울고 웃으며 세상을 바꾸는 전쟁없는세상’이란 설명에 걸맞은 행사가 진행되었다는 것은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즐겁고 안전한 행사였다.

진심으로 믿으면 그건 진실이 된다. 하지만 진심으로 믿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전쟁 없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의심 없이 믿는가. 평화를 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평화를 위해 애쓰고 그걸 믿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 그렇게 힘을 길러야 한다.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용석은 그의 책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에서 “힘은 책임지는 것”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전쟁없는세상은 그동안 활동만큼 많은 책임을 져오기도 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옥살이를 하고, 탱크 위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고 음악 연주한 활동가들은 재판에 다녀왔다. 이제는 실천에도, 책임지는 데에도 능해 보인다. 앞으로도 10년, 20년, 정말 전쟁 없는 세상이 될 때까지, 전쟁없는세상이 즐겁게 활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 평화에 대한 믿음이 더욱 더 진실될 수 있게, 우리가 다르게 살 수 있도록. 이 항해에 함께하고 싶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전쟁없는세상에 후원하고, 회원이 되자. 다음의 평화를 노래하는 자리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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