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 (비건퀴어에코페미니스트)

 

“아빠, 이 끔찍한 전쟁의 시대에 무기 개발을 찬양하는 달력이라니! 떼버리자.”
“아니다. 오히려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무기 연구가 필수적이지.”

 

어버이날을 맞아 방문한 본가에서 ‘설전’이 시작되었다. 부모님께 감사와 축하를 전하는 훈훈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식탁에서 일어나자마자 무언가가 내 신경을 긁었다. 바로 우리 집 거실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이었다. 아빠 회사에서 해마다 홍보용으로 나누어주는 평범한 달력이지만, 문제는 아빠가 무기를 연구하는 과학자라는 사실이다. 아빠가 번 돈으로 무럭무럭 자란 나는 전쟁과 군대에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다.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 힘쓰는 아빠와 국가가 말하는 안보론에 반대하는 평화 활동가 딸이라니, 참 웃기는 조합이다.

지금 전 세계에서 전쟁과 학살로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 나가는 판에 달마다 멋들어진 일러스트로 각종 무기를 홍보하는 달력이라니. 사람을, 아니 ‘적’을 ‘잘’ 죽일 수 있다고 자랑하는 달력을 보고 있자니 분노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빠에게 말했다. 무고한 사람들이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군사주의를 공고히 하는 달력을 없애버리자고 말이다. 하지만 아빠에게 군사력은 사람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 즉 ‘우리’를 적의 공격에 맞서 ‘잘’ 지키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나와 안보를 보는 관점이 아예 다른 것이다.

 

문제의 올해 달력

 

내가 생각하는 ‘안보’는 막강한 군사력, 무기, 군대와 연결되지 않는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안보(安保)’는 “편안히 보전됨. 또는 편안히 보전함”을 뜻한다. 국가 수준의 분쟁이나 갈등은 안보를 무너뜨릴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가장 효과적인 안보는 분쟁이나 갈등이 발생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일 테다. 이를 위한 구조적 예방으로는 협상과 외교, 신뢰 구축 조치, 인도적 접근과 같은 비군사적 방법이 있다. 아빠 말대로 내가 너무도 ‘이상적’이고 ‘낙관적’인 주장을 하는 것일까? 아빠는 이란이나 팔레스타인 모두 자기 국가를 지키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당하는 거라고 하셨다. 아빠에 따르면 트럼프처럼 전쟁을 일으키는 자가 당연히 나쁘지만, 그런 사람들은 늘 있기 마련이므로 그에 대응하는 국방력이 필요하다. 나처럼 ‘비현실적’인 태도로 군대도 무기도 없이 손 놓고 있다가는 당하기만 할 것이다. 언제든 있기 마련인 ‘적’에 대비하여 우리도 힘을 키워야 한다. 이게 아빠의 ‘현실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의문이 생긴다. 이란이나 팔레스타인이 더 힘센 나라였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만약 그들이 국방력을 훨씬 강화한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그보다 군사력이 막강한 나라는 또 생기지 않을까? 그러면 전쟁을 위한 준비는 끝이 없을 것이다. 나아가 전쟁으로 피해받는 것은 오로지 힘없는 나라 탓인가? 왜 우리는 전쟁을 일으킨 이를 비판하기보다는 전쟁 피해를 당하는 이에게 ‘힘을 키우라’고 말하는 걸까?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현실이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일단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니까 국방력을 키우는 것이 최선일까?

물론 아빠 또한 전쟁을 막고 싶기에 이를 최선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차선’일 뿐이다. 하지만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는 점에서 차선이 가져오는 위험은 전혀 작지 않다. 일단 안보를 명목으로 한 많은 국가의 군비 증강은 전 세계를 전쟁으로 치닫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의 생명권과 안전을 비롯한 인권은 위태로워진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전 세계가 2025년 지출한 군사비는 2조 8,89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4,250조에 달한다. 이는 2024년에 비해 1,690억 달러가 늘어난 액수다. 이 증가분은 유엔의 1년 예산(685억 달러)과 전 세계가 기아 근절 캠페인에 쓴 돈(930억 달러)과 말라리아 퇴치 캠페인에 쓴 돈(60억 달러)을 합친 것과 맞먹는다. 한국의 2025년 군사비 지출은 478억 달러로 전 세계 13위다.1) 군사비 지출이 늘어난다는 말은 다른 영역의 예산이 줄어든다는 말이다. 어마어마한 액수에 달하는 자원으로 전쟁 대비가 아닌, 공동체의 인권을 ‘편안히 보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풍성할까? 세계적 분쟁과 갈등 악화를 조장하는 군비 증강은 사실 아무도 지키지 못한다. 오히려 모두의 복지, 건강권, 교육권 등 다양한 영역에 쓰일 수 있는 자원을 희생시키기 일쑤다.

더군다나 ‘우리’의 안보를 위해 ‘적’은 공격해도 된다는 아빠의 안보관에서 ‘우리’와 ‘적’은 각각 누구일까? ‘우리’는 곧 국가를 의미한다. 국가는 안보론을 핑계 삼아 계속 어떤 행위나 대상을 ‘위협’으로 규정하고, ‘죽음의 공포’를 체계적으로 주입함으로써 폭력을 정상적인 행위로 만든다.2) 이렇게 되면 시민의 기본권과 자유는 국익 앞에서 뒷전으로 밀린다. 하지만 우리는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이루어진 셀 수 없이 많은 전쟁과 국가적 조치가 사실 특정 기득권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역사로부터 안다. 당장 윤석열의 12.3 불법 비상계엄 사태 또한 ‘안보 위협’을 명분으로 일어났다. ‘적’은 언제든 ‘우리’ 안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누구든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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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달력

 

그러므로 우리는 군사주의와 국가의 안보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안보’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국익의 탈을 쓴 안보만을 수호하기보다는 나를 포함해 지구에 사는 공동체의 안보를 위해서 어떻게 협력할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폭력의 정당성을 해체하고, 전쟁과 군사력이 아닌 대화와 협상, 신뢰 같은 비군사적 평화 수단을 탐색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 움직임들이 모여야 아빠의 우려대로 설령 트럼프처럼 악한 사람이 또 나타난다 해도 그가 힘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아빠와의 대화는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 학자 신시아 인로가 말했듯, “세상에서 가장 군사화된 사람은 제복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 “시민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런데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아빠는 어떻게 보면 당신에게 ‘대드는’ 딸에게 결코 화내지 않았다. 당신의 의견을 말하고, 나의 의견에 반박하면서도 끝까지 침착하셨다. 그에 반해 그 순간, 가장 폭력적인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난 아빠의 가치관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대화 초반부터 아빠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마치 아빠가 전쟁을 낸 사람처럼 말이다. 가족이 언제나 내 편일 것 같고, 친근하다 보니 타인을 대하듯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보다는 ‘아빠 말이 틀려!’라는 식으로 아빠에게 내 의견을 강요했다. 아빠 주장에도 분명 배울 점과 고민할 점이 많을 텐데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붉으락푸르락해진 내게 아빠는 너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아빠처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하라고 조언하셨다. 아빠의 조언을 듣고, 예의를 지키지 않고 뾰족한 말을 잔뜩 쏘아댄 것이 죄송하고 부끄러워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나의 태도가 군사주의의 시작 아닌가! 정신이 확 들었다. 오히려 아빠의 소통 방식이 비군사적인 실천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 아빠를 그려본다. 이렇게나 다른 가치관을 가진 부녀 관계이지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한다. 내가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며 3년 가까이 살았을 때 아빠가 제주도에 출장을 온 적이 있다. 아빠가 제주도까지 온 이유는 서귀포 중문에서 열리는 무기 연구 컨퍼런스 때문이었다. 각자 제주에 있는 이유가 딴 판이어도 아빠는 나를 만나러 강정에 방문하셨고, 나와 지내는 평화 활동가들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식사하셨다. 엄마와 아빠가 여행 오셨을 때도 두 분은 나를 위해 해군기지 앞에서 열리는 일상저항행동인 인간띠 잇기에 동행해 주시기까지 했다. 딸과 일상을 나누고, 딸을 응원하고자 자신이 평생 해온 일의 가치를 비판하고, 그에 반대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 곁에 기꺼이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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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에 놀러와 마을 강아지를 함께 산책시키는 아빠

 

늘 자신이 맞다며 일장 연설을 하는 딸을 위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은 새로운 환경에 당신을 노출한 아빠를 떠올리며 나를 반성한다. 과연 나는 진심으로 아빠와 대화하려고 했는가? 연결되려고 했는가? 설사 그 대화가 설득을 목표로 하더라도, 논리뿐만 아니라 존중 어린 태도를 지녔는가? 그런 점에서 딸이 말하는 평화를 알고자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한 아빠야말로 진정한 평화 활동가가 아닐까? 절대 언성을 높이지 않고 딸과 대화를 이어온 아빠로부터 나는 비폭력 저항의 의미를 배운 것은 아닐까? 어쩌다 보니 (인정하기 싫었지만) 아빠의 태도에서 새로운 ‘안보’의 씨앗을 발견한 듯하다.

언젠가 비폭력 대화를 충분히 연습한 뒤에 다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우리’와 ‘적’은 사실 구분되지 않아도 될,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보는 군대와 무기가 아닌 서로를 향한 경청과 공감으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우리의 ‘안보’를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빠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담아 찬찬히 말할 것이다. 허무맹랑하게만 들리더라도, 아무도 군대에 가지 않고 총을 장전하지 않는 날을 한 명씩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진리처럼 보이던 군사주의가 어느 순간 무너질 것이라고. 악은 악으로 몰아낼 수 없으며, 어둠은 빛 때문에 물러난다고. 그리고 이 대화를 하기까지 아빠의 비폭력적인 태도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꼭 전하고 싶다.

 

 

1) 전쟁없는세상, [보도자료] 2026 세계군축행동의 날(GDAMS) 공동기자회견: 군비증강의 종착역은 전쟁일 뿐, 2026.04.27., https://withoutwar.org/?p=24167

2) 이대훈, 「복합위기와 탈안보: 안보 사슬 벗어내기」, 『공존의 조건』, 피스모모,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