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전쟁없는세상)
‘보수집회 때마다 등장하는 군가와 군복을 어떻게 볼 것인지, 한국 사회의 군사주의 문제에 대한 질문과 평화운동의 과제에 관한 제언’이라는 주제로 소중한 지면이 나에게 할애되었다.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으려면 가톨릭평론의 창간 목적이었던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 깊은 소통과 치열한 자기 성찰’이 될 수 있는 글이 나와야 할 것인데 컴퓨터에 앉아 있는 지금 어떤 흐름으로 글을 써야할지 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런 기분이 들까 좀 생각해 보았더니 보통 내가 익숙했던 주제는 ‘우리’ 안의 군사주의는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볼 것인가 뭐 이런 종류의 것으로 여기서부터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도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아닌 ‘저들’, 소위 ‘보수’의 군가, 군복, 군사주의를 어떻게 볼지, 거기서부터 평화운동의 과제를 어떻게 도출할지가 원고지 30매 한큐에 꿰기가 좀 난감하다는 생각이 든 것 같다. 물론 내가 평상시 그 분들에게 관심이 1도 없어서 왜들 그렇게 군가를 부르고 군복을 입으시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혹은 알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얼마 전 방영한 무한도전 국민의원 특집에서 사회자도 얘기했듯이(‘국민이 바라는 2017 대한민국의 키워드가 지난 겨울만 해도 소통, 정의, 평등이다가 최근 화합, 미래로 바뀌었다’) 국민 다수 촛불의 목적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구속수사가 성사된 후 어쨌든 그 과정에서 많은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었고 미래를 위해서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보수’ 집회를 보면서, 주변 친구의 평범한 아버지가 그 집회에 가고 싶어 하신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촛불 집회 끝나고 친구들끼리 맥주 한 잔 하려고 들른 시청 근처 술집에서 테이블 위에 있던 자신의 가방과 태극기를 웃으면서 치워주시는 (생각보다 상냥한) 노인을 봤을 때 태극기/성조기/(가끔 이스라엘기) 집회에 주는 것 없어도 참여하고 싶어 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왜 그들은 군복을 입고 군가를 부르는가
아무래도 가장 일반적인 분석은 태극기/성조기/(가끔 이스라엘기) 집회 참여 주 계층인 노년층의 소외감, 박탈감인 것 같다. 집회 참여자의 다수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노년층으로 현실의 소외감, 박탈감이 좋았던 시절(혹은 좋았다고 믿고 있는 시절)의 향수에 젖게 만들어 이러한 감정이 시위 참여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노인자살률, 빈곤률이 OECD 1위인 반면 노인행복지수는 최하위인 점을 상기해본다면 놀랄 일은 아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좋았던 시절은 자신들이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를 가졌던(혹은 가졌다고 믿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우리 아버지 세대가 지금 세대보다는 많이 낮은 징집율로 스스로가 군복을 입어보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고는 하지만 반공 국시, 총칼에 의한 권위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에 군복과 군가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그 시기의 상징일 것이다. 이 서사는 낯선 것이 아니다. 과거 산업화시대의 제국을 동경하며 브렉시트를 결정한 영국에서도,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불가능한 공약으로 트럼프가 당선된 미국에서도 이러한 분석틀은 유효하게 작동한다. 내가 힘들어죽겠는 사회적 문제는 있는데 이 문제의 원인을 잘못 짚고 엉뚱한데 화를 푸는 격이다. 사회심리학자들 역시도 초고도 테크놀로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급속한 고령화가 가져온 사회적 문제의 심각성과 노년층 대부분이 겪고 있는 소외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며 태극기/성조기/(가끔 이스라엘기) 집회와의 깊은 상관성을 분석하였다.

2008년 한미FTA 비준 촉구 시민대회에 참석한 보수 단체와 시민들. 군복을 입고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드는 보수 집회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진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92597.html
이들의 탄생에 보수 기독교가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를 분석한 글도 눈에 띈다. 변론 중 기도를 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 변호인단이나 삼성동 사저 담벼락을 두드리며 통성기도를 하는 박사모들의 모습에서 보수 기독교와 ‘보수’ 집회 참가자들의 연결성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박사모들을 조직해서 태극기/성조기/(가끔 이스라엘기) 집회의 크기를 키우는데 일부 보수 기독교 교회들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예수의 수난과 대비시키며 제3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논리보다는 종교식 믿음으로 무장하여 신자들의 결속감을 키웠다.
캠페인의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도 군복과 군가는 자신들이 얼마나 단호한지 혹은 무서운지(내 말을 안 들으면 본때를 보여주겠다. 말로만 말고 힘으로!)를 드러낼 수 있는 유효한 도구이다(혹은 도구라고 생각하기 쉽다).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적 열세를 폭력성과 힘으로 대등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촛불이 거대한 규모와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언론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면 태극기/성조기/(가끔 이스라엘기) 집회는 군복+군가=힘, 질서, 정의로운 보수, 애국같은 메시지로 다가가려 했을 것이다(만약 그런 전략이 그분들에게 있었다면 말이다).
이 외에도 이들이 왜 군복을 입고 군가를 부르며 결집 하는가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권력, 자본과 결탁한 집회 조직자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빈곤과 차별에 내몰려 돈벌이 수단으로 집회 참가를 결심한 북한 이탈주민을 보면 이는 심지어 우리 사회 인종차별의 문제, 이주문제와도 만난다.
협력자들의 범위
태극기/성조기/(가끔 이스라엘기) 집회를 낳은 정치, 경제적 문제는 정치, 경제 차원에서 바꿔나가야 할 일이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누구나 노인이 된다. 노년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나의 노년이 그들과 다르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 세력, 운동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사회통합이라는 것이 어떤 수준까지는, 어떤 수준에서는 필요하지만 이것은 사실 사회운동의 몫이라기보다는 정치의 몫에 가깝다. 사회운동은 어떤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고 고쳐질 때까지 계속 데모를 하는 것인데 보통 이러한 문제는 사회의 기득권층의 유지, 확대로 발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 기득권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기득권이 유지, 확대되야 자신들에게도 떡고물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저항에 매번 직면한다. 이 저항은 권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운동은 미시적으로는 매번 지는 것과 같은 싸움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전략을 사용해야 할까.

비폭력 트레이닝에서 사용하는 ‘우리 편 찾기’ 툴. 사회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을 다 설득해야할 필요는 없다. 각각을 왼쪽으로 한 칸씩만 움직이게 해도 캠페인은 성공할 수 있다.
위의 표는 전쟁없는세상 비폭력 트레이닝에서 <운동전략세우기> 트레이닝을 진행할 때 사용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제일 왼쪽에 보이는 적극적 우리 편은 내 의견에 동의하고 내 편에 서서 싸울 사람(단체)을, 소극적 우리 편은 내 의견에 동의하나 관련 활동은 거의 안 하는 사람( 단체)을, 중립은 관망자를, 소극적 반대편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나 나를 적극적으로 막아서지 않는 사람(단체)을 의미한다. 전쟁없는세상의 <운동전략세우기> 트레이닝에서는 위와 같은 우리편 찾기 툴을 이용해 어떤 그룹이던 운동이건 이 5가지 카테고리 안에 자신들의 운동의 대상을 위치 지워 보게 한다. 이 분석이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우리가 어떤 캠페인을 준비하고 시작할 때 흔히 그 캠페인의 대상 집단을 설정하는 것 혹은 대상 집단을 분석하는 것을 건너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얼핏 한 덩어리처럼 보이던 대중이 사실은 5가지 범주로 나뉜다는 것을 표를 통해 한 눈에 볼 수 있고 따라서 우리 캠페인의 언어도 어떤 대상을 목표로 진행하는가에 따라 조금씩 톤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도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 운동의 목표는 좀 더 정교해 질 필요가 생겼다. 소극적 반대편이 갑자기 적극적 반대편이 되기란 로또에 당첨되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림 속 화살표는 그것을 의미한다. 한 칸씩 끌어올 수 있다는 것. 소극적 우리편을 내 의견에 동의하고 내 편에 서서 싸울 적극적 우리 편으로, 중립인 자를 내 의견에 동의하는 소극적 우리 편으로, 나를 적극적으로 막아서지는 않지만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소극적 반대편은 관망자로 끌어오는 것이다. 하기에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어디까지 끌어올 수 있을지 목표도 달라지고 구사하는 논리나 슬로건도 달라지게 된다. 이 때 적극적 반대편은 사회운동에서 큰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적극적 반대편도 소극적 반대편으로 움직이면 좋겠지만 이 그룹의 특징은 지난 탄핵 정국의 ‘보수’집회 참가자들을 생각하면 알 수 있듯이 굉장히 분열적이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움직이기가 매우 어렵다. 여기에 쓸 에너지를 다른 대상 집단에게 쏟는 것이 훨씬 가성비가 좋고 캠페인의 목표를 이루는데 수월하다. 이것은 적극적 반대편을 조롱하거나 경멸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냥 버린다는 거다. 그들과 논리 싸움을 할 필요도, 설득을 할 필요도 없다(해도 안 된다). 운이 좋으면 이번의 태극기/성조기/(가끔 이스라엘기) 집회처럼 적극적 반대편이 활발히 활동하면 할수록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사람들을 우리 쪽으로 한 칸씩 끌어올 수도 있다. 오랜 세월의 사회운동 분석이 보여주는 결론은 이들을 껴안지 않아도(즉 운동의 대상으로 삼아서 우리 편 쪽으로 끌어오지 않아도) 사회운동은 성공해왔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또 있다. 과연 우리의 데모와 캠페인은 제3자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하는 것이다. 제3자들, 즉 아직 어떤 쪽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 쪽으로 한 칸씩 끌어오는 것은 운동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한방, 아니 그것 자체가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기획하지 않고 혹은 기획했더라도 성공시키지 못한 운동은 실패한 운동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구속 시킨 일등공신이 오히려 박사모나 변호인단 중 일부라고 할 정도로 제3자가 볼 때 이들의 발언이나 행동은 공감할 수 있을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이 입을 벌리고 태극기/성조기/(가끔 이스라엘기)를 흔들 때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이들의 주장에서 멀어져 갔다. 자신들의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려는 전략이라는 분석도 있었지만 이걸로 얼마나 많은 지지자가 결집되었는지 알 수 없는데다 분명한 건 대세를 바꾸기에는 핵부족일 정도로 미약한 수준이었단 것이다. 좌파의 운동도 캠페인도 이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꿘충’이란 말이 있듯이(물론 이 혐오 단어는 꿘충이 사용하는 언어 때문에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이러한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좌파들도 어떤 액션, 어떤 캠페인, 어떤 운동을 기획할 때 우리 내부의 논리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행동과 언어가 관망자들의 머리와 마음을 얼마나 얻을 수 있을 것인가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군사주의
태극기/성조기/이스라엘기 집회 참가자들의 군사주의는 제정신인가 싶게 폭력적(빨갱이를 다 죽이자거나 군대여 일어나라거나 하는 식)이었다. 우리 일상에서 발견되는 군사주의는 이들처럼 과격하진 않지만 꽤 확인할 수가 있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진보의 집회에서도 예비군복 차림의 시위대가 등장했었다. 이들은 여성과 약자들의 보호자를 자처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왜 꼭 군복이어야 할까, 왜 나의 안전은 군복이 지켜줘야 하는 것일까… 사실 이들의 대부분은 군대에서 같은 군복을 입은 상관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맞아야 했던, 즉 군복의 상관이 약자인 나를 보호해주기는커녕 억압자였던 경험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물론 일상의 미시적 경험과 안보=군사안보라는 거시적 담론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비록 군복에게 당했지만 나보다 약한 사람들은 군복을 입고 돕는다는 이런 분열적 사고방식은 의아스럽다. 사실 안보논리는 그 맥락상 이렇게 보호자/피보호자(혹은 안보공급자/수요자)를 상정한다. 물론 여기서 보호자는 강대국, 국가, 남성, 피보호자는 약소국, 국민, 여성 식으로 성별화, 위계화 된다. 이러한 국방/안보의 담론에서 여성의 관련성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며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선구적인 연구와 활동으로 그 연결성이 뚜렷이 드러났다.
대표적으로 기지촌의 사례를 보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미군의 주둔이 우리의 안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군의 주둔으로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서 어느 정도는 안전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기지촌에 살고 있는 여성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미군의 주둔을 위해 부대 근처에는 기지촌이 형성되었고 한국 정부는 이 여성들을 미군 위안부라고 부르며 애국자라 칭했다. 미군 위안부들은 군인이 군복무와 전투를 제대로 치르기 위한 필요요소로 기능하며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은 국가안보에 비하면 사소한 것 혹은 부수적 피해로 일축되었다. 이 여성들에게 군대 혹은 군복은 안보일까 아닐까. 현재의 안보담론에서는 오로지 군사적 안보만이 상정되고 논의되며 그 이외의 안보는 테이블 위에 올려지지 조차 않는다. 하지만 안전하면 저절로 세월호를 떠올리는 우리들에게 군사안보는 다른 모든 안전의 개념과 함께 동등하게 경합되어 토론되고 합의되어야 할 무엇이지 다른 모든 안전의 상위에 있는 개념일 수 없다.
군복이 빛을 발할 때
강철민과 이길준은 2003년과 2008년 각각 육군과 전투경찰로 군복무를 수행 중이었다. 입대를 할 때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딱히 즐겁지는 않았다고 한다. 가야 한다고 법에 정해져 있으니까 다른 방법이 없었고 그래도 한국의 군대는 당장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니까 라며 가기 싫은 마음을 억지로 다독였다. 운이 없었는지 이들이 군복무를 할 때 각각 이라크 전쟁과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터졌고 이라크 파병을 자원할 병사를 찾는다는 공고가, 시위를 직접 진압하러 가야 한다는 현실이 이들의 삶과 양심을 짓눌렀다. 결국 결심이 선 날 그들은 각각 군복을 꺼내 입었다. 이들은 군복을 입은 채 파병의 부당함을, 촛불 시위의 정당함을 호소하며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이들의 군복은 이들이 제3자가 아닌 문제의 당사자임을 확인시켜주며 우리가 미군을 도와 이라크를 재건하고 이라크인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을, 공권력은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기관이지 억압하는 기관이 아니라는 각자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해외에서도 Veterans For Peace와 같은 예비군 단체들이 시위를 할 때 군복을 차려입고 훈장을 달고 나오는 것은 흔한 모습이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강제진압을 거부하며 병역거부를 한 이길준. 이길준은 병역거부 선언 기자회견 당시 전투경찰복을 입고 있다가 그걸 벗어던지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강철민과 이길준의 군복은 내게는 내 안보를 지켜줄 완벽한 보호자, 제공자를 상징하기 보다는 분단, 군부독재 시절과 징병제가 지속되는 사회 속에서 보호자, 제공자의 코스프레를 강요당한 인간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코스튬으로 보였다. 군복은 반군사주의 운동에서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태극기/성조기/이스라엘기 집회의 군복은 이제는 한물간 1세대적 군사주의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실패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우리 사회의 군사주의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다른 모든 제도, 인식과 마찬가지로 군사주의도 매번 세련된 옷으로 갈아입는다. 물론 그 근간에 존재하는 군대(힘) 제일주의 역시 세련되게 사람들의 머리에 마음에 사회 제도에 안착한다. 민간의 영역을 넓히고 군대의 영역을 양적, 질적으로 좁히는 것이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평화운동의 목표일 것이다.
*이 글은 격월간 <가톨릭 평론> 2017년 5~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메인 이미지의 출처는 뉴스타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