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덕(징병제 연구자)

 

전쟁없는세상 주: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이해서, ‘병역거부’ 병역거부자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살펴봅니다. 전쟁없는세상은 병역거부가 단순히 입영영장을 받아든 시기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생을 병역거부자로 살아가려는 노력이 오히려 병역거부자가 되는 일이겠지요. 병역거부의 경험이 병역거부자들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는지, 이미 감옥에 다녀온 병역거부자들은 현재 삶에서 병역거부자임은 언제 어떻게 느끼는지,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석사학위논문 심사를 앞두고 지도교수님이 내 자료조사가 부실하다며 한참을 혼내셨던 날이었다. 역사학 쪽에선 5학기 만에 석사학위논문을 써내면 천재로 불린다기에 괜히 욕심만 과했던 때였다. 마음만 급하니 자료 몇 개를 가지고 분석만 뻥튀기하는 수준이었다. 지도교수께 혼이 날 법도 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진행하던 학술대회 쉬는 시간에 굳이 불러서 혼내시는 게 좀 이상하긴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께서는 말을 어느 정도 마친 뒤에 슬며시 봉투를 내미셨다.

“사정이 넉넉지 않을 텐데, 이걸로 꼭 일본어 학원을 다니시게나.”

선생은 평소에 내게 공부를 계속하려면 외국어를 열심히 익혀두라고 당부했다. 그렇지만 어학공부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학원비를 마련하기도 좀 빠듯했지만 무엇보다도 시간이 부족했다. 역사학 방법론 같은 것을 대학원에 와서야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학원을 다니는 시간이 나지 않았던 면도 있었다.
물론 돈이 있다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됐고, 그 시간에 학원을 다닐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선생이 내민 봉투를 보면서 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선생은 그 모습을 보더니 급히 자리를 뜨셨다.

“그럼……다음 주에 보시게…….”

또 언젠가, 선생은 둘이 술을 마시다가 내게 돈 잘 버는 사람을 만나서 ‘등처가’로 살 생각을 해본 적이 없냐며 농을 던졌다. 공부를 하면서 보내야 할 시간이 길다는 사실을 내게 강조하려고 심술궂게 물은 말이었다. 내가 답했다.

“그렇게 살려면 제가 애당초 이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았겠지요.”

선생은 내 이야기를 듣고선 맞장구를 치며 크게 웃으셨다.

대학원에서 졸업을 하고 진학을 준비하면서 선생과 몇 년 간 종종 만나왔다. 내가 진학을 했던 대학원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Transnational Humanities)’을 표방하면서 문, 사, 철학이라는 인문학 학제를 넘어서보려는 시도를 하는 협동과정이어서 박사과정이 개설되지 않았다. 그래서 진학을 위해선 다른 학교를 알아봐야 했는데, 내가 있던 대학원이 한국 학풍과 부딪치는 면이 많아서 유학을 준비해야만 했다.
아마도 선생은 전형적이지 않은 지도 교수일 것 같다. 선생과 만날 수 있었던 건 이 대학원이 전형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던 일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내 미래에 대해 어떠한 보장도 해주지 못하고, 과정 운영에 있어서도 준비가 부족했던 면이 있어서 곤란한 처지를 겪은 적도 있었지만, 나는 이 대학원에서 배운 관점들을 통해 그간 정리되지 않던 체험들을 비로소 정리해볼 수 있었다. 전형적인 삶과 많이도 어긋난 길이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선생도 만날 수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병역에 대한 질문과 학술운동

인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건 출소를 하고 나서 대학원에 진학한 뒤였다. 대학을 다닐 때는 학생운동에 발을 살짝 걸치고 있었다. 그때 주위에서 자주 들은 말이 “나중에 정치하려는 거야?”였다. 나중에 병역을 거부하고서 병역거부자가 되니 그런 소리는 이제 들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니 그때부턴 주위 ‘운동권’들이 이렇게 묻곤 했다.

“나중에 교수하려는 거야?”

이런 질문에 답을 하느라 언젠가 부턴 ‘학술운동’이란 말을 일부러 쓰기 시작했다. 공부라는 것도 현장이 다를 뿐 결국엔 또 다른 ‘운동’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선 입진보니 먹물이니 하며 깎아내리는 말들도 있지만 인문사회과학 공부는 권력을 정당화하고 재생산해주는 지식들에 맞서 싸우는 일이다. 그래서 지식권력은 학술운동이 싸워가는 현장이다.
나 또한 병역이란 관념을 지지하는 지식에 맞서보고자 공부를 시작했다. 많이 늦은 공부였다. 병역거부로 감옥에 다녀온 뒤에 서른이 다 되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군대를 갔다 온 남자 대학원생들에 비해서도 2~3년 정도 과정이 늦은 편이다. 서울지역 가톨릭대학생연합회 대표를 하면서 학생운동 언저리에 있었고, 병역을 거부한다며 재판도 준비하느라 학부 졸업도 많이 늦어졌다.
출소한 뒤에는 막연히 공부를 해야겠단 생각만 하고 있었다. 20대를 보내며 겪은 경험들을 통해 내 안에 많은 질문들이 쌓였기 때문이었다. 학부 땐 공학을 전공했지만 전공공부와 거리가 멀었다. 오래 전, 고등학교 땐 앞뒤 없이 기계공학과에 가고 싶어 했다. 기계공학과에 가면 대기업 임원까지 될 수도 있단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모양이다. IMF 때 집안이 어려워졌는데, 대기업 임원이 된다면 예전에 살던 집도 되찾아올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대학생활이라는 게 너무 삭막했다. 수능만 보면 한숨 돌릴 줄 알았더니 또 다른 수험생활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같은 과 선배들은 시험 족보나 숙제 해답을 구하는 방법에는 빠삭했지만 그뿐이었다.
대학에 가면 ‘삶의 의미’가 채워지길 바랐다. 고등학교 때처럼 수능 날만을 위해 달리는 삶을 다시 시작한다는 건 너무 허무했다. 대학 이후엔 수능처럼 정해진 끝도 없었다. 평생을 그렇게 보낼까 두려웠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한 뒤로 기계공학과에 적(籍)을 걸어둔 채 인문사회과학과 신학 관련 서적들을 읽었다. 책을 통해 사람다움이나 예수를 따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알고 싶었다. 물론, 정규 과정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불안하기도 했지만, 내 삶에서 자유를 끝까지 밀어내보는 경험을 통해 어설프게나마 내 존재가 확장하는 느낌도 크게 느꼈다.

2009년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너 군대 왜 가니?' 행사에서 이야기 중인 백승덕

2009년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너 왜 군대 가니?’ 행사에서 이야기 중인 백승덕

대학을 다닐 때 시위에도 여러 번 나갔다. 시위에 나가서 내 또래 경찰들에 가로막히고 밀려 쫓겨날 때마다 의아함도 들었다. 대체 무엇이 국가에 이렇게나 많은 젊은이들을 거의 공짜로 공급해주고 있는 걸까? 2009년 용산참사와 쌍용차 파업 진압 사태를 보면서 내게 남아있던 의아함은 결정적인 질문이 됐다. 국가가 의무 복무 중인 청년들을 동원해 철거민과 노동조합원들을 쫓아내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게 만들었는데, 시위를 하던 철거민과 노동조합원 중에는 청년기에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진해서 복무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현실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국가의 이러한 조직적 폭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일단 저항의 의미에서 병역을 거부했다. 감옥에서 다섯 계절을 보내고 나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내 안에 설명이 되지 않은 채 남은 질문들을 대학원에서 체계적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역사학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처음에는 어떤 대학원에서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몰라 막연했다.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감옥 안팎에서 여러 사람들과 군대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 모든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병역에 관한 질문들이 쌓였을 따름이었다. 국가폭력이 문제라며 공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왜 굳이 거부는 해가지고 괜히 힘들게…’라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자신이 군대에 가서 소위 명문대생들에게 명령을 해봤던 경험에 비춰봤을 때 군대가 바깥 사회보다 더 평등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해준 친구도 있었고, 군대 안에선 적어도 바깥 사회보다 덜 외로웠고 사람들 관계도 더 인간적이었다며 군대생활이 그리울 때도 있단 후배도 있었다. 선 자리에 따라 제각기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이 병역을 통과의례처럼 받아들이는 방식 또한 이처럼 다양한데, 단순히 병역은 신성하다거나 반대로 사람들이 군사주의에 포섭된 것이라는 설명은 불충분해보였다. 국민 모두가 병역을 거부한다면 국방은 누가 지키겠냐는 질문도 어느 정도는 타당했다. 병역이 국가폭력을 뒷받침해주기에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가 조직된 폭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 개개인이 안전을 보장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병역은 대체 무엇이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적절할까?

출소를 하고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던 차에 기자로 있던 지인이 새로 생기는 대학원이 있다며 소개해줬다.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이라는 생소한 학문을 다루는 협동과정이었다. 지인은 이 대학원 과정이 국민국가나 민족 같은 틀에 갇히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며 폭넓게 공부하려고 만들어졌다고 알려줬다.
반신반의하면서 지인과 함께 대학원 설명회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여러 교수들의 연구에 관해 듣다보니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병역이 우리 사회에서 무엇인지 물으려면 병역이 자리 잡게 된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해보아야 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그간 병역은 무엇으로 다가갔을까? 병역은 단순한 억압만은 아니었다. 병역은 이회창 같은 엘리트를 대선에서 두 번이나 떨어뜨리는 해방감도 느끼게 해줬다. 그러니 병역에 맞서 싸우기가 그 만큼 더 어려운 것이다.
나는 병역의 신성함을 깨뜨리려면 역사적 접근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역사적 접근을 중심에 놓고서 공부해왔다. 그런데 역사학계라는 곳 또한 신성함으로 둘러쳐진 성이었다. 여기서 식민지 시기와 해방 후를 연결 지어서 이야기하는 건 신성모독이었다. 그 구분엔 별다른 근거도 없었다. ‘내 나라, 내 민족에 대한 사랑’은 의심 받아선 안 될 신앙이었다.
학계에서 논문을 심사할 때 심사위원 한두 사람이 신성모독을 이유로 탈락시켜도 반론할 기회 없이 그대로 끝이었다. 그것 역시 담합이었다. 사실, 학계가 그런 담합이 전혀 없이 객관적이기만 한 곳이라면 교수들이 왜 죄다 남자들만 있겠나.

 

새로운 현장

그리곤 오늘이다. 내일은 다시 출근을 해야 한다. 그간 진학을 준비하다가 한 달 전부터 대안학교에서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간 유학준비를 하면서도 고민만 많아서 영어시험 준비 같은 것에 몰두하지 못했다. 대학의 인문학이라는 장(field)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유학을 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던 탓이다. 대학이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는 진단은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영미권에서도 갈수록 심각하게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일리노이대에서 한국학 전공교수를 임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일도 있었다. 해일이 일면 바닷가부터 덮치는 것처럼 대학인문학이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같은 조그마한 지역을 대상으로 삼는 연구부터 공격받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 있는 대학입학에 성공한다면 개인적인 수준에서는 파국을 좀 더 유예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대학에 남아서 박사과정을 보내고 있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 일들에 동원되느라 자기 공부도 못하고 소진돼버린다고 한다. 그러니 공부를 계속해나가려면 유학을 가는 길이 가장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2016년 '만인만색' 연구자네트워크 창립총회 기념사진. 만인만색은 국정화 정책을 반대하는 젊은 역사연구자들의 모임이다. 백승덕은 만인만색 활동을 통해서 국정화 정책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해석의 다양성과 역사연구의 전문성을 아울러 고민하려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한다.

2016년 ‘만인만색’ 연구자네트워크 창립총회 기념사진. 만인만색은 국정화 정책을 반대하는 젊은 역사연구자들의 모임이다. 백승덕은 만인만색 활동을 통해서 국정화 정책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해석의 다양성과 역사연구의 전문성을 아울러 고민하려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한다.

하지만 주위 상황을 좀 더 찬찬히 돌아보니 공부의 쓸모에 대해서 묻는 것이 훨씬 시급하게 느껴지는 일들이 많았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소송, 이른바 ‘상고사’ 논란과 재판, 그리고 한국사교과서 국정화까지……. 시각을 좀 더 확장하면 진보진영 내에서 벌어졌던 소위 ‘데이트성폭력’ 사태나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둘러싼 논란 등이 추문만 일으킬 뿐이지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 문제들이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옥스포드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 truth)’을 꼽았다고 하던데, 정말이지 탈진실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이란 무엇이며, 누가 어떻게 규명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진실이란 사회적으로 어떤 효용이 있을까? 학계는 진실의 생산절차를 독점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면 공부를 하는 의미에 대해서도 스스로 답을 하지 못한 채로 관성대로 살아가게 될 것 같아 유학준비를 하는 내내 두려웠다. 이런 고민들을 뒤로 미뤄둔 채로 몇 달 정도 영어공부에 매진하기가 선뜻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징병문제연구소 같은 것을 만들어보면 어떨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맨 땅에 헤딩하는 것처럼 너무나 막연한 일이었다. 이런 고민들을 하던 중에 지금 나가고 있는 대안학교에서 일을 제안 받았다. 징병문제와 관련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들을 청소년들과 나눠본다면 서로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란 말을 듣고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게 됐다.

학교에 정식으로 출근하기 전에 ‘군대에 대해 질문하기’란 워크숍부터 맡았다. 내가 징병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질문들을 여기서 풀어볼 수 있을지 시험해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학교 일을 제안해주신 분이 워크숍을 제안해주셨을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들을 존중받는 기분이 들어서 감사했다.
워크숍 중에 전쟁에 대해 다루면서 정규전/내전/국제전 같은 개념들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한국전쟁은 내전인가?’란 질문을 던졌다. 조금 있다가 어느 학생이 답했다. “한국전쟁에 대해서 잘 몰라서 판단하기가 어려워요.” 나는 그 질문을 듣고서 일을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시험에 갇혀 있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로 논란이 있을 때 한국사를 전공하던 대학원생들과 함께 역사학의 성격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었다. 역사해석이 진정 다양할 수 있으려면 현행 검정교과서 체제도 넘어서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게 결론이었다. 수능문제를 출제해야 하는 현실에서 한국사교과서를 ‘진짜’ 다양하게 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워크숍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그런 점에서 자유로웠다. 자신이 한국전쟁에 대해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수능체제에선 그렇게 답할 수가 없다. 정답은 교과서에 이미 적혀있기 때문에 모른다는 대답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말하면 혼나기 십상이다.
답을 맞추기 위해서 역사를 공부하면 결국 교과서에 적힌 ‘사실’들을 물신화하게 된다. 이처럼 궁금함이란 전혀 없는 공부가 무슨 재미가 있을까. 국정교과서가 역사의 다양성을 해칠 거라 우려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현행 검정교과서 역시도 역사적 경험이 다양할 수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수능이 출제되는 가이드라인에 맞춰서 교과서를 써야하기 때문이다.

워크숍 때 ‘한국전쟁에 대해서 모른다’고 답해준 학생 덕분에 우리는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덕분에 우리는 여러 전쟁에 대해 찾아서 공부해볼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됐다. 역사적 경험은 이런 때에나 다채로워진다. 각각의 전쟁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교과서에 갇히지 않고 여러 관점들을 찾아보고 비교해보려는 노력도 이런 질문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우리 워크숍이 실제로 그렇게까지 나가지는 못하겠지만 더 나은 공부를 할 수 있을 가능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어 좋았다.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내게도 대안적인 학교였다.
병역을 거부한 뒤로 징병문제와 관련해서 공부를 해보겠다던 막연한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 새로 생긴 협동과정 대학원이나 대안학교 모두 제도의 경계에 놓인 자리들이었다. 그러나 경계라서 취약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형적이지 않은 선생을 만나서 지도를 받거나 시험에 얽매이지 않고서 질문을 공유할 수 있을 청소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내가 섰던 자리가 경계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만남들이야말로 ‘학술운동’의 본질을 일깨워주는 질문들을 나눌 수 있게 해주었다.

어느 시인은 ‘모든 경계에서 꽃이 핀다’고 말했다. 그 말이 진실이었으면 좋겠다. 이 경계가 내게 훌륭한 현장이 되어주길 바라며 살고 있다.

 

*백승덕 병역거부 소견서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