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야(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여름은 늘 덥지만, 나에게 올해 여름은 유독 더웠다. 아마 대부분의 시간을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햇빛을 피할 수 있는 실내가 많은 도시가 아닌, ‘길’ 위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평화를 걷다, 제주 생명평화대행진
매년 8월 첫 주에는 제주에서 생명평화대행진이 열린다. 전국과 해외에서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강정에서 제주시까지, 서쪽과 동쪽 해안 길을 따라 100km가 넘는 거리를 걷는다. 그래, 작년에 엄청 고생하며 걸었지. 무심한 태양은 따갑게 살을 파고들고, 다리는 떨어져나갈 것 같고, 허리는 부러질 것 같고, 발바닥 곳곳에 잡힌 물집의 고통으로 아악거리며 걸었지. 잠시 쉬면서 어느 해변을 바라보며 같이 걷던 사람과 나누었던 질문이 생각났다.
“가족 친구들과 하하 호호 웃으며 해수욕을 즐기고 있는 저 사람들, 참 평화로워 보인다. 우리는 왜 저런 평화 안 누리고 이런 생고생 가득 찬 평화를 걷고 있는 걸까? 나는 왜 제주 바다를 보면 웃음보다 눈물부터 나는 걸까?
다시 여름이 왔다. 또, 걸을까? 잠시 갈등했지만, 다시 제주로 향했다. 1년이 지났고 그 사이 정권이 바뀌었지만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은 여전했고 나도, 위로받고 싶었다.

매년 8월 첫 주에 열리는 제주 생명평화대행진. 올해도 참여해 함께 걸었다.
평화를 걷는 길은, 어김없이 고통스럽다
8월 초의 제주는 어김없이 덥고 습했다. 첫날부터 하늘이 뚫린 듯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게다가 1년 새 물렁해진 근육과 사무실살이로 무거워진 몸 때문이었을까. 3일째 아침에는 도저히 못 걷겠어서 차를 얻어 타 잠시 쉬기도 했다. 절뚝이며 걷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고달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포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평화를 노래하며, 정부와 사회에 분노하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토닥이고 함께 춤추며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강정 주민들과 대행진을 준비하고 이끌어가는 지킴이들은 바쁘고 바빴다. 끼니때마다 강정에서 밥을 지어 차로 실어 나르느라, 위험한 차도를 걷는 사람들이 다칠 새라 앞뒤로 뛰어다니며 행진 대열과 교통을 통제하느라, 지칠 새라 노래 틀고 발언하고 다독이느라, 매일 밤 내일이 더 의미 있는 행진이 되게 하기 위해 새벽까지 회의하느라. 그래도 눈 마주칠 때마다 웃음으로 인사해주는 모습에서 미안함과 고마움의 마음이 새록새록 돋았다.

평화대행진 스텝들의 발과 다리는 성할 새가 없다
걷는 발 위에 질문 하나가 맴돌았다. 강정마을이 ‘진짜 생명평화마을’이 되는 때는 언제일까? 해군기지가 폐쇄 되는 날? 시멘트 밑에 묻혀있는 구럼비가 다시 해를 만나는 날? 강정 주민들이 다시 한 곳에 모여 잔치를 벌이는 날? 강정 지킴이들이 ‘진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날? 이 마을에 한때 ‘해군기지’라는 괴물이 있었는데 우리가 힘 합쳐 물리쳤지, 라며 추억하는 날? 해군기지가 있었다는 것 자체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날?
그래, 그때쯤은 되어야지 하고 생각하니 아주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거저 오지 않을 평화라는 것이 명확하다. 많은 사람들은 미래의 평화보다는, 당장의 평화와 소유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고단한 길보다는, 저 편하고 안락한 해변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행진이 끝나고 강정에서 하루를 더 머물렀다. 자려고 마을회관 침대에 누우니 천장이 보인다. 기지 건설을 막기 위해 강정으로 와 이 침대를 거쳐 갔을 수많은 사람들, 투쟁의 하루를 끝내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땠을까. 나는 지금, 그들의 베었을 베개를 베고, 그들이 덮었을 이불을 덮고, 그들이 만났을 같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 계속 인간으로 살아있다면, 내년에도 나는 이 고룹고 뜨거운 길을 다시, 걷고 있을 것 같다. 잠결에 붉은발 말똥게가 귓전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신음하는 섬들, 고삐 풀린 미국
일주일 뒤, 나는 제주보다 더 덥고 습한 남쪽으로 향했다. 2014년 강정에서 시작된 “평화의 바다: 섬들의 연대를 위한 2017 국제평화캠프”의 발표자와 기록자로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올해는 일본 최남단의 이시가키섬에서 열렸다. 우리는 미국의 군사화와 국가의 강압적 개발로 오염되고 황폐화된 각 섬의 상황을 공유하고, 자연과 생명 그리고 평화가 보장되는 공동체의 섬이 되기 위한 ‘섬들의’ 연대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랫동안 전쟁터로 이용되어온 오키나와 섬의 착취와 수난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1945년 실질적 통치권을 거머쥔 미국은 오키나와를 미군기지로 덮어버렸다. 제대로 된 범죄자 처벌이 없었기에 기지에 주둔하는 수많은 미군들이 매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오키나와 여성들을 폭행하고 납치하고 강간하고 살해했다. 남성도 노인도 어린 아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1972년부터 2010년까지 발생한 미군범죄 공식 건수만 5,705건이라고 한다. 작년에도 20세의 오키나와 여성이 산책한다고 나갔다가 미군에게 끌려가 도로에서 불과 열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덤불에서 살해됐다. 또 다른 한 여성은 같은 호텔에 투숙하던 미군에게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다. 그렇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비일비재한 폭력이 존재하는 그곳에는 ‘미군기지’가 있고, 인간을 폭력을 휘둘러도 되는 약자이자 욕망의 도구로만 인식하는 미군이 있다.

바로 작년, 도로에서 10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이 자리에서 미군에 의해 여성이 살해되고 버려졌다.
중국과의 전쟁 시 섬들을 징검다리로 이용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기지화는 아베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빠르게 일본의 남단 섬들로 뻗어가고 있다. 이시가키 섬에는 자위대와 미사일 기지가, 미야코 섬에는 미군 본부와 자위대가 배치될 계획이다. 요나구니 섬은 마을에서 불과 100미터 남짓, 학교에서는 800미터 거리에 이미 군사레이더가 설치됐다. 레이더 전자파는 어린이에게 4배나 치명적이지만, 정부는 어떤 항의에도 침묵하고 있다. 괌은 이미 섬 면적의 28%가 미군기지이며, 4년 전 배치된 사드 때문에 미국과 전쟁하는 나라들의 뚜렷한 공격 목표가 되어버렸다. 2016년 해군기지가 완공된 강정에 이어, 결국 공군기지로 사용될 것이 뻔한 성산이 있는 제주는 이대로 가다가는 제2의 괌을 넘어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이나 중국이 기를 쓰고 선점하거나 파괴하려는 목표 장소가 될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전제, “내 땅도 내 땅이요, 니 땅도 내 땅이요”
“폭력을 써서 적이나 상대편을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게 하는 행위”가 테러의 정의이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적으로 규정한 나라에 폭탄을 퍼붓고,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면서 ‘우리가 세계 질서와 평화를 지켜내고 있다’고 뻔뻔하게 둘러댄다. 원주민의 동의도 기다리지 않고 기지를 짓고, 무기를 배치하고, 군인들을 주둔시킨다. 환경이 오염되고, 마을이 없어지고, 주민의 일상이 파괴되고, 전쟁의 목표물이 되는 것에 항의해도 설득하려 하지도, 설명하지도, 사과하지도 않는다. 깡패도 이런 깡패가 없다. 그 어떤 테러리스트보다 악독하다. 돌아오는 대답은 ‘동맹국 안보와 세계 평화를 위해서’란다. 정말 그럴까?
I am allowing Japan & South Korea to buy a substantially increased amount of highly sophisticated military equipment from the United States.
나는 일본과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더욱 증한 규모의 매우 정교한 군사 장비를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이다.
9월 3일 북한이 6차 핵실험을 단행했고, 다음날 트럼프와 통화한 대통령은 사드 배치를 결정했다. 도입부터 배치까지의 모든 과정이 비정상적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제기된 로비와 비리 의혹, 효용성,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재검토는 모두 ‘패스’됐다. 박근혜 정부를 촛불로 함께 끌어내리고 세워진 문재인 정부의 사드 배치 이유에 대한 답은 ‘굳건한 한미동맹을 위해, 국민을 위해, 안보를 위해’라는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이유와 똑같았다. 그런데 같은 시기 트위터에 올린 트럼프의 글에는 더 많은 무기를 팔아 돈 벌게 해준 나 대단하지? 라며 자랑하는 마음만 느껴진다. 심지어 허용‘했다’는 과거형이 아니라 ‘허용하고 있다’는 현재진형형의 표현 이면에는 앞으로 무기를 더 많이많이 많이 팔겠다는 욕망이 느껴진다.
9월 20일에 유엔총회가 있다. 다음날인 21일에는 한미일 3국이 만나 북한의 거듭된 도발에 단결하여 대응하기 위한 희의를 한다고 한다. 트위터에 대놓고 장삿속을 드러낸 트럼프는 더 많은 미국의 무기를 사라고 강권할 것이다(사실은 명령이겠지). 그리고 앞으로 한국과 일본에는 더 많은 강정과, 성산과, 소성리와, 오키나와들이 생겨날 것이다.

하늘에서 바라본 이시가키섬, 너무나 아름다웠다
누군가 나에게 내 집에 침입하는 그가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을 심어주면서 총을 쥐어준다면, 나는 그가 보이는 순간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다. 나와 내 집과 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내 집에 찾아올 그가 꽃을 들고 올 것이라 알려준다면, 나는 꽃을 담을 화분과, 얼굴 마주하고 앉아 음식을 나눌 식탁과, 노을을 바라보며 함께 춤출 노래를 준비하면서 아름다운 그가 곧 모습을 드러낼 저편 골목을 설레며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평화란, 그런 거다. 폭력으로 달성될 수 있는 평화는 없다.
문득, 저어기서 꽃을 들고 걸어오던 이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