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남성 페미니스트 교사)
“다수결에 의한 것이든, ‘민주집중제’에 의한 것이든 이견의 다양성을 허용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로 집결된 의지 아래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공동체’라면 국가적 집단에 속한다고 해야 한다.” (「전체주의와 공동체」, 이진경, 2017)
누구의 말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한국을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하면서 다양성을 존중하고 “합의를 통해 공동체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말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다양성보다는 하나의 기준을 중심으로, 합의가 아닌 동의를 강요하며, 공동체를 자신들의 이익집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양한 모습들이 단지 섞여 있다는 것이 다양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이주민, 청소년 등에 대한 혐오는 잔인하다고 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장애인 학교를 만들기 위해 장애인의 보호자들이 무릎을 꿇어야 하고, 성소수자는 항문성교로 매도당하고 있으며, 성평등 교육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교사는 집단 린치에 난도질당하고 있고, 여전히 노동착취와 폭언 등으로 이주노동자의 삶은 벼랑 끝에 몰려 있다. 인구가 줄어든다고 야단법석이지만 사실은 노키즈존(no kids zone)을 통해 아동들을 – 사실은 아동의 보호자인 여성을 – 몰상식한 존재로 만들어 배제하며, 국가의 미래라며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소년법 개정/폐지를 통해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떠들어 대고 있다. 그런데 잔인하고 노골적인 이런 폭력은 누구의 입을 통해서 발화되고 있는가? 누가 “말하고” 있는가?
그들이 말하는 ‘합의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에 대한 동의를 강요하는 수사에 불과하다. 장애는 개인의 문제이고, 성소수자는 자연의 이치에 어긋난 것이며, 여성은 여자다워야 하는 것이고, 이주민은 남의 나라에서 빌어먹고 사니까 고마워해야 하고, 청소년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고분고분해야 하는 것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합의. 이런 합의는 사실 누구의 “말”일까?
이런 식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합의’를 통해 이익을 얻는 수혜자로서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일까? 간단하다. 이 공동체는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이주민, 청소년을 자신의 권력 아래에 두려는 공동체이다. 그것은 바로 ‘장애를 갖지 않은 이성애 한국 성인남성’ 집단이다. 그래서 “말할 수 있는” 권력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말”이 곧 미덕이고, 선이고, 진리이고,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남성가부장체제가 아닐까?
남성가부장체제는 자신들의 집단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그들은 ‘외부의 적’을 가정한다. 자신들의 것인 ‘여성과 청소년’을 외부의 남성 집단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늘 위기의 공포를 조장하고 ‘힘으로 만드는 평화’를 국가와 민족과 공동체의 이익과 안녕이라는 핑계로 불가피한 것으로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군사주의는 치안과 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일상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힘으로 만드는 평화’는 가상의 적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집단권력 내부를 단속하기 위한 도구로도 활용된다. 이것의 학교 버전이 학생생활규정이 아닐까?

#내가_바로_페미니스트_교사다 운동에 동참한 이용석 선생님
학교에서 지배적인 언어와 몸은 누구의 것인가
그들에게 학교라는 공간은 이러한 특성을 지닌 한국 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한 치의 양보도 허용할 수 없는 최전선의 참호다. 학교는 그들의 언어를 바탕으로 정상/비정상, 남성/비남성, 이성애/비이성애, 결혼/미혼, 장애/비장애, 성숙/미성숙, 문명/미개, 진보/퇴행, 바름/그름, 순응/일탈, 교사/학생 등으로 끊임없이 이분법적 갈라치기를 한다. ‘남성-비장애-이성애-결혼-성숙-문명-진보-바름-순응-교사’를 유일한 정상이라고 말하고 그곳에 권력을 부여한다. 한국 사회는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 바로 ‘군대 갔다 온’ 남성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1등급 남성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현재의 한국 학교는 ‘말하는 권력’을 가진, ‘군대를 갔다 온’ 남성의 언어를 사용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남자는 군대를 갔다와야지…”라는 말은 마치 통과의례처럼 아직도 남성 학생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혹은 가야 할 의무가 없는 여성은 군대를 가는 남성들의 희생 덕분으로 먹고 사는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그리고 남성은 현역 복무를 위한 신체등급(1등급)을 최상의 남자로 정의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자신의 몸을 부정하며 남성 위계 속에서 하위를 배정받게 된다. 하위를 배정받은 남성은 남성 위계에 도전하기는 어려우니 비남성 위에 군림함으로써 보상을 받고자 한다. 이런 바탕에서 교실은 ‘1등급 남성-하위 남성-비남성’으로 편재된다. 이러한 위계 속에서 여성 교사는 단지 비남성의 위치를 배정받을 뿐이고 그래서 지금 학교에서의 학생 ‘지도’는 사실상 1등급 남성에 의한 지도가 가능할 뿐이다.
학생생활규정이라는 것이 있다. 구성원의 민주적인 논의로 결정하라고 하지만 학생생활규정 자체가 누군가의 생활을 통제하는 억압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는다. 학생생활규정은 다른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는 것을 바탕으로 기존 규범을 박제화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며, 이 자체가 하나의 의지 아래 작동되는 군사주의에 다름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규정인 교복을 들여다보자. 여전히 학생은 분별없고 미성숙한 소비자이기 때문에 보호자에게 경제적 부담이 될 것이라는 논리 속에서 교복은 용인되고 있다. 그러나 교복의 본질이 기존 세대의 의지가 권력적으로 관철되는, 신체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교복의 기준은 남성의 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현행 교복 관련 대표적 규정은 남성 학생은 바지, 여성 학생은 치마다. 여성 학생의 복장인 치마가 기준이기 때문에 남성 학생은 바지를 입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학생의 복장인 바지가 기준이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이 아니므로 치마를 입어야 한다. 오래된 성역할에 따른, 성별 권력과 위계에 따른 복장의 역사가 고스란히 지금의 교복에도 담겨 있다.
학교에 필요한 건, 페미니즘의 언어
최근 000초등학교의 성평등 교육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운동장을 남학생이 차지했다’는 내용을 맥락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운동으로 단련된 몸은 남성의 몸이다. 상대방을 제압하는 몸, 소위 스포츠 정신에 어울리는 몸,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몸, 근육질로 거듭나는 몸은 남성의 몸이어야 한다. 여성의 몸은 이런 단련과는 거리가 멀다. 이 사회는 여성 학생에게 남성의 것과 같은 몸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그 거리를 멀어지게 했다. 결국 학교에서 운동장이라는 공간은 단련의 상징으로 남성 학생에게 배정된다.
남성의 몸과 언어가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아니 특정한 몸과 언어가 기준/일반/보편이될 수 없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언어가 필요하다. 페미니즘 언어는 어떤 특정한 언어와 몸이 일반화, 기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때 특정한 언어와 몸이란 지금 우리 사회(학교)에서는 바로 남성의 언어와 몸을 의미한다. 세상을 끊임없이 둘로 나누어 ‘남성-비장애-이성애-결혼-성숙-문명-진보’ + 군복무를 유일한 정상이라고 말하는 언어와 몸을 의미한다.
페미니즘 언어는 이러한 언어와 몸을 부정하면서 중심이 하나일 수 없다는 점, 그 하나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 다양성은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실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다양한 언어와 몸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언어이다.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이것을 말하려고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언어에 저항할 수 있도록 다양한 언어를 드러내야 한다. 기존 남성 중심의 언어와 몸을 의심하고 해체하는 실천을 해야 한다. 요즘 학교에서 이러한 시도를 하는 교사들에 대한 집단 린치가 아무렇지도 않게 거침없이 가해지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권력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 권력에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분명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공생, 조화, 함께, 민주, 시민, 부드러움’ 등으로 평등을 현혹하는 그들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가부장체제와 군사주의, 자본주의,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분명한 말을 사용하자. 학교에서 우리는 평등이 정의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역설하고, 평등을 가장한 그들의 언어를 고발해야 한다.
먼저, 페미니즘을 공부하자. 그러면서 의심하고, 의심한 것을 바꾸고, 바꾸기 위해 실천하자. 아마도 책읽기 모임, 소수라도 모이는 동아리, 교육과정에 사용되는 교재와 언어에 대해 의심하고 재구성하기 등이 필요하지 않을까. 혹시 학교에서 내 옆에 – 함께 할 수 있는 – 소외되고 배제된 그들은 없는지를 살피는 것부터 시작해도 좋겠다.

9.26 공동행동 #학교에_페미니즘을 동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