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모(병역거부자)
10월 28일, 일본에서 있었던 ‘인트레피드의 4인으로부터 50년 행사’에 초청을 받아 다녀왔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베트남전쟁이 시작되었을 즈음의 일이다. 당시만 해도 징병제를 유지하던 미국. 그러나 강제로 타국에 끌려와서 전쟁에 동원된 미군 개개인들이 과연 베트남전에 찬성했을까? 우리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 중에 전쟁 초기, 당시의 중간기착지였던 일본 땅에서 군복무를 거부하고 탈영했던 4명의 미군이 있었다. 그리고 베헤이렌(일본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연대)은 이 4명을 도와 다른 나라로 망명을 시켰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베헤이렌에 의해 망명한 미군들이 계속해서 나오게 됐으며, 이러한 망명운동과 함께 벌어졌던 반전운동으로 인해 베트남전에서 일본의 역할은 한국전쟁 때와는 사뭇 달라지게 되었다. 비록 베트남전은 7년에 거쳐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지만, 전쟁의 양상을 변화시키고 결국 미국이 반전 여론에 백기를 들게 된 요인 중에서는 일본에서 베헤이렌이 벌였던 반전운동도 한 몫을 차지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병역거부자 크레이크 앤더슨을 만나다
행사는 최초의 탈영자 4인 중 한 명인 크레이크 앤더슨 씨가 50년 만에 일본에 방문해서 당시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우리는 28일 행사에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초청을 받아 참석하게 되었다. 베트남전쟁 때 병역거부를 했던 앤더슨의 이야기와 한미일 군사동맹과 북핵문제로 인한 동아시아의 긴장 고조 문제 사이의 연결고리로서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주목했고, 행사를 주관한 여러 주체 중 하나인 아마미야 카린 씨의 제안으로 참석하게 된 것이다. 본행사의 전날인 27일 오후, 매거진9 인터뷰 및 앤더슨 과 간담회를 가질 시간이 있었다. 고맙게도 한국에서 온 병역거부자와의 대담을 앤더슨이 요청했기에 서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이 간담회에서 앤더슨에게 들은 이야기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동아시아의 긴장 상황에 대해 미국 운동단체들과의 국제연대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질문에 대한 인상적인 답변이다. 앤더슨의 답변은 단호했다.
“미국은 베트남전 이후에도 수많은 전쟁을 치러왔지만, 2003년 이후로 유의미한 반전시위는 없었다. 이미 미국은 그런 나라가 되어버렸다.”
앤더슨은 미국에서는 더 이상 반전/평화운동이 유의미하지 못하며, 미국의 운동 단체와의 국제연대로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답변을 내어놓았다. 이런 앤더슨의 답변은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현재 양심적 병역거부과 관련된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는 부분은 현재 징병제도의 대안으로서 무엇을 주장하느냐는 부분이다. 대체복무제를 인정하는 징병제를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아예 모병제 전환을 주장할 것인지에 대해 이견이 존재한다. 평화운동에 관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 자체를 축소하고 폐지해야 한다는 이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떤 과정과 단계들을 밟아나갈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견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특히 모병제로 전환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은 미국이 전쟁에 점점 더 둔감해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우려를 표해왔다. 이 자리에서 앤더슨의 발언을 들었을 때, 그 이전보다 이러한 우려가 훨씬 더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들었다. 내 자신은 아직도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징병제 폐지가 합당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병제 하에서 전쟁의 의미가 과연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더슨의 이러한 답은 앤더슨이 50년 만에 일본에 방문한 이유이기도 했다. 더 이상 미국에서 평화운동을 할 수 없다는 좌절감. 앤더슨 씨는 미국이란 국가의 방향성에 대해서 깊은 분노와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징병제에 대한 앤더슨의 반응 또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징병제에 대해 들은 앤더슨은 일침을 가했다.
“징병을 거부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물론 징병제와 민주주의는 서구 전통에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사회의 출현과 함께 출발했었지만, 출발부터 극한의 모순을 가지고 있는 대립쌍이기도 하다. 사실 동양사회에서 징병제는 민중에 대한 착취의 극한으로 보아야 하고. 어쨌든 엄밀히 평가하면 할수록 평화 없는 민주주의, 군국주의적인 민주주의는 형용모순이다. 이를 헤겔적인 의미에서 부정적으로 지양되어 승화되는 대립쌍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보다 구체적으로, 총체적으로 분석한다면 전쟁과 민주주의는 서로에게 배타적이라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이야기가 새기 전에 앤더슨의 맥락을 다시 반복하자면,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국가는 결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앤더슨은 꽤 신랄하게 한국이란 국가의 한계를 조롱했고, 어이없어 했다. 뒤의 글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한국의 징병제에 대한 당혹감은 앤더슨 씨뿐만 아니라 이번 일본 방문 중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반응이었다. 내 자신이 부당한 징병제에 반대하여 병역을 거부했던 양심적 병역거부자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이기에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는 어떤 감성들의 표출, 그것은 한국의 징병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행된다고 보기에는 믿겨지지 않는 심각한 억압의 제도라는 것이었다.
베헤이렌의 주최로 열린 28일 본 행사에서는 크레이그 앤더슨의 드라마틱한 세부적인 이야기와 베트남전 당시 일본 베헤이렌 활동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다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크레이그 앤더슨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전쟁에 동원되는 개인이 그 거대한 흐름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무지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고나 할까.

크레이그 앤더슨씨와 한국의 병역거부자들. 가운데 콧수염 난 사람이 크레이그 앤더스, 가장 오른쪽 여성은 한국 병역거부자들을 초청한 작가 아마미야 카린 씨.
앤더슨의 탈영과 베헤이렌의 망명지원활동
앤더슨은 버클리 대학 근처, 반전 분위기가 강한 곳 출신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징병제 국가였고, 앤더슨은 전쟁에 직접 참전하고 싶지 않아 해군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앤더슨의 생각과는 달리, 미군은 어느 보직, 어느 집단을 불문하고 베트남전에 파병되었다. 앤더슨은 반전에 대한 생각은 막연하게 가지고 있었지만 베트남에 대해서는 그 무엇도 알지 못하는 스무 살의 청년이었다. 미국은 이 청년들에게 어떠한 정보도 없이, 통킹만 사건 같은 선동적인 정보만을 주입한 채 전쟁터로 떠밀었다. 베트남에 파병된 앤더슨이 목격한 것은 이렇다 할 반격 수단도 없는 베트남을 미군이 무자비하게 폭격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통킹만 사건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지의 상황. 예를 들면, 하루는 네이팜탄을 계속 쏟아 붓고 있었는데 아무런 반격도 날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런 나날이 계속됐다. 앤더슨은 나름대로 명령불복종을 통해 전쟁에 반대해보았지만 지휘관들은 일시적인 일탈로 간주하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중간 기착지였던 일본으로의 귀환 후 앤더슨이 속한 함선이 재차 투입되게 될 때 즈음, 이미 전쟁터에서는 자신이 어떠한 움직임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그는 생각이 비슷한 3인과 함께 일본에서 탈영을 하게 된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군복도 신분증도 버린 상태에서, 돈 한 푼 없이 공원 등지를 며칠간 떠돌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반전운동을 하던 일본의 대학생(켄지 씨)를 통해 베헤이렌과 만나게 된 앤더슨. 몇 달 동안 베헤이렌 지원가들의 집들 전전하면서 시간을 벌었고, 마침내 이들의 도움을 받아 스웨덴으로 망명을 하게 되었다. 망명 직전 4인방은 자신들의 병역거부를 영상으로 찍었고, 이 영상은 망명 이후 베헤이렌을 통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후 한동안 베헤이렌을 통해 망명하는 미군들이 늘어났고, 미국과 일본 정부에선 첩보전을 통해 베헤이렌의 망명지원활동을 어떻게든 봉쇄하려고 애를 썼다.
일본 초청 이전, 한국에서 미리 앤더슨에 대한 자료를 접하면서 살짝 우려했었던 부분이 있었다. 앤더슨을 비롯한 병역거부 망명을 한 4인방은 자신들 스스로를 “애국적 병역거부자”라고 지칭했었다. 나에게는 이러한 주장이 다소 국가주의적으로 들렸고, 이로 인해 이번 행사에서 앤더슨 씨가 어떤 메시지를 주장할지에 대해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 앤더슨 은 이러한 답변을 내놓았다. 우리는 스테레오 타입에 대항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일반적인 인식(그때의 미국이나 지금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으로는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겁쟁이나 배신자라고 생각하는데, 앤더슨은 정부가 틀렸다면 거부해야 할 것을 거부해야 하며 그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정부는 2차대전 중 일본은 물론 나치 독일에 대한 이야기였고, 당연히 탈영자는 일본과 독일에도 있었으며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였다고 앤더슨은 말했다. 우리 모두는 틀린 것에 대해서는 들고 일어나야만 한다, 그래서 자신들을 애국적 병역거부자(탈영자)로 칭했었다는 것이 앤더슨의 이야기였다.
크레이그 앤더슨 이후의 베헤이렌이 펼친 망명지원활동에 대해서도 당시의 베헤이렌 멤버였던 일본 활동가들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크레이그 앤더슨과 다른 3인의 최초 탈영 이후에도 미군에서 병역거부로 탈영을 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미국과 일본 정부 양측이 모두 당황해했고, 거의 007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첩보전이 있었다. 그러나 베헤이렌은 점조직에 가깝게 비밀리에 운영되며 계속해서 망명자들을 만들어냈고, 이로 인해 미국의 전쟁 수행 방침이 일부나마 바뀌게 되었다. 물론 결국 베헤이렌의 활동은 정부 측에서 망명자를 가장한 요원을 잠입시키면서 적발되게 되었고, 베헤이렌의 활동도 직접적인 망명 지원은 멈추게 되었다. 나에게 추가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베트남전 이후의 베헤이렌의 활동 중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원이 있었다는 것.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명활동을 줄곧 맡아왔고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에 대해 한국에서 자세한 내용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것 같다.

1967년 당시 망명에 성공한 인트레피드의 4인. 왼쪽에서 두번째가 크레이그 앤더슨 씨.
전쟁으로 나아갈 것인가, 평화로 나아갈 것인가
어쨌든 크레이그 앤더슨의 우려는, 최근 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일본, 한국 세 나라가 추구하는 안보 방향이 중국과 러시아, 북한이라는 적대국들과 더욱 적대적으로, 상호간의 대화 및 교류를 끊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전쟁 직전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과연 이런 추세대로 흘러갔을 때 우리가 핵전쟁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앤더슨은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나 역시 나치즘 연구자로서 앤더슨과 상당히 유사한 우려를 가지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전쟁이 일어날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1차 세계대전, 히틀러에 의해 전쟁이 일어났고 예방전쟁이 필요했다고까지 말해지는 2차 세계대전 모두 각국의 내실을 면밀히 살펴보면 현재 동북아의 상황과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군비 확산의 치킨게임 + 픽션적 예외 상태에서 현실적 예외 상태로 이행되며 점점 더 강화되는 국가주의 + 각국 간의 대화 단절이라는 명백하게 유사한 배경 아래 발생했으며, 이를 감안하면 앤더슨의 우려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어쨌든 앤더슨은 미국이 아닌, 일본과 한국 각각의 국가에서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 가능성을 찾고자 한 것처럼 보였다. 앤더슨 씨가 50년만에 일본을 방문한 까닭이랄까.
내가 일본에 다녀온 후, 트럼프의 요란한 동아시아 방문이 있었다. 크레이그 앤더슨의 우려는 절반은 들어맞고 절반은 엇나갔다. 그나마 긍정적이었던 엇나감을 말하자면, 도널드 트럼프는 다행히 중국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각국, 각 진영 사이의 대화가 단절되어 간다는 앤더슨의 우려는 다행히 “지금”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한미일 동맹 역시, 문재인의 발언을 통해 더 강화되진 않는 것으로 표면적인 이야기가 마무리되면서 긴장의 끈이 다소 느슨해진 점은 어쨌든 긍정적인 요인으로 볼만하다. 그러나 동시에 대놓고 무기 팔러 왔다는 트럼프와 무기 사겠다는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앤더슨의 우려와 그 궤를 함께 한다.
평화운동을 서포트 하는 입장에서 항상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말은 앤더슨의 주장과 전혀 다르지 않다. 당신들은 정말로 평화를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믿느냐고. 어떤 사람들은 인류의 수천 년 역사를 들먹이며 힘없는 국가는 평화도 지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그 사람들 말이 전적으로 틀리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사실들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힘만으로는 절대 평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국제 연대에 의해 전쟁이 중단될 수 있다는 사실 아닐까? 과연 무기를 더 사들이고 더 큰 군대를 유지한다고 해서 평화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일본의 군사화, 미군 기지의 병참기지 역할이 대체 어떤 평화를 가져왔는지 의문이다. 그 반대로 크레이그 앤더슨과 베헤이렌 사람들의 활동이야말로 평화를 가져오고 전쟁을 멈추는데 이바지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