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평화바람/ 강정지킴이)
요즘 가장 핫한 다큐는 누가 뭐래도 <공동정범>이다. 하루가 멀다하게 이 다큐에 대해 말하는 글들이 눈에 띈다. 제주에선 개봉 당일 제주시의 한 극장에 걸렸다가 금세 내려가 버려서 서운하던 차에 김일란 감독과 용산 유가족 정영신, 용산참사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위원회 사무국장 이원호가 서귀포 상영회에 찾아온다는 소식에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를 기다렸다. 연분홍치마에서 <두 개의 문>에 이어 용산참사에 대한 두 번째 다큐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수년 전 이었는데, 여러 해 개봉소식이 없어 무척 궁금하던 차였다.

서귀포에 상영회에 참석한 용산 유가족 정영신, 문정현 신부, 김일란 감독, 이원호 활동가.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2009년 1월 20일의 기억을 불러냈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을 그곳에서 살아남은 다섯 명의 철거민을 통해 하나하나 되짚어 간다. 예상치 못한 긴급하고 강경한 진압, 준비되지 못한 마음에 닥친 결사투쟁, 그리고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참혹한 결과… 이 모든 상황에 놓인 다섯 주인공은 한풀이로, 질문으로, 힘들게 기억을 되새기며 용산참사 그날을 되짚는다. 단 하루의 일이 그들의 인생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그것은 무엇에서 시작되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전히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날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 이라는 것을 절절히 느끼게 한다.
시간을 기록 한다는 것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란 것은 다섯 주인공이 카메라 안에 들어와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는 바로 그 점이었다. 아마 이 영화의 제작기간이 엄청나게 길었던 것은 이들을 카메라 앞에 앉을 수 있도록 이끌어야 했던 그 시간의 장벽 때문이었을 것이다. 긴 시간의 터널을 견딘 감독들이 참사의 공동정범으로 지목되어 수감됐지만 실재로는 국가폭력의 피해자인 다섯 주인공 옆에 있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들은 카메라를 매개로 서로 질문을 주고받고 기억의 파편화된 순간을 다시 생각한다. 용산참사라는 시간과 공간을 함께 통과해온 사람들 사이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 여정은 기록자가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많은 투쟁의 현장에 많은 카메라들이 오지만, 그들은 어떤 시기가 지나면 흩어진다. 격렬한 한 시기의 기록과 진실은 넘쳐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경우 투쟁의 현장은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도 현재 진행형이다. 폭탄처럼 삶을 뒤흔든 사건은 지나간 듯하고, 이제 끝난 것 아니냐고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사건이 시작된 그 하루의 여파 속에서 삶이 깨어진 채 살아가고, 많은 경우 깨어진 그 하루의 일상은 그들의 전 인생에 영향을 준다. <공동정범>은 신뢰를 쌓은 카메라가 기록을 통해 그 깨어진 하루가 어떻게 삶에 영향을 주는지 성실하게 쫓는다. 단지 하루의 사건, 사고가 아니라 그 사건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감독들이 카메라와 주인공들 사이에서 쌓은 시간, 그 신뢰의 시간이야 말로 이 영화를 구성하는 빛나는 장면이다.

<공동정범> 촬영현장. 주인공들은 카메라 앞에서 그동안 숨겨둔 마음을 꺼내놓는다. 카메라와 주인공들 사이에 쌓인 신뢰가 없었다면 이 빛나는 영화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 앞에 머무는 불편한 느낌
참사 뒤, 공동정범으로 기소된 구속자 다섯 명은 사회와 철저히 고립된 채 참사의 화마 속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출소한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더 큰 감옥. 가슴 속에 피어난 화를 어떻게 하지 못해 술에 의지하기도 하고, 원망하고, 기도한다. 어떻게 해봐도 벗어날 수 없는 그날의 기억은 손바닥에 그어진 깊은 자상처럼 공동의 상처로 남아 마음과 몸에 그대로 각인되어 매일매일 그날의 기억을 되살린다.
이들은 용산참사로 인해 삶의 많은 것이 파괴 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각자의 삶터가 재개발로 인해 파괴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이미 삶의 한 부분이 깨어져나간 상황에서도 이심전심 연대하려던 마음은 이들을 참사의 공동정범으로 만들어 버렸다. 강정에서는 외지인, 육지것이라는 굴레를 씌워 서로를 분열케 했다면 용산에선 연대에 죄를 묻고 이 참사의 책임을 공동정범이라는 굴레로 철거민들에게 돌림으로서 분열시킨다. 응당 책임을 져야 할 국가는 사라지고 국가폭력의 희생자들끼리 누가 더 책임자인지를 가리게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세상이 기대하는 투쟁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헌신적이고, 용감하고, 순수하고, 이기적이지 않고,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갈등하고 또 갈등하는 개인들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내몰려 공동의 목적을 갖고 싸우게 되었을 때, 갈등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각자가 살아온 것이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고, 기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쟁의 현장에서는 이 갈등을 드러내고 서로 이야기하기보다 감추거나 모른척한다. 당면해서 싸워야할 것은 국가 권력이기에 우리는 단결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결해야한다는 당위적 이유보다도 더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시간과 삶의 결정권을 박탈당함으로서 겪어야하는 조바심이다. 서로 충분히 이야기를 하거나 토론을 할 시간도 없이 그 무언가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사정없이 밀어붙여진다. 무언가 빨리 실행해야 한다는 조바심 속에 모두가 만족할 만한 입장을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많은 경우 투쟁은 권력자들, 지배자들이 임의로 결정해 버리는 것이 원인이 되어 출발한다. 갈등의 당사자가 단지 개인들만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라는 거대 구조가 함께 한다. 그래서인지 투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푸는 것은 국가 권력에 맞서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 갈등을 겪는 당사자 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빼앗긴 시간과 삶에 대한 결정권을 다시 찾아오는 것, 또 다른 당사자인 국가를 성찰의 장에서 만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영화 속 철거민들이 내뱉는 서로를 향하는 그 날카로운 말들이 아프게 다가왔다. 나 역시 해군기지가 쭉쭉 지어질 때, 허공에 울리는 구호가 공허할 때, 사람들이 잊고 있을 때, 몸 속에서 올라오는 분노와 이름 없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찼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임자에게 가지 못하는 말들이 가까운 이들에게 가 꽂혔던 그 잔인한 시간. 그 시간이 아팠다고 영화는 말했고 나는 내가 하지 못했던 말을 영화가 대신 해 준 것 같아 아프지만 시원했다. 썩어 무너지기 전에 조금은 닦아낸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한편에선 공동정범이 드러낸 철거민 사이의 갈등을 두고 불편하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불편은 고통 위에 있지 않다. 실재하는 고통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사람들 앞에 나와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듣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불편함은 잠시 스쳐가는 감정일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은 실재한다. 피한다고 해서 그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내가 모른다고 해서 그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공동정범>의 한 장면. 영화는 ‘사건’ 이후에 남은 삶-고통과 갈등을 기록하고 보여준다.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투쟁이 아니라…
강정 해군기지가 완공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투쟁에 대한 실패, 좌절이 마음 속 깊이 상처를 내고 있었다. 종종 마을을 찾은 사람들은 휙 하고 둘러보고선 이제 다 끝났다고 했고, 더 할 일이 있느냐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안의 좌절을 숨기고 밝고, 희망차고, 힘차게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 함께 고민할 것들을 말하곤 했다. 투쟁하는 사람들은 그래야 했다. 밝고, 힘차게 희망을 증명하고 연대를 호소해야만 했다. 제발 함께 하자고, 기억해 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걸어 올 때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딛고 걷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아마 용산참사와 세월호 가족들은 내가 했던 것과 정반대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참사의 희생자로서 밝게 웃고, 춤추고, 편안하게 앉아 있는 것조차 어렵진 않았을까. 영화에서 곱게 화장한 채 이상림 열사 옆에 선 전재숙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낯설고 슬펐다. 9년 가까이 전재숙 어머니를 만나며 그렇게 곱게 차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투쟁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의 감옥, 참사의 유가족에 대한 시선의 감옥. 그 굴레는 합당한가.
투쟁의 과정에서 역동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로 정형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정하다. 사회적 압박이 높은 상황이기에 더 극단적이기도 하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투쟁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사람, 가족을 잃은 가엾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그저 그런 한 사람일 뿐이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그 모든 감정과 표현을 갖는 사람들. 사회적 굴레에 갇혀 웃지도 울지도 못한다면, 그 숭고한 투쟁은 무엇을 향해 가는 것인지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우회할 수 없는 진실
영화는 갈등을 다룸으로서 타인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지 묻고 있다. 그리고 이 타인들이 함께 하는 투쟁의 장에서 우리라고 말하지만 그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지, 또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서로 다름이 나타날 때, 긴장되고, 갈등하지만 그것을 직면해 성찰과 성장의 힘으로 전환하는 것은 또 어떻게 가능할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계속된다. 이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서귀포 상영회에 참여한 정영신은 이렇게 말한다.
“이 영화를 이렇게 만든 이유는 용산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우리의 투쟁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싸우기 위해서는 서로의 마음을 알고,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감독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감독들을 믿지 못했다면, 이 영화를 못 만들었을 것입니다. 공동정범은 주인공들과 감독들이 서로를 신뢰하면서 만든 작품이라는 것을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선언이 아니라 실재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마주하는 것임을 정영신의 떨리던 마지막 말을 통해 알게 됐다. 그녀가 유가족으로서, 수감자의 아내로서, 진상규명을 하는 활동가로서 겪은 시간 속에 아픔을 드러내는 선택을 감행했다는 것. 그 용기에 함께 하고 싶다. 내가 잊고 있던 순간에도 이 참사를 직면하며 끝까지 함께 하고 있는 이원호, 박래군과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가들의 헌신과 아픔을 더듬어 본다. 아픔을 드러낼 용기를 낸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처럼, 나 역시 중간 중간 끝없이 상기되던 불타는 망루를 기억한다. 내가 피하고 싶었던 그 장면, 그 파괴를 상기한다.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은 우회할 수는 없는 일이란 걸 공동정범은 말한다.

영화 <공동정범>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