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공(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팀)
전쟁없는세상 주:
오는 4월 21일~4월 22일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립니다. 전쟁없는세상 또한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평화시민법정을 맞이해서 전쟁없는세상의 위치에서 바라본 베트남전쟁에 대한 글을 모두 4편 연재하려고 합니다. 두 번째 글에서는 베트남전쟁 당시 병역거부를 살펴봅니다. 무하마드 알리를 비롯한 미국인들의 병역거부, 미군의 병역거부를 도왔던 일본의 평화운동,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국인 병역거부자까지 소개합니다.
이번 주말인 4월 21, 22일에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린다.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은 베트남의 민간인을 학살한 ‘가해국’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 문제는 전면적으로 다뤄지지 못했다. 물론 우리는 가해-피해 구도 자체에 대해 더 깊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 3월 3일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는 <‘가해국’ 국민으로 살기>라는 강연에서 가해자-피해자 구도로만 고착되었을 때의 난점을 지적한다. “‘가해자-피해자’라는 대치 구도로 접근할 경우 ‘주체’가 ‘구조’로 환원되면서 쌍방간에 실질적 변화 가능성은 실종되고 만다”는 것이다.(<한겨레>, 2018.3.5.) 물론 이것은 가해 사실이 분명히 밝혀지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과 병행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시민평화법정’이 긴 준비 끝에 열리게 되었다. ‘시민평화법정’에서는 다른 민간인 학살 자료들이 나와 법정에서 논의될 것이다. 우리는 이 논의 속에서, 우리가 원하진 않았지만, ‘가해국 국민’으로서 어떤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할지 깊게 고민하게 될 것이다.
베트남전쟁 시기 당시에 베트남전쟁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병역거부를 한 이들이 있었다. 병역거부는 입대거부, 탈영, 밀항, 조기 제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며 매우 복잡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 글은 이 복잡한 방식의 병역거부가 베트남전쟁 시기에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세 번째 선택이 있다.” : 베트남전쟁 시기 미국 내 병역거부
베트남전쟁 시기 미국 내에서 병역거부를 한 이들은 많다. 미국은 1964년 베트남전쟁에 적극 개입한다. 그리고 “1967년 6월 30일 미국의회는 베트남전쟁을 치르기 위해 징병제도를 부활시켰다.”(하승우, 2008) 당시 유명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1942~2016)는 1966년 징집 통보를 받은 후 1967년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며 병역거부를 한다.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그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전쟁에 반대한 것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그에게서 헤비급 타이틀을 박탈하고 여권을 빼앗아 갔지만 이후 미국 대법원은 알리의 ‘정의’가 옳았다고 판결했다.
“내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들 합니다. 감옥에 가거나 군대에 가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거죠. 하지만 저는 세 번째 선택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것은 바로 정의입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원작자로 유명한 조지 R. R. 마틴(1948~ )도 병역거부자이다. 1971년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마틴은 베트남전쟁에 반대하여 병역거부를 지역 징병국에 ‘신청’한다. 당시 미국은 ‘전쟁 중’이었음에도 대체복무제도가 있어 ‘선언’이 아닌 ‘신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틴은 시카고에 위치한 빈민 지구 자원활동 기관인 VISTA에서 2년간 대체복무를 한다.(마틴, 2017) 이렇게 베트남전쟁 때 미국에서 병역거부를 한 이들은 57만 명이었다.(권혁태, 2014a) 이 둘 외에도 베트남전쟁이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병역거부자로서 제대를 요청한 군인 질레트와 네그레를 포함하여 미군 내 병역거부자들도 많았다.(하승우, 2008)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점차 폐색이 짙어지면서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군인들의 ‘조기 제대’를 지원하는 활동이 미국 내에서 활발해지기도 한다. ‘조기 제대’는 입대 자체를 거부하거나 입대 후 탈영과는 또 다른 방식의 병역거부이기도 했다.

인기 미국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원작을 쓴 작가 조지 R.R. 마틴도 베트남전쟁 당시 병역거부를 했다. 당시 미국 내 병역거부는 그만큼 대중적인 반전운동이었다.
“아시아의 가해자, 베트남전의 가해자” : 베트남전쟁 시기 일본 내 병역거부
미국 내 베트남전쟁 반대 행동과 함께 호흡한 활동이 당시 일본에서도 있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요 국가 중 하나이면서 원자폭탄을 맞은 피해자 국가이기도 하다. 원자폭탄의 피해, 미일 안보조약의 피해 등이 강조되는 흐름이 일본 시민사회에도 있었다. 하지만 시민 반전그룹인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평련, 베헤이렌)은 ‘아시아의 가해자, 베트남전의 가해자’로서의 일본의 책임을 분명히 하며 반전평화 활동을 펼친다. 베헤이렌을 모태로 한 <자테크(JATEC, 반전 탈주 미군병사 원조 일본기술위원회)>의 주요 활동은 일본에 정착하고 있던 미군 항공모함의 병사나 일본으로 휴가를 온 미군 병사의 탈영 후 망명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즉, 탈영-망명 등으로 이어지는 병역거부 활동을 지원한 것이다. 탈영한 병사들을 개인 집에 숨겨주고, 여권을 위조하며 망명 루트를 마련하고 밀항을 감행할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탈영 군인이 잠시나마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등 위험을 감수한 일들을 진행한다. 어떻게 그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미군을 가해자만이 아니라 미국 안의 서민으로서 전쟁터에 설 수밖에 없는 피해자로 보았다. 군대는 베트남 사람뿐 아니라 모든 군인 한명한명에게도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자테크> 활동가 세키야 시게루)(<한겨레>, 2014.9.30.)
“인간으로서 종군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이가 나타났다, 가능한 한 지원하자, 그게 다예요.”(베헤이렌 사무국장 요시카와 유이치)(<베트남전쟁, 다양한 경계 넘기>, 2014)
<베헤이렌>, <자테크> 활동가들은 국가 안의 구체적인 개인의 상황에 주목하고 그 개인의 신념에 따른 행동을 적극 지원한 것이다. <자테크> 또한 미국 내 활동가들과 연대하며 ‘조기 제대’ 지원활동을 한다. 이들은 이 활동이 궁극적으로 ‘미군 해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71년 미군 탈영병이 미군 총병력의 3.4%에 달하는 33,094명이었다고 하니, 그들의 활동 방식은 사회적으로도 작지 않은 파장 속에 위치하고 있었다.(권혁태, 2014a, 324쪽)
“탈영이라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 탈영병 김진수, 9개 국가를 가로 지르다. 1)
<자테크>의 도움을 받아 미군을 탈영하여 유럽으로 망명한 병사 중에는 김진수(1947~ )도 있었다. 그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다. 한국 국적으로 미국에 입양되어 미군에 입대한 후 베트남 미군 부대에 배속된다. 그리고 휴가지인 일본 도쿄의 미군 기지에 있다 탈영하여 쿠바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한다. 그리고 중국, 소련을 거쳐서 스웨덴으로 망명한다. 이렇게 김진수가 체재한 나라는 7개국이 되며, 물밑 접속한 국가인 북한과 쿠바까지 포함하면 9개국이 된다. 그의 탈영은 몇몇 국가들과는 복잡하게 엮인 국제 외교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행적과 그의 탈영을 돕거나 함께 탈영한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김진수는 내면적으로도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들과 좀처럼 대화하지 않고 세상을 냉소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탈영-망명을 끝까지 진행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1968년 1월 11일 동아일보에 실린 김진수에 대한 단신 기사.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김진수. 그는 왜 탈영-병역거부를 결심했을까. 김진수는 자신이 작성한 2개의 문건을 남긴다. ‘미국, 일본 그리고 세계의 인민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베헤이렌의 오다 마코토(≪전쟁인가 평화인가≫ 저자)에게 보낸 편지이다. 내외부적 복잡한 상황 속에서 그가 쓴 글을 읽으며 우리는 탈영-병역거부 이유를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라도 추측할 수 있다.
“나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행하고 있는 현재의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게다는 나는 오늘날의 한반도의 비극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어, 확실한 변혁의 가능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래서 현재의 한반도 사람들에게 재통일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뭔가를 해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탈영이라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베트남’을 ‘이라크’로, ‘탈영’을 ‘병역거부’로 바꾼다면 지금 21세기를 사는 병역거부자의 병역거부 이유서의 한 대목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문장이고, 마음이다.
한국에도 베트남전쟁 시기 병역거부자가 있었나? 2)
미국과 일본의 병역거부자 사례를 읽다보면 하게 되는 생각이 있다. ‘한국에도 베트남전쟁 파병 거부자가 있었나?’, ‘있었다면, 그들도 탈영하고 망명했을까?’ 등등. 여기 ‘끝’을 알 수 없는 2명의 베트남전쟁에 반대한 병역거부자가 있다.
1942년 일본에서 태어난 김이석은 해방 후 부모님을 따라 제주도에 귀향했다가 7세 때 제주4.3을 경험하고 9세 때 한국전쟁의 참상을 목격한다. 김이석은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했음에도 군입대가 국민의 의무라는 생각에 입대한다. 하지만 베트남전쟁 파병 병사로 차출되자 탈영과 일본 밀항을 결심한다. 그는 왜 이런 결심을 했을까? 감리교 신자이기도 했던 김이석은 이렇게 말했다.
“신앙으로 보아도 양심으로 보아도 베트남까지 가서 전쟁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렇게 1964년에 일본으로 밀항한 김이석은 결혼하여 가족과 함께 살다 밀입국한지 8년만인 1972년에 일본 정부에 발각된다. 발각 후 그의 가족들은 강제퇴거명령을 받는다. 재판을 받긴 하지만 결국 그는 일본 정부의 강경한 태도 속에서 1981년 즈음(추정)에 한국으로 강제송환된다. 박정희이든 전두환이든 군사독재 시기에 한국에 온 김이석은 탈영자이니 처벌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한국에서의 삶이 알려진 바는 없다.

1964년 베트남 1차 파병 당시 파병 군인들을 환송하는 부산 시민들. 베트남전쟁 당시 반전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났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대중적인 반전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전쟁을 거부하고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출처: 정부기록사진집
1935년 제주도 애월면 곽지리에서 태어난 김동희는 부산의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가난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학업을 마치지 못한다. 그래서 일본 밀항을 결심한다. 일본에는 3명의 형이 살고 있었다. 1953년 4월 일본 시모노세키로 밀항한 그는 이후 도쿄의 형 집에 살면서 1956년 민단계가 만든 한국학원에 입학한다. 하지만 외국인 등록증 없는 밀항자 신분인 그는 일본 정부에 발각되지 않을까 긴장하며 불안한 삶을 살았다. 불행히도 그는 1959년 불심검문으로 발각되어 1960년 4월 1일 한국으로 강제송환되고야 만다. 그는 7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다음처럼 말한다.
“조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이 개인의 생명을 이렇게 진흙투성이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진흙투성이가 된 생명’. 한국전쟁 후 분단으로 인해 ‘조선인’으로 계속 살 수 없었던 일본 자이니치-디아스포라의 삶이 저러했을까. 김동희는 “밀항선 바닥에 숨었고, 상륙해서도 숨었고 살면서도 숨었”던 일본에서의 삶을 떠올리며 “슬픔보다는 분노가 밀려왔다.”고 했다. 한국에 도착한 김동희는 군입대를 해야 했지만 기피하고 두 번째 밀항을 감행한다. 그는 두 번째 밀항의 이유로 제주4.3 당시 목격한 한국군의 학살의 잔혹함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1962년 밀항선에서 일본 측에 체포된다. 일본에서 재판을 받고 강제송환된 그는 4개월간 수감된다. 출소 이후 1963년에 한국군에 입대한다. 1953년 처음 일본에 밀항하고 10년이 지난 후에 그는 군대에 강제 입대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저항’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제대 6개월을 앞두고 그에게 베트남 파병 명령이 떨어진다. 그는 이를 거부하고자 1965년에 탈영하고, 1967년에 일본 밀항을 또다시 감행하지만 결국 잡혀 형무소에 수용된다. 왜 그는 일본 밀항을 계속 시도했던 걸까. 그는 일본 재판소에 제출한 ‘망명원(망명신청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일본국 헌법 전문 및 제9조의 전쟁 포기를 규정한 평화주의를 관철하려 노력하는 일본국에 망명한 것입니다.”
베트남전쟁 파병을 거부하며 평화주의로 인해 일본에 망명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망명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는 1967년에 악명 높은 오무라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세 번째 한국 강제송환이 앞에 놓여 있었고, 한국에서는 수감이 예상되었다. 그에게는 선택이 필요했지만 선택의 폭은 매우 좁았다. 그는 결국 소련을 경유해 1969년 북한으로 망명한다. 그 후 그의 삶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김이석과 김동희의 삶은 읽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다. 탈영, 밀항, 망명 등으로 엮이는 그들의 삶의 험난함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삶의 ‘끝’을 알지 못하기에 더 안타깝기도 하다.
‘빗금(/)’ 만들기
베트남전쟁 시기 미국, 일본, 한국에서의 병역거부 사례를 살펴봤다. 여기서 살펴본 이들의 삶은 병역거부로 환원되지 않는다. 삶은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다만, 삶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빗금(/)’을 타고 흐른다. 누군가는 비전의 이유로, 또 누군가는 평화주의라는 이름으로, 경계에 서서 빗금을 그린다. 이렇게 각자 다른 빗금을 만들고, 다른 삶을 살고자 한 이들이었지만 공통적으로 병역거부를 선택했다. 상황이 다르고, 조건이 다르지만 지금도 병역거부자는 계속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빗금’을 그리고 있다. 이들의 빗금은 베트남전쟁 시기 병역거부자의 빗금과는 다르기도 하지만 이어지기도 한다. 이 빗금을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가. 계속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각주
- 이 절은 권혁태, ‘유럽으로 망명한 미군 탈영병 김진수’, ≪황해문화≫ 83, 새얼문화재단, 2014의 일부 내용을 요약하였다.
- 이 절은 권혁태, ‘베트남 파병을 ‘거부’한 두 한국군 병사 김이석과 김동희’, ≪황해문화≫ 84, 새얼문화재단, 2014의 내용을 일부 요약한 것이다.
참고문헌
<2014 베트남 파병 50주년 행사: 베트남전쟁, 다양한 경계 넘기-전쟁 거부를 가능케 한 사람들>, 2014. 9. 25.(미출간 자료집)
하승우,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 뜨인돌, 2008.
권혁태, ‘유럽으로 망명한 미군 탈영병 김진수’, ≪황해문화≫ 83, 새얼문화재단, 2014a.
권혁태, ‘베트남 파병을 ‘거부’한 두 한국군 병사 김이석과 김동희’, ≪황해문화≫ 84, 새얼문화재단, 2014b.
조지 R. R. 마틴, ≪조지 R. R. 마틴 걸작선 꿈의 노래 1≫, 김상훈 옮김, 은행나무, 2017.
“무하마드 알리,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양심적 병역거부자’”, (사)국제앰네스티한국지부, 2016.06.15.
“전쟁에 맞선 겁쟁이들 2화: 무하마드 알리, 그도 병역거부자였다”, 이용석.임재성.최정민, 2016.10.07.
“점령자 미군도 한 인간, 베트남전 피해자로 봤다”, <한겨레>, 2014.09.30.
“전쟁학살 책임, ‘자기부정’ 아닌 ‘피해자와의 연대’에서 출발해야”, <한겨레>, 201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