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중고등학생 시절에, 매년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쓰라고 하면 1지망을 쓰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내 또래 청소년 누구나 꿈꾸는 미래와 장래희망을 가지고 있고, 이를 이루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다. 청소년이란 곧 꿈을 꾸는 존재였다. 꿈의 실현을 억압하는 건 모두 나쁜 것이었다. 하지만 전제 자체가 맞지 않을 수 있음을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었다. 왜 아이, 청소년, 학생들은 꿈을 꿔야 할까? 왜 이 시기는 가능성과 잠재력이 풍부해야 할까? 왜 이 시기의 직업 선택과 포부, 진로 발달이 중요해지게 된 걸까? 애초에 ‘모든’ 청소년들은 성인이 되어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살아 갈까? 그 열망은 개인의 의지에 달린 문제인가?

조은주의《세계에 속한다는 것》은 청소년들이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어른이 되는지를 탐색한다. 저자에 따르면, 학교에서 시험과 경쟁보다 ‘꿈과 끼’를 강조하는 것은 2010년 전후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주입식 교육’의 대안으로 ‘자기주도학습’이 강조된 것처럼, 꿈을 강조하는 것도 청소년이 ‘자기 삶의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흐름이었을 것이다. 내가 내 삶을 설계하는 것, 내 안의 무한한 가능성을 펼치고 미래의 직업이나 삶을 ‘성취’하는 것은 당연히 학교가 장려하고 지원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꿈을 꾸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일, 미래의 성취를 기대하며 주어진 시간을 자원으로 활용하고 투자하며 계획할 수 있다는 관념 혹은 실천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여러 해에 걸쳐 많은 아이들을 만나서 꿈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중 적지 않은 아이들에게서 어떤 유사성을 느꼈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나도록 그 유사성을 적절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한참 후에 내가 깨달은 것은 이들의 꿈에 공통적으로 서사의 차원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 꿈이 무엇이든 그 꿈을 갖게 된 계기에 있어 아무 서사가 존재하지 않았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다는 서사도 없었다. (48쪽)

어떤 꿈을 가지느냐도 청소년의 계급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연구가 있다. 비교적 유리한 계층의 청소년은 전문직의 위세 높은 직업을 지향하는 반면, 불리한 계층의 청소년은 비교적 불안정하고 위세가 높지 않은 직업을 희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는 학계에서 흔히 ‘위대한 평등자’라고 불렸다. 사람들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보다 다니는 게 훨씬 더 사회의 평등화를 촉진한다는 말이다. 통계적인 증거도 존재하지만, 이러한 연구들은 구체적인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잘 보지 못한다. 무언가를 진지하게 열망하고 노력한다는 것은 계급화된 현상이다. 대학 입시 문제가 학교를 휩쓸어도, 대부분의 청소년에게 1, 2등을 다투는 경쟁과 수도권의 좋은 대학을 나오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등생들의 치열함과 문제아들의 심각한 ‘일탈’로 시끌시끌 할 때, 저자는 ‘평범한’ 학교의 다양한 학생들의 일상이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눈을 돌린다. 지금의 교육과 사회의 위기는 청소년들이 학교 안에서 “자리 없는 자”(194)라는 데서, 그리고 학교 바깥에서도 자신의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예감에서 비롯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

사람이 꿈을 가진다는 것의 중요한 의미는 꿈을 가짐으로써 그가 어떤 세계에 속하게 된다는 데 있다. 자신이 속한 세계 안에서 그는 자신의 자리를 얻고자 한다. (66쪽)

어느새부터인가 30대가 되면서, 동시에 여전히 학생인 나를 보면서 늘 성인이라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곤 한다. 주변 또래 친구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고, 집을 사서 독립하거나, 혹은 큰 회사에 들어가 승진하는 것들을 보면서 나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친구들은 인생의 각 단계마다 정해진 ‘시한’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졸업, 취직, 연애, 결혼… 동시에 대부분의 친구들은 거기서 이미 탈락했거나 탈락할 위기에 있었다. 그래서 지금 늦는 것이 나중에 큰 문제가 되진 않을지, 가능성을 영영 놓치진 않을지 불안해 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못한 친구들은 하루라도 빨리 연애라도 해봐야 한다면서 조급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여전히 많은 것들이 ‘준비 중’이었다. 새삼스럽게 생애주기의 강력함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의 부모 세대, 혹은 그보다 더 이전 세대의 사람들은 언제부터 자신이 어린이가 아닌 성인/어른이라고 느꼈는지 궁금했다.

한국은 너무 큰 굴곡들이 많았기 때문에 딱 잘라서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저자는 옛날에는 그런대로 정해진 삶의 방향이 있었다고 말한다. 좋든 싫든 우리가 분투하며 성취해야 할 것이 존재했다. 모든 사람들이 성공하고 번듯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어도 ‘이 정도면 괜찮게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 구조가 변화하면서 ‘표준적인 삶’을 가능하게 만든 조건들도 함께 변화했다. 어떤 측면에서 ‘해방’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 해방이 모든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경험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세대의 많은 청소년들은 무엇이 괜찮은 삶, 좋은 삶인지 알 수 없게 된 상황에 놓여 있다. 기존의 경로에 발 맞추어 사는 것은 불가능해졌지만, 지금 이렇게 ‘표준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게 괜찮은지에 대해서는 얘기하기 어렵다. 그러니 더더욱 ‘시한’을 맞추지 못하면 실패로만 각인되는 것이다.

오늘날 젊은 세대의 성인기는 단지 지연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시장과 고용체계, 가족관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성인기의 의미를 과거와 현저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버리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성인기 이행의 의미와 양상은 성인기로의 이행 과정이 아니라 성인기의 삶 자체의 변화로 인해 전면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265쪽)

더 이상 성인이 된다는 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학업 성취나 취직하여 돈을 버는 것의 문제도 아니다. 저자는 단순히 청소년과 청년의 삶이 힘들며 이들이 생애주기에 맞추어 살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미 성취해야 할 ‘성인기’의 삶이 있어서 그것이 지연되는 문제가 아닌, ‘성인기’의 삶 자체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성인의 삶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내던져지는 것’과 같았다.

 

헌신의 조건

취직을 넘어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은 우리를 어떤 세계에 속하게 만든다. 다양한 커뮤니티, 집단, 단체, 조직에서,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역량을 배우고 무언가 역할을 하게 된다. 속한다는 것은 취직해서 돈을 버는 차원을 넘어 어떤 사건과 언어를 공유하는 것이다. 조직 내에서의 분투, 갈등, 혹은 지지와 연대, 그리고 역할과 책임 속에서 공유된 사건과 언어를 얻는다. 이것은 내가 어딘가에 속하겠다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끌림과 끌어당김 속에서 이루어진다.

요즘 청년들은 일에 책임감이 없다, 힘든 일은 기피하면서 권리만 찾으려고 한다는 ‘어른’들의 불평이 놓치고 있는 지점도 이 부분이다. 분명 사람들은 의무, 희생, 헌신, 책임에 대해서 더 냉소적이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열정페이’라는 말이 한때 자주 쓰였던 것처럼 열정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내 삶에 헌신한다는 감각보다는 착취로서 경험된다. 헌신은 우리가 소속감을 찾는 방식이 아니라 말 잘 듣는 무급 노동일 뿐이다. 이전처럼 가족에, 직장에, 사회에 헌신해야 한다는 말들은 그저 당위에 그칠 뿐이다.

예전에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를 읽으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경험을 했다. 공산주의에 크게 로맨스를 느끼진 않지만, 그보다는 공산주의든 뭐든 자신에게 이름을 부여해줄 조직, 함께 일궈나가야 할 세계가 존재했었다는 게, 그리고 지금은 그게 없다는 게 어딘가 서글펐다. 헌신할 세계가 있다는 게 삶 그 자체였다. 그것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세계가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사회가 사람들에게 소속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소속감의 빈 자리를 때로는 보수적인 종교와 극우 세력이 점하기도 한다. 어떤 남성들에게는 군대가 가장 강렬한, 혹은 유일한 소속감의 원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늘 혐오와 폭력은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비집고 들어온다.

사실 이 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이 어려웠다. 저자가 언급하듯 처음에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함께 쓰려고 했지만 나중에 모두 제외했다고 한다. 이 책이 ‘이야기’로 읽히기를 바랐다면서. 세상은 복잡해지고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걸 이야기로 묶을 수 있는 ‘서사적 운동’은 약해지고 있다. 이야기를 가진다는 것은 내가 나의 꿈과 미래,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선택들에 대해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나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고, ‘나’를 넘어서는 무언가에 헌신하고 참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교육과 사회의 위기가 계속 제기되는 지금에, 저자의 물음은 명확한 해결책을 주진 않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혐오와 냉소만이 늘어가는 와중에, 그것을 평화와 헌신의 언어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세계의 신참자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렇게 자라고 있다. 이 시대에, 우리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 그 세계 안에 자신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계의 신참자들을 위한 자리가 과연 이 세계에는 어떤 형태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이 세계의 신참자들은, 자신들이 어디에도 속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보고 익히고 배우며 자라나고 있다. 이것은 불평등에 대한 그 무수한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충분하게 다루어지지 못한 사실이다.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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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속한다는 것>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