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소연(연극창작자)
알 수 없고 될 수 없는 타인의 고통에 연루되기 위하여
“배고픔은 몸을 집어삼키기 훨씬 전부터 언어의 뼈대를 풀어헤치고, 명료함을 지워버리고, 리듬을 해체하고, 생각의 허약한 찌꺼기들만 남겨놓는다. 처음에 일관성 있는 문단으로 시작했던 것은 곧 조각조각 흩어지고, 결국에는 너무나 굶어서 의미를 계속 붙잡아두지 못하는 정신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리는 현상만 남을 뿐이다. 그렇기에, 내 언어가 나를 완전히 저버리기 전에, 나는 이 글을 쓴다. 이해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흔적이라도 남겨두기 위해. 생각이 스르르 녹아내려 침묵이 되어버리기 전에 그 형태를 남겨두기 위해.”(17쪽)
하나의 글을 읽는 데 몇 겹의 인식 과정과 얼마만큼의 상상력이 필요할까. 위 인용문은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 중 첫 에세이 <굶주림의 울부짖음 아래>의 첫 문단이다. 열두 편의 에세이와 열네 편의 시로 이루어진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종종, 내가 텍스트를 읽고는 있으나 그 너머에 있는 현실을 실제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인식해내기 위해 나는, 이 책의 몇몇 에세이들에서 텍스트 위에 꽤나 오래 머물렀다. 한국어로 인쇄된 활자 표면 뒤에 겹겹이 가려져 있는 무언가를 오래 바라보면 읽어낼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한국어로 번역된 영어 원문, 그 뒤에 영어로 글을 쓰는 팔레스타인 작가 머릿속의 모국어, 그 뒤에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경험들과 장면들… 그런 식으로 말이다.
거기에 있을 것들을 다 담는 것이 불가능할 말들로 단순화한다면 아마도 폭격, 죽음, 굶주림. 그런 단어들이 될 것이다. 그마저도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가자 출신인 이 책의 저자 알라 알카이시는, 아무리 열려 있는 사람이라도 당사자의 슬픔을 정말로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굶주림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거리를 두고 서술될 수 없다. 그것을 알려면 그것을 살아내봐야 한다.” 그렇기에, 1980년대 서울에서 나고 자라 전쟁을 겪어본 적 없는 내가, 아니 정확하게는 ‘가자를 겪어본 적 없는 내가’ 이 텍스트 속에서 헤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작가이자 번역가인 알라 알카이시 © Dirk Skiba
작가이자 번역가인 알라는 가자에서 망명하여 지금은 더블린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가자와 더블린에서 쓰였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말과 글을 서구 세계에 번역하여 전한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이 다루는 이야기는 망명자이자 번역가로서, 그리고 가자를 살아낸 사람으로서 쓴 것들이다. 그는 “생존은 삶이 아니”라고 말한다.(37쪽) 삶이 ‘생존’의 차원으로 납작해지는 상황에서는, 언어 역시 그 생명력과 복잡함을 잃고 단어 차원으로 단순화되고 납작해지는 것이다. ‘아직 살아 있어’와 같이 생존을 알리는 말, ‘나 배고파’와 같이 생존에 직결된 말, ‘폭격’과 같이 상황을 전달하는 말 들로 말이다. 동사는 명사가 되고, ‘배고파’는 ‘배고픈’이 된다. 굶주림이 ‘문법적 완성이 필요없는 지속적인 행위가 되’(56쪽)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강제점령, 봉쇄와 공격으로 삶이 파괴되고 언어가 생존의 도구로 축소되는 상황에서도, 언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저자는 ‘그럼에도’(22쪽)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폐허 어딘가에는 의미가 살아남아 있기 때문’(22쪽)에. 그것은 ‘잊히기를 거부함으로서의’(22쪽) 의미다. 언어는 너무나 불완전하고 너무나 정치적이고 또한 폭력적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언어에 모든 것을 걸어 보는 것 같다.
“세계가 변화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번역하지 않는 것은 항복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84쪽)
그것은 항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저항을 계속하기 위해서다. 그는 고민한다. 정말로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인가. 어쩌면 말하기는 ‘슬픔의 반향실’(81쪽), 그러니까 이미 이해하고 함께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에 대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그 ‘슬픔의 반향실’ 안에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울려퍼지는 이곳이 슬픔의 반향실이 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은 그 반향실의 내부자들에게 있지 않나. 이 한 권의 책 속에서도 헤매는 내가, 알 수 없고 될 수 없는 타인의 고통에 어떻게 연루되고 어떻게 함께 저항할까. 이 책을 소개하는 일은 그런 고민 속에서 이루어졌다.
망명자의 신체, 번역가의 언어… 팔레스타인 번역하기의 딜레마
이 책에 실린 에세이 <대위법적 신체>, <두 지평선에서 드리는 기도> 등에서, 망명자로서 알라는 자신의 몸이 어떻게 두 세계에 동시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 쓴다. 그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대위법적 읽기’를 참조한다.(91쪽) 서로 다른 선율들이 각각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나아가는 음악의 대위법처럼, 사이드의 대위법적 읽기는 하나의 텍스트나 사건 안에서 서로 다른 층위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개념이다. 대위법에서 서로 다른 선율들은 때로 충돌하며, 억지로 하나의 화음을 이루며 균열을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 대위법적 읽기를 알라는 ‘여러 역사를 한꺼번에 머릿속에 품고 그 현실들을 동시에 유지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 설명한다.
사이드에 따르면 망명 상태는 사람의 의식 세계에 균열을 만들며, 그것은 자신이 떠나온 세계와 도착한 세계, 두 장소를 이중으로 인식하게 한다. 알라는 사이드를 경유하여 망명자인 자신의 위치를 ‘대위법적 신체’라 설명한다. 그가 나고 자란 가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있는 곳이며 그것들이 극단적인 폭력으로 파괴되어온 곳이기도 하다. 망명해온 더블린의 다른 기후와 사람들 속에서 그는 낯섦을 느낀다. 더블린의 풍요로움 속에서 굶주림의 습관이 배어 있는 자신의 몸과 의식을 순간순간 발견한다. 이 균열에 대해 쓰며 그는 ‘망명이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두 개의 진실을 동시에 품기 위해 계속되는 노력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중’(97쪽)이라 말한다.
그런가하면 표제작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상처와 말을 잇는 다리>, <보이지 않는 것을 번역하기―가자의 하늘과 앤 카슨의 비전> 등의 에세이에서 그는 팔레스타인 번역가로서의 딜레마에 대해 쓴다. 번역가로서 쓰는 그의 이야기는 망명자로서의 그것과 겹쳐 보인다. 번역가는 언어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다른 세계에 소개하는 매개자이자 전달자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일은, 사라지고 지워져가는 세계를 망각되지 않도록, 가시화되도록 다른 세계에 호소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다른 세계란 서구 세계이며, “세계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말을 듣기 전에 언제나 번역을 하라고 요구해왔다.”(69쪽)
그런데 “그 세계는 그 비극이 인도주의 보고서와 수동태로 된 기사 제목에 담기는 걸 선호하는 세계였다.”(69쪽)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예컨대 ‘공습’이라는 추상적인 영어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폭격’의 주체, 가해자의 위치는 지워진다. 그렇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번역한다면 사람들은 그 참혹함에 고개를 돌리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현실만을 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알라에 따르면 “충실하게 번역하면 보이지 않게 될 위험을 떠안지만, 전략적으로 번역하면 왜곡하게 될 위험을 떠안는다.”(83쪽) 가자를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가자의 현실을 가리도록 고안된 바로 그 구조들에 맞서 싸우는 일이다. 이것이 팔레스타인 번역가가 처해 있는 망명 상태다.”(71쪽)
이러한 망명 상태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말하기와 번역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이자 조건이기도 하다. 알라는 아랍어가 “비통함과 친밀함, 번역 불가능한 즉시성의 언어”(71쪽)이자 “인간의 고통이라는 삶의 경험에 푹 젖은 특유의 리듬과 억양”(165쪽)을 가진 언어라고 쓴다. “외교의 언어, 거리를 두는 언어, 단정하게 범주화된 폭력의 언어”(71쪽)인 영어에는 담기지 못하는 아랍어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 책을 읽는 한국어 독자로서 상상해보게 된다. 팔레스타인 번역가이자 작가가 영어로 쓴 에세이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읽고 있는 것은 어떤 저항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일이 저항이 될 수 있을까
“무너지는 세계의 흔들림 속에서 글을 쓰며 역사를 진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순환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28쪽)했던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 예이츠를 경유하여, 에세이 <가자에서 바라본 풍경―W.B.예이츠의 점점 넓어지는 소용돌이를 통해 본>에서 알라는 이렇게 쓴다.
“우리는 더 이상 펼쳐지는 역사 속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삭아들어가는 역사 속을 나선을 그리며 통과하고 있다.”(28쪽)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이 문장 속의 ‘우리’를 팔레스타인 사람들로 이해했다. 두 번째 읽었을 때, 나는 그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장이 다르게 읽힌 것이다. 첫 번째 독서에서 나는 팔레스타인을 내게서 더 많이 타자화해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읽어낸 ‘우리’의 달라진 의미는 단지 에세이를 다르게 독해하게 했을 뿐 아니라, 내가 왜 가자를 내게서 떨어지지 않은 이야기로 느끼게 되는지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부서져가는 세계에서, 즉 ‘삭아들어가는 역사 속’에 함께 존재한다. 가자는 그 역사 속 가장 먼저 풀려나가는 나선의 부분에 있다. 우리는 가장 극심하게 풀려나가는 역사의 부분을 가자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세계 안에서, 같은 역사의 넓어지는 소용돌이 속을 풀려나가고 있다.
단순히 ‘더 잘 연대하기’를 지향하는 일도 의미가 있지만, 거기에서 나아가서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의 조건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자를 지우려는 세상’, ‘가자가 지워져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 있을 것인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가자의 현재를 조건으로 하는 세계를 공유하는 우리는, 그 속에서 연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내게는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질문이 남아 있다. 전쟁의 압도적인 무게 아래 언어가 부서질 때 우리는 계속해나갈 말들을―혹은 힘을―어떻게 찾아내야 할까?”(170쪽)
알라는 이 책을 통해 답이 아닌 질문들을 남긴다. 나는 알라가 써내려간 고유한 문장들을 읽어내며, 우리의 몸이 다른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꾸만 감각을 열어 두는 일이 그 문장들에 대한 응답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나의 텍스트를 언어, 경험의 차이 등 겹겹의 벽을 뚫고 읽어내는 일처럼, 타인의 삶에 연루된다는 건, 안다는 건,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건 실로 불편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삭아들어가는 역사’의 세기를 사는 우리는, 편안하다는 감각을 의심해 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불편을 감수하고 타인의 삶에 닿고자 하는 일이 저항이 될 수 있다면, 어쩌면 저항은 우리 삶의 상수가 되고, 저항하지 않는 상태를 의심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단어를 짧아지게 하려고 애쓰는 장소에서 길고 신중한 문장들을 계속 써나갈 것이다. 그 길이 자체가 우리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한 번에 한 줄이 넘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선언이 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심지어 봉쇄 아래에서도 숨 쉴 자격이 있다.”(63쪽)
생존에 저항하며 삶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긴 문장들을 써내려간다. 그 문장들이 나에게 닿을 때, 이야기가 나에게 침투하는 감각을 기억하려 한다. 겹겹이 번역된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며, 내가 알지 못하는 고유하고 아름다운 언어와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세계를 상상해본다. 그 상상의 감각이 작은 저항이 되기를 바라면서.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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