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쭝(비폭력 트레이닝 트레이너)

전쟁없는세상 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특집 글입니다. 전쟁으로 훼손당한 남성성을 국가가 어떻게 영웅화하는지를 패럴림픽을 통해 바라봄으로써 국가가 바라는 남성성의 성차별주의와 정상신체주의를 분석하는 나영정 선생님의 글 ‘국가 남성성 훼손을 땜질하는 불/가능한 영웅 : 상이용사에서 패럴림픽 영웅까지’를 읽고 쓴 서평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하루에 장애인을 10명 이상 만나는 날은 거의 없다. 기껏 해 봤자 매년 4월 20일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이나 4년마다 열리는 패럴림픽 정도 아닐까?

이 때도 사람들이 장애인을 직접 만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비장애인이 만든 언론 보도를 통해 장애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장애인들은 장애로 인해 끔찍한 불행을 겪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한다. 장애인의 몸은 모든 불행의 원인이며, 그가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존재’라는 결정적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때로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의 몸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다. “이렇게 사지가 멀쩡한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야. 저런 사람도 긍정적으로 사는데 나도 더 열심히 살아야지”라면서 위안과 용기를 얻기도 한다. (장애인 관련 언론 보도의 댓글에서 이러한 반응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장애인의 몸을 둘러싼 이 같은 서사는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퀴어활동가 나영정은 <그런 남자는 없다> 중 ‘국가 남성성 훼손을 땜질하는 불/가능한 영웅’이라는 글에서 패럴림픽 등의 장애인 국가스포츠를 자세히 분석한다. 그러면서 장애인 차별의 역사 속에서 가부장제, 국가주의 및 군사주의가 어떻게 만나는지 분석한다.

 

‘애국’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의 몸

지금 한번 머릿속으로 ‘상남자’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는가? 아마도 십중팔구 (나와 마찬가지로) 건장한 근육질의 신체가 생각났을 것이다. 그렇다. ‘남자다움’은 강한 신체를 전제한다. 진짜 남자는 자신의 힘으로 다른 남성들과 싸워서 여성, 가족, 더 나아가 국가를 지켜야 한다. (군대 체험 프로그램에 괜히 <진짜 사나이>라는 제목이 붙은 게 아니다.)

흥미롭게도 나영정 활동가는 이렇게 ‘남성적인 강인한 몸’이 제국주의의 주요 장치였다고 설명한다. 강인한 남성 신체를 기반으로 국가의 남성성이 만들어졌으며, 자본주의 질서가 자리매김 되면서 노동 능력/자격에 따라 시민권의 위계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는 스포츠 영역에서도 두드러졌다. 실제로 현대 스포츠는 19세기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과 궤를 같이 한다. 그 무렵 영국은 제국을 이끌어갈 남성성을 기르고 상류계급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고급 사립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20세기가 되면서 스포츠는 노동계급까지 확산됐고, 계급을 넘어 민족의 동질성을 강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체육 훈련은 군사 훈련의 표본이 되었고, 군사기술은 체육 교육의 내용이 되었다. 국가가 스포츠를 통해 남성의 신체와 남성성을 규율하게 된 것이다. 남성은 국가에 헌신하는 ‘국가주의적 주체’가 됐으며, 제국 팽창기에서는 전쟁의 주체가 되었다. 제국주의 침략 전쟁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전쟁 시기가 아니더라도 군사주의와 국가주의가 강고한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때 국가의 번영은 ‘애국’으로, 이를 위한 경쟁은 ‘전쟁’으로 비유된다. 고도성장을 꿈꾸던 70년대 한국에서는 “체력은 국력”이라는 표어가 등장했다. 이는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체육대회 개회사에서 한 말이다. 국가 대항전은 또 어떤가? 사람들은 한일전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국가대표 선수를 ‘태극전사’라고 부른다. 태극전사가 되는 것은 영광이자 책무이기 때문에 선수들은 다른 중요한 경기를 포기하더라도 국가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

이렇게 스포츠 영역에서도 ‘애국하는 몸’이 표준인 사회에서 장애인의 몸은 쓸모 없는 몸이다. 그래서 전쟁을 치르던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는 장애인을 집단 수용하거나 학살했다. 한국에서도 장애인 강제 낙태나 단종 시술이 횡행했다. 국가에 이바지할 수 없는 장애인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장애인 정책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시설 중심 장애인 정책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나영정의 '국가 남성성 훼손을 땜질하는 불/가능한 영웅 : 상이용사에서 패럴림픽 영웅까지'가 실린 책 표지

나영정의 ‘국가 남성성 훼손을 땜질하는 불/가능한 영웅 : 상이용사에서 패럴림픽 영웅까지’가 실린 책 <그런 남자는 없다> 표지

장애인은 어떻게 영웅이 되는가

내가 이 글에서 새로 알게 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은 군사주의와 국가주의가 장애인 정책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장애인이 대규모 인구집단으로 나타난 것은 1∙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애국의 결과로 장애를 입은 상이군인이 등장한 것이다. 남성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같은 ‘실패’ 사례가 있어서는 안 된다. 상이군인은 영웅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조금씩 국가 유공자 예우 차원의 보상 정책이 만들어졌다. 국제적으로는 상이군인의 친선과 교류를 위한 스포츠 대회도 시작됐다. 패럴림픽이 바로 그것이다. 역설적으로 장애인을 배제했던 국가주의가 장애인 정책의 기반이 된 셈이다.

출발점이 무엇이든 장애인에 대한 지원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장애인이 체육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재활을 하고 성취감을 얻는 것도 좋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통해 얻는 것은 몇몇 ‘장애를 극복하는 국가적 영웅’의 사례뿐이라면, 한계는 매우 명확하다.

“상이군인 선수들, 스포츠로 애국한다”, “장애인이지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됐어요”, “금메달 프로포즈… ‘여보 결혼반지 늦었지’”. 모두 패럴림픽 선수들에 대한 보도자료나 기사의 제목들이다. 이 사례의 주인공은 모두 남성이며, 금메달을 통해 애국을 하면서 자신의 남성성을 보충한다. 이는 남성의 건장한 신체를 정상으로 규정하는 기존의 서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야기를 보는 비장애인은 정상적이지 않은 장애인을 불쌍히 여기며, 자신의 정상적 상황에 안도한다. 장애를 극복하고 나라에 이바지해 기어코 정상성을 되찾은 장애인에 감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평범한 장애인들은 자랑스럽지 못한 존재가 되고 사회에서 배제된다. 장애 극복은 개인의 몫이며, 사회는 이에 성공한 장애인에만 박수를 보낼 뿐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아무리 국가에서 ‘나라를 지킨 영웅’이라고 치켜세워도 실제 삶에서 제대로 돌봄도 받을 수 없다면? (실제로 상이군인들은 국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고, 가족과 여성의 돌봄을 받았다. 대다수는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는 방식으로 남성성을 드러내며 살았다.)

아무리 많은 장애인이 4년에 한번씩 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고 해도, 일상의 삶에서는 제대로 활동보조를 받을 수 없다면? (그래서 88 패럴림픽에서 장애인운동단체는 “장애인에 대한 지원 없이 장애인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은 기만이며 장애인을 전시하는 것 뿐”이라며 거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극복하는 장애인’의 서사를 넘어서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10년 전 여행 간 유럽의 풍경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거리에 장애인이 정말 많다고 느꼈는데 곧 무덤덤해졌다. 장애인이 한 공간에 있는 것은 일상이었다. 어느새 나는 장애인을 거의 의식하지 않게 됐다. 장애인을 볼 때도 ‘장애인이 있구나’가 아니라 ‘사람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그를 받아들인 것이다.

몇 년에 한번씩 패럴림픽에서 만나는 근육질의 장애인도 참 좋고, 가끔씩 신문에 나오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장애인’도 너무 좋지만, 나는 유럽에서 그랬듯이 일상 속에서 평범한 장애인들을 더 자주 만나고 싶다. 우리의 몸은 국가 번영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남자(혹은 여자)답지 않아도, 애국하지 않아도, 고통을 극복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동등하게 존엄하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주체가 필요하다. 과연 남자다운 몸, 정상적인 몸은 무엇인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사람들의 몸을 국가가 통제하려 하는지, 이것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만드는지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기존의 이야기에 균열을 내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서로 동등한 장애인과 비장애인, 여성과 남성 주체를 만드는 시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