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작가, 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은폐된 폭력
글을 쓰면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나는 글쓰기 수업에서 세상을 본다. 타인의 말과 글에서 이전엔 몰랐던 삶의 다른 면을 마주한다. ‘폭력’은 글쓰기가 피해갈 수 없는 주제다. 글쓰기를 통해 인간다운 삶을 도모하는 이들은 몸에 새겨진 ‘멍’부터 글로 빼내려 애쓴다. 집, 학교, 직장에서 얼마나 많은 폭력이 일어나는지 나는 매번 처음인 양 놀란다. 공기처럼 흘러 다녀서 오히려 은폐 되는 폭력의 실체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5년 전 즈음엔 학창시절 운동부였고 현재 체육과 강사인 학인이 ‘체육계 폭력 문화’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왔다. 운동선수들은 원래 많이 맞는다더라 수준으로 막연히 짐작하던 수준을 벗어난 글이었다. 핸드볼에 입문한 초등학교 5학년의 추운 겨울날 체육관 바닥에 엎드려 경찰진압봉으로 맞은 일, 대학 체육학과에서 “대가리를 하도 박아서 두피에서 비듬처럼 피딱지가 떨어져 나온 일” 등 체육학도의 잔혹한 생애를 생생히 그려냈다. 나는 이런 부당한 관행을 사회에 널리 알려야한다는 책임감에 칼럼을 쓰려고 당사자에게 허락을 구하는 메일을 보냈다. 이런 답장이 왔다.
이렇게 제 사례를 인용해 주신다고 하니 영광입니다. 당연히 쓰셔도 됩니다. 작년인가 같이 운동했던 친구를 만나 새벽까지 술을 마셨는데요. 근데 친구가 술에 취해서 묻더라고요. “00아! 우리 도대체 그 때 왜 그렇게 맞은 거냐?” 얘가 철학박사에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철학박사도 모르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그때도 그랬고 예전부터 이 얘기를 글로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언어로 표현하고, 말할 수 있는 신체가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쓰면서 정리가 되는 부분도 있었고 글로 객관화 시키면서 치유가 되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웃기고 슬프고 고마운 편지였다. 그때 글쓰기 수업에서 그가 체육계 폭력문화를 드러내는 글을 발표하자 다른 남자 학인은 다급하게 손을 들고 발언했다. 자기경험과 단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일치한다고. 그 역시 초등학교 핸드볼부였는데 매일 흠씬 구타를 당했단다. 5학년 땐 코치에게 심하게 맞아 온몸이 부었고 그 모습을 본 엄마가 기절하여 병원에 입원했던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죽도록 맞았던’ 두 사람은 공통으로 증언했다. 코치나 감독 등 가해자들의 폭행 근거는 확고했는데, 바로 이것이다. 더 많이 때릴수록 좋은 성적을 낸다는 것!
폭력은 어떻게 정당성을 획득하나
며칠 전 영화<4등>을 보면서 오래전 이 글과 일화가 통째로 떠올랐다. 영화<4등>은 재능은 있지만 만년 4등인 수영선수 준호가 1등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엄마로 인해 새로운 수영 코치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여기엔 두 명의 수영선수가 등장한다. 전직 국가대표인 코치, 꿈나무 준호. 둘 다 맞으면서 운동을 배운다. 맞아야 정신 차리고, 그래야 더 좋은 성적이 나오고, 선수로서의 메달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논리로 폭력은 정당화된다. 맞으면서 배운 사람이 코치가 되자 때리면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데, 이런 흐름이 영화에선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일처럼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그래도 여기까진 경험상 예상 가능한 스토리였다. 나에게 반전은 ‘엄마’의 태도다. 아들 준호의 몸에 세계지도처럼 넓게 새겨진 시키먼 ‘피멍’을 본 엄마는 크게 놀라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버린다. 처음부터 못 본 사람처럼 코치에게 따지거나 문제 삼지 않는다. 앞의 현실처럼 엄마가 ‘기절’하는 장면이나 코치와 한바탕 충돌을 짐작했던 나는 착찹했다. 폭력의 목격자가 방관자가 되어 동조자가 되는 것은 봤지만, 그게 하필 엄마라니. 무엇보다 엄마가 체벌은 아이를 위한 것이라는 철썩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게 안타까웠다.
누가 준호엄마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이 물음은 나라면 어떻게 다르게 대처했을까, 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지금 나는 폭력 코치에겐 아이를 절대 맡기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글쎄 모를 일이다. 초등학생 저학년 자식들에게 학습지를 시키고 컴퓨터 사용 시간을 통제하고 승용차로 아이들 학원을 데려다주는 준호엄마의 모습은 나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나도 전업주부일 때 아이에게 그런 방식으로 돈과 시간을 쓰고 헌신했다. 그게 엄마노릇인줄 알았다. 아이가 잘 크기를 바라기만 했지 그 ‘잘’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과, 그 ‘잘’을 위해 어디까지 스스로 허용하는지에 대한 점검은 없었다. 그 상태로 경주마처럼 전력질주했을 때 죄인지도 모르고 죄를 짓고, 폭력인지도 모르고 폭력을 행사할 확률은 있다.
폭력을 단절하기
내가 지금 영화 <4등>의 코치나 엄마처럼 아이의 ‘메달’을 위해서 ‘폭력’을 행하거나 묵인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폭력에 대한 ‘말과 생각’이 쌓인 덕분일 것이다. 체육계 폭력문화를 고발하는 글을 읽고, 아픔에 공감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폭력에 관련한 책과 영화를 보면서 생각할 시간을 갖고 꾸준히 글을 썼던 것, 그것이 내 안의 폭력과 폭력의 일상에 눈 뜨게 해준 것 같다. 영화 속 어른들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이 체벌=메달=성공의 등식을 의심하고, 다른 방식의 다른 배움과 성장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나눌 기회가 있었다면, 자신이 왜 맞았는지 질문할 수 있었다면, 자신이 당한 체육계 폭력의 실상을 하나하나 되짚어서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체벌과 실력이 비례한다는 신앙 같은 믿음을 어느 정도 증명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갖은 폭력과 굴욕을 감내하고 메달을 딴 후 다시 폭력을 낳는 삶, 비메달권인 4등인 채로 좋아하는 운동을 지속하면서 남에게 폭력을 대물림하지 않는 삶, 두 가지 경우를 나란히 상정해 본다. 때로는 (성)취하는 삶보다 해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도 세상에 기여하는 방법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