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희(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팀 활동가, 징병제폐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 베이시스트)

 

전쟁없는세상 주:

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팀 활동가이자 베이시스트인 안악희 님이 세 차례에 걸쳐서 반전과 평화를 노래한 음악들을 소개했습니다. 이번 글은 번외편으로 한국의 음악들을 소개하는 글입니다. 아주 유명한 뮤지션부터 어쩌면 처음 들어보는 뮤지션까지, 반전과 평화에 대해 노래한 한국 음악들을 만나보세요.

 

지난 번, 필자가 쓴 세 편의 포스팅이 꽤 반응이 좋았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평화와 반전을 담은 한국의 음악도 소개시켜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에 나는 이렇게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밝혀두어야 할 애석한 점이 있다. 한국 음악은 평화를 직접적으로 다룬 노래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과거 군부 독재 시절에 자유를 노래한 곡들, 사회를 풍자한 뮤지션들은 꽤 있었으나(대표적으로 양병집을 위시한 포크 뮤지션들), 평화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곡은 극히 드물다. 나는 아마도 군사국가화된 한국의 현실상, 북한과의 대치 상황에서 반공을 국시로 한 과거 한국의 분위기상 절대적인 평화를 이야기 할만 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이러한 노래들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전, 평화, 반군사주의를 노래한 곡들은 조금씩 존재해 왔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평화를 다룬 한국의 곡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앞의 포스팅들과는 달리, 다소 유명한 곡들도 섞여있다(워낙에 노래 숫자가 부족하므로).

 

김민기 – 작은 연못

말해 무엇하랴. 지금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지만, 한때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던 김민기의 유명한 곡이다. 이 노래의 가사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대체로 남북관계를 의미한다고 이야기한다. 남북간의 전쟁은 공멸이고 결국 승자가 없는 무의미한 싸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로 해석되곤 한다.

김민기는 한국의 모던 포크를 대표하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뮤지션이다. 이 노래는 1972년 당시 양희은의 버전으로 처음 발표되었는데, 1970년대 초반 김민기를 위시한 포크 뮤지션들의 돌풍은 사실 한국 대중음악사상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게 된다. 그 전에도 한국의 대중음악은 어느정도 성장하고 있었지만(키보이스나 신중현과 퀘션즈 같은, 록 사운드를 잘 뽑아낸 위대한 뮤지션들이 있었음을 상기하자), 김민기의 등장으로 한국 팝 음악은 그 특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청년 세대의 고뇌와 성찰을 담은 음악은 그 이전까지는 없었다. 심지어 그 이전 시대의 한국에도 간간히 포크 음악이 존재했지만, 컨트리와 블루그래스의 영향이 짙은, 쉽게 말하면 모던 포크 이전의 음악에 더 가까웠다(서수남과 하청일이 소속되어 있던 ‘아리랑 부라더스’의 음반이 1964년에 발매된 것을 생각해 보자!).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우디 거스리부터 피트 시거까지 이어지는 모던 포크의 계보가 착실히 발전중인 것을 생각해 보면, 김민기는 한국 음악을 20년쯤 앞당긴 뮤지션인 셈이다.

kimminki

 

조용필 – 생명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이 노래는 광주항쟁의 학살을 다룬 곡이다. 가왕이라 조용필은 스스로를 “그다지 정치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당시 광주항쟁은 사실을 알고 나면 그 누구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참극이었다. 조용필 또한 이 중대한 사건을 그저 두고 볼수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광주항쟁 직후 조용필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김지하 시인으로부터 시를 한편 받았다고 한다. 조용필은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여서 노래를 만들어 보고자 했으나, 이 시가 광주항쟁을 다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대로 곡을 붙이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결국 그는 전옥숙 여사(영화제작자, 한국 대중예술계 전반에 걸쳐 활동한 전설의 레전드급 프로듀서. 영화감독 홍상수의 어머니. 2015년 작고)를 찾아가서 둘이 함께 가사를 거듭해서 고쳤다고 한다. 결국 가사 자체는 원안과 상당히 다른 내용이 되었지만, 당시의 엄혹한 시대에 살육을 반대하고 생명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이 노래는 평화를 다룬 노래로 평가할만 하다 하겠다. 프로그레시브 록의 영향을 받은 이 곡은 편곡도 매우 훌륭하다. 나는 이 곡은 80년대 초반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아웃풋 중 하나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독자 여러분은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당시는 직접적으로 사회 이슈를 다루는 곡을 발표하기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고(방송 심의는 물론이고 모든 음반은 사전 검열 없이는 발매조차 할 수 없었다. 사실상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와 비슷한 수준의 통제였다), 김원중의 “바위섬”이 광주항쟁을 다룬 곡이라는 사실도 거의 20년쯤 지나서야 밝혀질 수 있었던, 그런 나라였다.

choyongpil

 

강산에 – 더 이상 더는

1994년에 발표된 이 곡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거의 최초로 정면으로 평화를 다룬 곡이라 할 수 있겠다.

90년대 초반, 강산에는 다소 반항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그는 첫 번째 앨범부터 세 번째 앨범까지 줄곧 사회적인 이슈를 건드려 왔다. 2018년도에는 평양에서 그의 대표작인 <…라구요>를 공연하는 역사적인 장면도 달성했다.

강산에는 데뷔 초기에는 하드록 뮤지션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실은 그는 한국 포크의 계보를 이어가는 뮤지션이다. 실제로 그의 초기 음악은 다소 비트가 강한 록 음악이었지만, 그의 음악 세계는 포크로 시작해서 포크로 이어져 왔다.

그런 점 때문인지 그의 노래는 줄곧 목가적인 시골 풍경과, 어릴적의 순수함과, 전쟁 반대와 평화로 일관적인 흐름을 보인다. 한국인들은 나이를 먹고 성장하면서 어느 순간 전쟁이 불가피한 자연 재해와도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강요받는다. 전쟁을 반대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강산에의 목가적인 정서와 평화라는 주제가 맞닿아 있는 것은 생경한 이야기가 아닐 수밖에 없다.

90년대 초중반으로 기억된다. 환경 관련 공연으로 기억되는데, “…지구상에서 지난 1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시기가 단 일주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바라며…”라는 멘트와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하던 강산에의 모습이 중계된 적이 있었다. 나는 어쩐지 당시의 그 멘트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때 인류가 쉬지않고 전쟁을 해 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kangsanae

 

추가열 – 평화

추가열은 매우 독특한 뮤지션이다. 1980년대 중반 데뷔하여 언더그라운드에서 오래 활동하였고(당시에는 TV에 출연하지 않는 뮤지션들을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렀다. 하지만 당시 음반법과 사전검열 제도 때문에 음반은 대부분 대형 레코드사에서 발표했다. 본격적으로 자주제작 방식의 인디 뮤지션이 등장한 것은 90년대 중반 크라잉넛을 위시한 펑크 밴드들이 나온 이후다. 저자 주), 지금이나 그때나 아이돌 가수들이 주로 소속되어 있던 SM엔터테인먼트에 소속이 되어있던 유일한 포크 뮤지션이었다.

만약 한국에 어덜트 컨템포러리가 하나의 장르로 확립되어 있었다면, 추가열은 그에 가장 잘 맞는 뮤지션이 아닐까 한다. 가사와 창법 모두 10대나 20대를 타겟으로 한 뮤지션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트로트나 뽕짝으로 분류될 수 있는 ‘성인가요’를 부르는 사람도 아니다.

추가열의 이 곡은 매우 간결한 구성을 보인다. 사실 오랫동안 활동해온 한국의 뮤지션들은 대부분 가사의 서사가 부족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90년대 이후 많은 뮤지션들이 음악적 실험을 거듭하여 가사에 어마어마한 내용을 담아내기도 했지만, 그 이전부터 활동한 뮤지션들은 가사가 굉장히 짧다. 그러나 추가열은 짧은 가사에 정확한 메세지를 담아냈다. 이곡의 코러스는 단 두 줄 뿐인데, 두번째 줄인 “작고 약한 것들이 아름다워지는 세상”이라는 부분은 평화의 이념을 가감없이 담아냈다.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명곡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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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골 – 평화가 무엇이냐

아마도 이 블로그를 자주 읽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놀랍지 않은 곡일 수 있다. 조약골은 90년대부터 활동해 온 아나코-생태주의자이자 오랫동안 투쟁해 온 환경운동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잠시 조약골과 함께 밴드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느낀것은 “참 음악 잘 한다”였다.

이 곡은 평택 대추리 투쟁 당시 문정현 신부가 했던 연설을 기초로 조약골이 곡을 붙여 완성하였다. 평화가 거창한 게 아니라 그저 해고 당하지 않고 자연에 사는 동물들이 살 곳을 잃지 않고 춥고 배고프지 않은 것이라는 이 소박하지만 웅장한 메세지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곡은 한번도 기존 음반사에서 정식으로 발매된 적이 없이 철저히 DIY 자주제작 방식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대추리에는 이제 미군 단일 기지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군기지인 캠프 험프리스가 자리잡았지만, 그 곳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던 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남겼다. 그리고 그 당시 대추리 투쟁의 경험으로 평화라는 개념에 눈 뜨게 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1919년 일본군 육군 항공대가 처음으로 평택에 들어온 이래, 100년이 지나도록 대추리는 다른 나라 군대의 땅이 된 셈이다. 비록 대추리에는 이제 미군이 살지만, 이 노래는 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각종 시위현장에서 불리며 생명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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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 트랙)

푸펑충 – 어둠의 자식들

이 노래는 90년대 한국 펑크씬의 맹주 중 하나였던 푸른펑크벌레, 줄여서 푸펑충이라 불리는 밴드의 걸작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한국의 인디 뮤지션들은 활동 좀 할만 하면 군대에 끌려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러한 울분이 가득 담긴 이 노래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전후무후하게 남을 반징병제/반군사주의 노래가 되었다.

당시 푸펑충의 멤버들은 다른 밴드들과 다르게 대부분 군필자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좀 더 강렬한 울분이 담긴 가사를 엿볼 수 있다. “두동강 난 이 나라에 태어난 게 내게는 큰 실수였다”로 시작하는 이 곡은 “평발인 얘, 뚱뚱한 쟤, 미친척 친구까진 용서 할 수 있지만” 어둠을 뚫고 태어나는 신의 아들들을 저주하고 있다.

이런 메세지를 담은 곡들은 1960년대 미국에서도 많이 있었다. 이전의 칼럼에서 소개했던 Phil Orchs의 Draft Dodgers Rag도 입으로는 전쟁을 이야기 하지만 슬그머니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보수주의자들을 비꼬았었고, CCR의 Fortunate Son또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손자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의 일화를 다루고 있다. 당시 그는 닉슨 대통령의 딸 줄리 닉슨과 1968년 결혼 한 후(그가 1948년 생임을 생각 해 볼 때, 비슷한 나이대의 다른 젊은이들은 진작에 베트남에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1970년에 미 해군 예비군 장교로 입대하여 사실상 베트남전을 피했다. CCR의 존 포거티는 “좋든 싫든 그들은 ‘선택’ 할 수 있고 우리와 다르게 부모님의 영향을 받는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같이, 푸펑충은 합당한 이유 없이 어떻게든 징병을 피하는 사람들에 분노하고 있다. “언제나 우린 깜깜한 어둠의 자식들, 기나긴 26개월 꽉꽉 밟고 나오지”라는 부분은 당시의 시대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이나 그때나 사실 있는 집 사람들은 연줄을 통해서 방위산업체로 가거나, 몸 전체를 스캔해서 어딘가의 하자를 발견해서 신검 등급을 낮추거나(돈이나 의학적 지식이 많을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다), 애초부터 미국에서 태어나는 방법(원정출산)을 쓰기도 한다.

이 노래는 “빡빡 머리 깎고 훈련소 들어가던 날, 누군가 말했지 한숨 섞인 한마디, ‘우린 이게 뭐냐 이 X발’”이라는 가사로 끝을 맺는다. 당시에는 아직 군필자들이 여성 탓을 하지 않았고, 결론적으로 사회의 상층부가 문제인 것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러한 시대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bluepunkbu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