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맹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 병역거부자)
“세상에 재밌는 게 고기 말고도 얼마나 많은데요”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교육 요청을 받아 간 곳에서 점심을 먹다가 채식을 언제 어떻게 하게 됐는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날 구내식당 메뉴에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김치와 김 밖에 없으니 담당자 입장에서 마음이 쓰여서 물어보신 건지도 모르겠다. 관심이 생겨 한번 해보자 시작했는데 해보니 소화불량도 없어지고 좋아서 계속 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돌아온 말이 “근데 세상에 고기를 안 먹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요. 저는 못할 것 같아요”였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이어진 한마디가 인상적인 기억을 남겼다. “근데 이효리가 채식하는 거 보면 왠지 재수가 없더라고요. 가죽 옷도 그렇게 입으면서 모순 아닌가요?” “허허허 그런가요…(침묵)”
이런 질문을 지금도 종종 받는다. 어떻게 답을 하면 좋을까. 질문한 상대방의 의중을 헤아리며 답의 방향과 수위를 조절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대체로 상대가 불편해하지 않으면서 납득되기 쉬운 이유를 댈 때가 많은 것 같다. 생각보다 채식을 육식하는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채식의 이유를 적당히 얼버무리게 되는 나를 발견했다. 소화기 계통이 안 좋았는데 채식을 하고 나서 괜찮아졌다는 식으로 나의 결함을 설명하고 나면 적어도 “그럼 풀은 생명이 아니냐”라는 투의 반론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방어적인 답변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긴 하다. 교생 실습 때였는데, 퇴근길 학교 운동장에서 앞서 걸어가는 교사 두 명이 하던 말이 들렸다. “이번에 교생 중에 채식하는 사람이 있대. 근데 채식주의자까지는 아니래.”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나는 그 채식하는 교생이 아닌 것처럼 가만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나에겐 이렇게 들렸기 때문이다. “채식하는 건 개인의 자유지, 그런데 ‘주의자’는 아니라니 안심해도 되겠어.” 보이지 않는 ‘선’이 있고 그 ‘선’을 넘지 않을 때만 받아주겠다는 메세지로 들렸고, 그 말이 내게 미친 파급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채식의 이유를 묻는 눈앞의 상대가 ‘예의 있는 호기심’으로 묻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어떤 답을 하든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묻는 것인지 가늠하며 답변을 고르는 습이 생긴 것이다.
채식하는 사람의 존재가 모임 운영에 불편함을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건 나의 자격지심인 걸까? 내가 “고깃집만 아니면 웬만하면 먹을 수 있다”라고 말했을 때는 채식하는 사람을 고려하는 준비팀의 감정노동을 덜어주고 싶어서였다. 채식식당 리스트까지 알려주는 건 선의가 아닌 강요로 읽힐 수 있겠다는 고려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일상의 다른 어떤 순간 어딜 가도 먹을 수 있는 게 비빔밥 밖에 없는 날이 연달아 있을 때는 컨디션에 따라 짜증과 우울이 몰려오기도 했다.
날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데 이건 아닙니다
아무리 내가 상대의 감정을 헤아려 말하더라도 어디선가는 ‘육식하는 사람들 인권은 없냐’라거나 ‘채식은 개인적 실천이지 발전소가 배출하는 탄소량이 훨씬 많다’는 식의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걸 보면서 이건 아니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병역거부를 말하면 군대 간 사람 인권은 없냐는 질문, 한 명의 병역거부로 거대한 군사주의에 균열이나 가겠냐 되묻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식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고깃집 앞에서 시위를 하는 것처럼 나대는 건 봐줄 수 없다.”라는 말에는 이 사회가 ‘다름’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고기 굽는 사람들 앞에서 한 직접행동이 운동전략 차원에서 효과적이었는가 하는 논의(운동의 목표, 지금 단계에서 더 필요한 행동에 대한 판단, 누구를 타겟으로 했고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 등)는 차치하더라도, 누군가의 채식에 대해 그건 봐주기 어렵다는 뉘앙스의 말은 마치 퀴어퍼레이드를 두고 ‘성소수자 인권 인정해. 그런데 꼭 그렇게 드러내고 다녀야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논리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이 정한 ‘선’을 넘어와선 안 된다는, 즉 지금의 질서가 흔들리지 않는 선 안에 있기만 한다면 ‘용인’해주겠다는 관용의 논리 말이다.
참아주는 대상의 위치에 놓인다는 건 참아주는 사람의 기준에 부합한지 아닌지를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하는 부당한 위치에 몰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양심의 진정성이든 피해의 진정성이든 심사를 받는 위치에 처했을 때 입증책임을 오롯이 떠안은 자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사회가 생각하는 전형적 이미지가 있을 때 나란 존재는 그런 면만 있는 게 아닌데 그 모습으로 설명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딜레마이다.
아이폰을 쓰면 ‘진짜’ 난민이 아닌가? 성소수자는 이성 친구와 찍은 사진이 있으면 안 되나? 진짜 병역거부자는 총쏘기 게임 한번 안 하고 모기 한 마리 죽여본 적이 없어야 하나? 얼마 전 있었던 ‘그런 난민, 병역거부자, 트랜스젠더는 없다’ 방송에 나온 활동가들은 심사를 가장한 질문이 실은 ‘이 사람은 그럴 것이다’라는 식의 존재에 대한 단면적 접근에 기반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심사받는 이들의 존엄을 훼손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문제는 그런 질문이라도 응답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받아줄 만한 사람과 아닌 자를 가르는 기준이 더 공고해진다는 것이다.
어떤 행사에서 식사를 채식으로 준비한 경우를 떠올려보자. 채식에 익숙하지 않은 참가자도 있으니 채식으로 준비한 취지와 배경을 설명하면서 채식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가는 것은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 그런데 그 설명의 방식이 참가자 중 비건인 사람을 배려해서 채식 식단을 마련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메시지가 된다. 배려를 받은 사람은 상황에 따라 고마운 마음보다는 부담스러운 마음이 크게 들 수 있다. 휠체어 장애인이 한 명 있어서 그 사람을 위해 엘리베이터가 있는 공간으로 장소를 (어렵게) 마련했다는 설명이 당사자에게 어떻게 들릴지 생각해보라. 배려의 대상이 된다는 것, 베푸는 자와 받는 자를 구분하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끼친 것 같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위축감을 작동시킬 가능성이 높다. 눈치를 보는 위치가 되면 더 착하게 굴거나 예민하게 보여선 안 된다는 자기 암시 속에 행동거지를 구성해간다. 관용 혹은 배려에 기초한 관계가 평등한 관계가 되기 어려운 이유다.
평소 행실이나 인격에 따라 부여/철회된다면 그것은 권리가 아닙니다
채식을 설명할 때 내가 취하곤 했던 방어적 화법을 돌이켜보면 까칠하다는 이미지로 엮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한국에서 채식하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다. 채식이 권리로 존중받는다는 것은 이런 전형적 이미지가 사라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이제는 ‘까칠한 비건주의자’라는 이미지 자체가 어떤 관계성에서 나온 것인지 물으며 논의 구도를 바꿔보고 싶다. 채식하는 사람은 까칠하다는 통념에 대해 “까칠하지 않아요”란 답 대신 어느 관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까칠하다는 라벨이 붙는지 되묻는 질문이다. 늘 상대 눈치를 헤아리며 조심했는데 ‘채식은 부르주아들이나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100번쯤 들었을 땐 욱할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채식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부당한 질문에 노출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약자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소설가 장정일이 칼럼에서 대체복무를 두고 한 말이 떠오른다. “징역 대신 대체복무를 했다고 해서 병역기피자라는 사회적 낙인이 사라질리 없으니, 예전대로 실형을 사는 것이 낫다”는 말에 공감했다.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는 마당에 ‘진정한 양심’ 심사를 이유로 병역거부를 선택한 이들을 모욕하는 질문이 오히려 더 많아진 점은 군사문화가 강력할수록 병역거부자 인정을 받기 어렵다는 것을 방증한다. 진짜/가짜 판별이 권리의 자격심사처럼 작동하는 곳, 전형적 피해자 상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곳에서 양심의 자유는 온전히 보장받기 어렵다.
“순결 신화와 강간 문화가 강력하게 결합해 있는 사회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강간 피해자가 될 수 ‘없다’”(권김현영,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이때 문제는 ‘행실이 조신하지 못한’ 여성이 아니라 ‘꽃뱀’ 프레임 그리고 피해자로 하여금 자신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강간 문화다. ‘남성 역차별 신화와 군사 문화가 강력한 사회’에서 대부분의 병역거부가 인정될 수 없다면 변해야 하는 건 병역거부자 개인이 아니라 군사화된 사고방식과 개인의 양심을 해석하는 협소한 틀이다. “한 끼 먹을 게 좀 없어도 괜찮지 않나”처럼 채식이 항상 존중하진 않아도 되는 취급을 받는 것은 육식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통념이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애접근권, 성중립화장실을 기본값으로 고려하는 만큼 채식이 기본값으로 고려되는 공간을 상상해본다. “거기 채식도 먹을 수 있어”가 아니라 채식이 기본값이고 고기 먹는 사람도 즐길 수 있는 그곳에선 누군가 부당하게 눈치를 보거나 구구절절 혹은 까칠하게 문제제기를 해야하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그러면 채식인과 비채식인이 서로 비난하고 규정짓는 방식이나 어느 한쪽이 참아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변화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토론도 가능해진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