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희(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팀 활동가, 징병제폐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 베이시스트)
아마 지금의 30~40대는 1980년대 후반을 역사적 대 격변의 시기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 한국이 민주화 되어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1987년 8월에는 당시 문공부의 조치에 따라 금지곡 187곡에 대한 금지가 풀리는 등 각종 검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문물과 대중문화들이 조금씩 들어왔다(올림픽을 계기로 헝가리의 록 그룹인 뉴튼 패밀리가 KBS에 등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당시 젊은층의 강력한 반미 감정 때문에 서울 올림픽에서 벌어진 미국 대 소련의 농구경기에서는 한국인들이 소련을 응원하는 기이한 광경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1989년, 폴란드는 정권교체에 성공하였고,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수년 뒤 소련이 붕괴했다. 동구권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쇄 붕괴현상은 이 두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뉴튼 패밀리의 1986년 내한 공연 영상. 당시 헝가리 밴드라는 이유로 음반 발매가 금지되는 등 여러 수모를 겪었지만 결국 한국에서 대박이 난다
뉴튼 패밀리의 에바 선(체프르키 에바)와 징기스칸의 레슬리 만도키가 발매한 서울올림픽 테마송 “Korea”. 당시 올림픽을 지켜본 사람들이면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이 노래를 기억 할것이다. 레슬리 만도키의 징기스칸은 한국에 ‘징기스칸’, ‘마추픽추’로 유명한 그 디스코 그룹이 맞다. 여담으로 레슬리 만도키도 원래는 부다페스트 출신이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서독으로 망명한 사람이다.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17번이나 수감된 민주 투사 출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에는 당시 독일민주공화국(이하 동독)의 상황이 그렇게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폴란드야 당시에 워낙 레프 바웬사와 “폴란드 자유노조”가 유명했기 때문이라 하더라도, 많은 한국인들은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이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것 처럼 알고 있다. 이러한 오해는 “우리도 저렇게 어느날 갑자기 통일이 될 수 있다”는 다소 허무맹랑한 희망을 품게 하는 한편,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저렇게 북한도 어느날 붕괴 할 수 있다”는 황당한 계시를 주었다. 그러나, 독일은 하루아침에 통일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베이시스트이면서 동시에 록 서브컬쳐 칼럼니스트로 활동한지 좀 된 편인데, 십수년 전 성공회대의 신현준 선생님의 저작들을 통해 동유럽에도 상당한 규모의 록 음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과정중에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동구권은 흔히들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 처럼 숨도 못 쉴 수준의 독재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유신 말기나 전두환 정권 시절이 더 했으면 더 했지 절대 그들보다 못하지 않았다.
당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어쨌든 독자노선을 걷는 유고슬라비아같은 국가도 있었고, 서독과 맞닿은 채로 로큰롤의 타임라인을 실시간으로 공유한 동독같은 국가도 있었다. 심지어 체코는 전위예술에 관한 오랜 전통과 수준높은 SF문학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로봇’이라는 단어가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에게서 나온 것임을 상기하자).

위-베를린 장벽을 부수고 있는 펑크족. 1989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지하철에 경찰과 함께 앉아있는 동독의 펑크족. 당시 동독에는 음성적이지만 서구의 음악과 서브컬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존재했다.
당시 동구권 국가들에는 대체로 위성 정당이 존재했는데, 이는 중국이나 북한의 우당 시스템과는 조금 달랐다. 물론 이들은 집권당의 거수기 신세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어느정도 야당으로서의 기능을 했다. 이러한 정당은 어느정도 사회적 불만의 완충재 역할을 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대중문화의 향유와 생산이 가능했으며 암시장에서 영화나 카세트 테이프를 구할 수도 있었다(여러모로 유신독재 시절 한국의 신민당과 ‘세운상가’를 생각하게 한다). 결정적으로, 비록 반공개적이긴 하나 동유럽 국가들에는 암암리에 시민운동이 존재 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80년대 동독의 평화운동
배경 설명을 하기 위해 서론이 길었다. 여튼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1980년대 당시 동독에 존재했던 평화운동인, “칼을 쳐서 보습으로(Schwerter zu Pflugscharen)” 운동이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 스티커. 동독에서 가장 역사적이고 유명한 사회운동이어서 그런지 아직도 동베를린의 기념품 가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필자가 지난 2월 베를린 방문시 직접 사 옴.
어쨌든 자유주의 국가를 표방한 서독은 징병제를 재실시함과 거의 동시에 병역거부를 법적으로 인정했다. 서독에서는 대체복무를 선택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동독은 1962년 징병제를 실시했다. 18세에서 26세 사이의 동독 남성들은 18개월간 군 복무를 이행해야 했다. 동독의 대체복무제는 1964년부터 도입되었는데, 동독 정부는 병역거부를 매우 제한적으로 인정했다. 대체복무를 선택하게 되면 건설사병(Bausoldat)이라는 노역부대에 배치되었으며, 입영시 “모든 적들에 대항하여 싸우고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함”이라는 선서를 거쳐야 했다. 이것은 사실상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고 병역거부를 분리 공작의 일환으로 이용한 것이다. 동독 정부는 대중들이 반군사주의 사상으로부터 물드는 것을 막기 위해 건설사병 제도를 이용했다. 그나마 전체 병력의 0.6퍼센트(약 1400명)만이 건설사병으로 복무 할 수 있었다.
과거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정부의 감시와 통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종교계를 통해 조직되었듯, 동독의 평화운동과 민주화 운동도 교회 네트워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978년, 동독 정부는 강도높은 청소년 대상 교련교육(Wehrerziehung)을 정규 교육과정에 도입했다. 9학년과 10학년 학생들(한국의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에 해당)은 2주간 병영에 실제로 입영하여 훈련을 받았고 상급학교 진학 후에도 정기적으로 훈련을 받았다. 이를 두고 복음주의 교파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부분 교련 교육을 거부할 권리는 인정되지 않았고, 교련을 반대하는 가정은 슈타지(동독 비밀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교회를 중심으로 “칼을 쳐서 보습으로”운동이 일어난다.
당시 교회는 동독의 시민사회 운동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아직도 동베를린 지역에는 당시 저항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교회가 “저항 박물관”(Jugend Widerstand Museum)으로 남아있을 정도다. 심지어 당시 록 콘서트나 소규모 펑크록 공연도 교회에서 열리곤 했다(당시 펑크족들은 교회에서 당당히 신성모독적인 노래를 연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 운동에 가담한 이들은 표면상으로는 종교 행사 내지는 종교적 상징으로 위장하기 위해, 별다른 정치적 제스처를 취하지 않고 빨간 원 안에 “Schwerter zu Pflugscharen”라는 글이 적힌 로고만을 종이와 천에 인쇄하여 사방팔방에 뿌리고 다녔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은 로고 안에 유엔 본부 앞에 설치되어 있는, 칼을 망치로 쳐서 구부리는 동상의 그림을 삽입했다. 이 동상은 소련의 조각가 예브게니 부체티흐(Yevgeny Vuchetich)의 작품으로, 인류의 평화 공존을 위해 제작되었다. 그러니까, 동독에서 평화운동을 하기 위해 가장 강력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작품을 가져다가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이들은 반동으로 몰릴 소지를 절묘하게 회피했다.
이들은 반군사주의에서 한 단계 진일보하여 군축을 위한 운동으로 발전한다. 이들은 당시 동독의 사정상 일종의 “사회적 제안”이나 선언서 발표 수준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1980년대 내내, 이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운동을 이어갔다. 이들은 평화 포럼이라는 이름으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982년 드레스덴에서는 평화 포럼에 모였던 사람들이 드레스덴 공습으로 인해 폐허로 남아있던 드레스덴 성모교회로 행진한 후, 촛불집회를 개최하고 노래를 불렀다.
당시 동독에서는 “칼을 쳐서 보습으로” 로고가 그려진 패치를 착용하는 것 만으로도 심각한 반항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러한 상징은 익명으로 전파되었지만 몇몇 젊은이들은 공개적으로 로고 패치를 착용하고 슈타지의 위협에 저항했다. 심지어 일부는 퇴학을 당하고 체포되기까지 했다. 경찰이나 교사들에 의해 강제로 패치가 뜯긴 젊은이들은 뜯겨진 옷에 하얀 천을 덧대어 꿰메고 펜으로 “여기 대장장이가 있었다”라고 글씨를 써 넣었다고 한다.
1983년은 동독 평화운동에 다양한 에너지가 축적되었던 해로 여겨진다. 새해 벽두부터 동독 카톨릭 교단이 공개적으로 병역거부자들을 지지하고 나섰으며, 동독 정부의 핵무기 정책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서독의 녹색당 창립멤버인 페트라 켈리(Petra Kelly)와 일군의 당원들은 동베를린 방문 중, 알렉산더 광장에서 “칼을 쳐서 보습으로” 현수막을 펼쳤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이들은 해당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에리히 호네커를 만났다가 동독 정부로부터 1년간 입국금지를 당한다.
같은 해 비텐베르크에서 상징적인 퍼포먼스가 있었다. 지역 금속공 스테판 나우(Stefan Nau)는 4,000여명의 참가자가 모인 집회에서 칼을 쳐서 쟁기로 만드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 사건은 국제 언론에 보도되었으며 동독의 평화운동에 크나큰 동력을 제공했다. 동독의 활동가들은 평화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폭력 혁명을 추동하거나 봉기를 유도하는 것 보다도 군사주의 그 자체를 무력화 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당시 동독 정부는 철저히 군사주의적이었기 때문에,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것은 당시의 체제에 저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동베를린에서 평화운동은 사실상 반체제 운동과 함께 갔다.

스테판 나우가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들고 있다. 이 퍼포먼스는 동독 내부에서는 일체 보도되지 않았으나, 해외 언론에는 대서특필 되었고 서독 방송을 몰래 보던 동독 시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전파되어 알려진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흐름은 1989년에 이르러 대중적 결실을 맺게 된다. 당시 라이프치히의 성 니콜라스 성당에서는 월요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를 모토로 하는 기도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는 곧 월요시위의 기반이 된다. 그 이후는 다들 잘 알다시피 월요시위가 확대되어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고, 1989년 말 드디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평화주의는 1989년 혁명(동독 민주화 혁명)의 가장 중요한 이념 중 하나였으며, 평화주의의 유산이 곧 대중적 운동을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 결국 독일에 평화를 가져 온 것은 군대의 무력이 아니라 평화라는 전망이었다.
평화의 개념을 되찾아야 할 때
해마다 한국은 6월이 되면 전쟁을 기념하고 전쟁에서 죽어간 이들을 영웅적으로 기린다. 특히 요즈음 처럼 남북관계가 잘 안 풀릴때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과거의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작업과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그리는 작업은 함께 가야 한다. 평화의 개념은 남북을 동시에 변화시킬 것이다. 한국은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군사주의의 망령에 빠져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평화라는 개념은 “우리 모두 총을 내려 놓고 대화로 합의에 도달하자”는 것이지 “상대방을 두들겨 없애고 내 세상으로 만들자”가 아니다. 불행히도 한국 국방부는 평화의 조건을 상대방의 절멸이라고 잘못 가르쳐 왔다. 아마도 이제까지 한반도에서 평화가 찾아오지 못했지만 독일에는 평화가 찾아온 원인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고,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
현재 독일에서는 당시 독일의 대중운동을 평화혁명(Friedliche Revolution, 또는 평화적 혁명)이라 부른다. 이데올로기나 총칼이 아닌 평화가 경계를 무너트리고 민중을 해방시킨 것이다. 나는 한국인들도 이러한 이야기를 깊이 참고했으면 한다. 북한을 어떻게 하면 없애 버릴지, 어떻게 하면 멸망시킬지를 궁리해 봤자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고(어차피 한반도 외부에서 바라볼 때 남북한 둘 다 유엔에 가입되어있는 엄연한 합법 국가들이다),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 할 수도 없다. 한국은 현실을 직시하고 오랫동안 잃어버린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평화라는 개념을 되찾을 때가 되었다. 한국은 언제나 북한을 군국주의 국가라고 비난하지만, 한국 또한 여전히 징병을 신앙처럼 받들고 전쟁을 통한 절멸이 아니면 평화가 오지 못한다고 믿는 광전사들이 넘쳐난다. 이는 발전적인 미래상이 될 수 없고, 이 사태가 지속되는 한 젊은이들은 꾸역꾸역 군대에 밀어 넣어질 것이고 무한 반복에 빠지게 된다. 평화라는 개념은 이런 교착 상태를 넘어 미래를 조망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나는 언젠가는 남북의 젊은이들이 모두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오기를 바란다.
- 메인 이미지는 1980년대 당시 동독에서 가장 강력한 시민사회운동단체였던 ‘예나 평화공동체(Friedensgemeinschaft Jena)’ 주최로 벌어진 인간 띠잇기 행사 사진이다. 한 참가자가 몸에 “평화 없이 미래 없다(Ohne Frieden Keine Zukunft)”라는 구호를 붙이고 있다. 이 글에 쓰인 대부분의 사진(필자가 직접 찍은 스티커 사진 제외)과 역사적 사실은 다음 사이트에서 참고했다. https://www.jugendopposition.de/themen/145310/schwerter-zu-pflugschar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