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동혁(병역거부자)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오는 10월이면 대체복무가 시작된다. ‘드디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사회이슈로 떠오른지 물경 20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처음 도입된 제도인 만큼 우려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 개선해야 할 사항도 여럿 보인다. 무엇보다 이 제도가 징벌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양심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기 위해 도입되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18년 6월, 헌법재판소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처벌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헌법상 보장되어 있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병역법이 개정되었고, 공론화 과정을 거쳐 대체복무제도가 도입되었다. 복무기간은 현역병의 두 배인 36개월로 확정되었으며 집단합숙 형태로 교도소/구치소 등 교정시설에 배치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판정은 대체역 심사위원회(국방부 소관)가 맡는데 6월 30일부터 활동을 시작한다.
심사과정에서 대체복무 신청자는 본인 진술서, 부모 및 주변인 진술서(3인 이상), 초중고 생활기록부 사본 등 다양한 서류를 내야 한다. ‘사람의 양심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관료사회가 이해하는 방식은 양심 형성의 중심에 가족과 학교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부모님 진술서에서 나는 오래 전 기억을 떠올렸다.
2000년으로 기억한다.
4월 30일에서 5월 1일로 이어지는 노동절 시위 때 투쟁국 스탭이았다. 안암로터리에서 시위를 하다가 붙잡혔고 구속됐다. 첫 구속이었다. 기소유예로 풀려날 때까지 대략 한 달 정도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꽤나 겁을 먹었고, 그런데다 괜히 별 일 아니라는 객기를 부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어리둥절한 한 달이었다.
하루는 검사에게 조사를 받으러 갔는데 아빠가 와 있더라. 검사가 일부러 나와 아빠를 동시에 불렀고, 아빠는 검사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고, 나는…나는 검사와 아빠가 지켜보는 앞에서 소위 형식적인 반성문을 썼다. 그때는 그게 반성문인지도 몰랐다. ‘존경하는 판사님’으로 시작해 ‘선처를 바랍니다’로 끝이나는 형식적인 반성문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냥 빨리 조사가 끝나고 구치소로 돌아가기만 바랬던 것 같다. 긴 하루, 외면하고픈 풍경들.
검사는 내내 훈계였다. ‘나도 학생 때 열심히 데모했다. 그때는 돌 던져도 사람들이 박수쳐줬다. 지금은 도대체 왜 데모를 하는거냐? 더 이상 사람들이 폭력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의견을 전달할 수 있다. 부모님 속 썩이지 말고 공부해라.’ 어차피 경미한 사안이라 실형까지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빠가 보는 앞에서 쓰인) 반성문이나 훈계는 기소유예로 풀어줄테니 데모 그만하고 정신차리고 살라는 퍼포먼스였고, 그걸 알리 없는 나는 내내 해석되지 않는 심리상태를 벗어나고픈 욕구만 간절했다.
가족에 대한 애틋함. 그런 게 내게는 별로 없었다. 아빠의 생각이나 태도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또 아빠를 탓하고 싶은 마음도 그렇다고 애틋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머리로는 아빠를 야속해하거나 애틋해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그게 보통 감정이 흘러가는 방식이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둘 사이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반성문을 요구하며 훈계하는 검사의 태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분노/저항하거나 순응하거나 하나여야 하나?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실제 내 마음은 이도저도 아니고 뭐랄까 그냥 붕 떠 있었다.
비폭력이 무저항이 아님을 알았더라면, 꼭 아빠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곳에 와서 검사에게 머리를 조아리던 아빠의 마음을 헤아렸더라면, 뻔한 답 말고 다른 답을, 답이 없다면 최소한 다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었을 것 같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뭘까? 병역거부자들에게 부모님 진술서를 요구하는 게 무용하다는 것이다. 부모님 진술서를 부탁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그건 어차피 십중팔구 자식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반성문 비슷하거나, 자식이 생각을 돌려먹기 바라는 마음에서 거부하는 반성문 비슷하게 될 것이다. 국가는 그저 가족을 매개로 한 퍼포먼스가 필요할 뿐이다.
그때 그냥 나와 전혀 다른 아빠를 그 자체로 다독여주지 못해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