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희(인권운동공간 활)

2020년 2월 27일 서울시는 서울역광장에서 서울광장, 청계광장, 광화문광장, 효자동삼거리로 이어지는 광장 도로 및 주변 인도와 종로1가 등 주요 장소에 집회금지 고시를 하며 “집회금지가 감염병의 확산을 막고 시민의 생명과 건강, 안전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밝혔다. 이날 종로구청은 오전 7시 30분부터 공무원 100명과 용역 인력 200여 명, 경찰 병력 12개 중대 등을 동원해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인근에 설치된 고 문중원 기수 대책위 농성장을 강제철거했다. 고 문중원 기수 사망 91일째 날이었다. 부정의를 고발했던 죽음은 그렇게 거리에서 치워졌다. 그리고 1년을 넘긴 지금까지 이 집회금지 고시는 한 번도 해제된 적이 없었다.

광장에서 애도 가능한 죽음

굳게 닫혀있던 광장이 다시 열렸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서울특별시장(葬)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방역을 이유로 가장 먼저 집회를 금지하고 광장을 봉쇄했던 박원순 전 시장은 자기 죽음으로 광장을 다시 열었다. 물론 그가 스스로 연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시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코로나19 시대에 광장으로의 입장이 가능했던 유일한 존재 또는 죽음이었다.

물론 지난 2월 19일 고(故)백기완 선생의 영결식도 시청광장에서 진행되었다. 평생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삶을 기리기 위해 사회장으로 치러진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투쟁하는 이들과 함께 거리에 섰던 백기완 선생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장소가 광장만큼 적절한 곳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서울시는 시민분향소를 설치할 때 청원경찰을 동원해 제지하더니 영결식도 원칙적으로 불허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서울시는 주최 측을 감염병예방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당시 방역지침은 집회 및 장례식 인원 제한이 100명 미만인데 집합금지 위반을 했다는 이유다. 그뿐만 아니라 분향소를 무단 설치했기 때문에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에 따라 변상금도 부과할 것이라 했다.

박원순 전 시장의 분향소는 가능하지만 백기완 선생의 분향소는 왜 안된다는 걸까? 그 이유에 대해서 서울시는 “박 전 시장의 장례는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러진 것으로, 행정 목적에 따라 수행됐기 때문에 사례가 다르다”며 당시에 집합금지 명령이 내려지지 않아 법적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서울시의 변명처럼 정말 박원순 전 시장의 장례는 단지 ‘행정 목적’으로 치러진 것일까?

광장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 않다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장례가 치러질 예정이라는 발표에 사람들은 비판을 목소리를 냈다. 왜냐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저지른 폭력을 면책하거나 그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를 약화하기 위해 공적 애도의 시간을 만들고, 그 시간을 위해 광장을 이용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서울시청 광장을 열고 그 공간을 채운 행위가 죽음 이후의 시간을 무엇으로 만들려고 했는가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오직 서울시장으로서의 업적을 쌓은 박원순으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공간에서 공적인 장례식 필요했다. 그래서 장례의 시간 뒤에 다시 광장은 닫혔다.

이로써 우리는 광장은 단지 방역을 이유로만 닫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광장에 입장하는 존재를 선별하거나 광장 자체를 개폐(開閉)하는 권력이 있음을 확인했다. 광장이나 거리 같은 공적 공간은 모두의 공간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의 공간이 아니다. 그래서 공적 공간은 정치적인 공간일 수밖에 없다.

안철수 서울시장 예비후보는 퀴어퍼레이드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퀴어 축제 장소는 도심 밖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겠다”고 말했다. 안철수의 발언은 성소수자 차별문제에 있어 찬성과 반대가 있을 수 있으니 각각 동등한 의견으로서 보장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다루는 것과 똑같은 태도다. 그가 말한 ‘거부’가 과연 존중받을 만할 권리일까?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안철수‘들’이 거부한 것은 단지 퀴어퍼레이드가 아니다. 성소수자가 광장에 입장하는 것, 즉 공적 공간에 등장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안철수‘들’의 말은 광장과 같은 공적 공간에 입장하는 사람을 선별해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단지 불편하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것을 ‘권리’라고 말한 것이다.

‘거부할 권리’가 존중받아야 하는 경우는 권리를 침해하는 힘에 저항할 때이다. 병역거부와 같이 양심에 반한 것을 강요받을 때, 진술거부와 같이 강압과 회유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명령 거부와 같이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에 거부함으로써 타인의 인권침해를 막기 위한 때이다. 그런데 안철수의 ‘거부할 권리’는 그 자체로 인권침해를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인권침해를 ‘권리’라고 포장함으로써 더 나쁘다. 이것은 ‘존중받을 권리’가 아니다. 이것은 존재의 삭제이고 권리의 파괴이다. 이것은 ‘폭력’이다.

이 ‘폭력’은 단지 성소수자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광장에는 가난한 사람, 해고된 노동자, 성폭력/차별에 저항하는 여성, 동정과 시혜를 거부하는 장애인, 보호라는 이름의 억압에 반대하는 청소년 등 권력에 맞선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들도 언제든지 안철수‘들’의 ‘거부할 권리’로 광장에서 공공공간에서 쫓겨날 수 있다. 시끄럽다는 이유로, 교통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서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며. 광장은 정치적이며 광장으로의 입장은 민주주의의 문제가 된다.

세상과 불화하는 사람들의 광장

안철수의 발언 며칠 후 음악교사로 다시 학교에 돌아가길 바랐던 김기홍 퀴어활동가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며칠 후 트랜스젠더 군인으로 복무하고 싶었던 변희수 하사가 세상을 떠났다. 퀴어라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지 않고 일터로 돌아가는 미래를 꿈꾸던 이들이 스스로 삶을 마쳤다. 공적 공간에 입장하는 것을 거부당하는 사람은 모든 삶의 공간에서 존재를 드러낼 수가 없다.

먼저 떠난 이들을 애도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공적 공간으로 나섰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색깔로 몸을 꾸미고 깃발과 뱃지같은 상징물을 가지고 2호선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도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았고 마음을 확인하며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2호선을 한 바퀴 돌아 시청광장에 모여 추모의 노래를 함께 듣고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지우기를 거부하는 말하기, 이들의 죽음을 잊지 않고 변화를 만들어가겠다는 다짐의 말하기, 서로의 곁을 지키고 함께 용기를 내겠다는 위로의 말하기를 이어갔다.

고 변희수 하사를 추모하며 열린 지하철 행동의 한 장면.

고 변희수 하사를 추모하며 열린 지하철 행동의 한 장면.

이들처럼 광장과 거리를 권력에 저항하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싸워온 사람들이 있다. 그곳에서 죽음을 끌어안고 삶의 투쟁을 벌였다. 광장과 거리에서의 애도는 그 죽음을 둘러싼 폭력을 고발하고 권력을 드러내는 투쟁이었다. 그 공적 애도는 존재의 상실 이후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한 시작이었다. 우리가 상실한 존재가 남긴 것은 큰 업적이 아니라 죽음으로 균열시킨 세계의 틈이었고, 광장과 거리에서 연대의 힘으로 그 틈을 벌려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분투를 벌였다. 세상과 불화했던 이들의 죽음을 살아남은 사람들이 끌어안고 여전히 세상과 불화하며 광장과 거리에 선다.

여전히 닫힌 광장과 거리는 권력에 맞서 물러서지 않는 이들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공중 보건을 이유로 집회의 권리가 어느 정도 제한이 있을 수 있지만, 삶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삭제하기 위해서 이용돼서는 안된다. 코로나19로 언택트의 시대라며 온라인 행동을 대안으로 모색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의 등장과 이들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의 힘을 그대로 대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누군가를 광장에 입장하는 것을 금지하고 허용하는 그 권력, 바로 그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광장에 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