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지 (전 디엑스이코리아 활동가)

 

비폭력이란, 뺨을 맞았을 때 다른 뺨을 내어주는 것보다는, 뺨 때린 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없는세상에서 진행한 ‘활동가의 방구석 1열’에서 디엑스이의 은영 활동가가 해준 말이다. 디엑스이는 알만한 사람들은 알만한, ‘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로 유명한 동물해방 직접행동 단체다. 디엑스이의 가치는 ‘맹렬히 비폭력적이고, 남다르게 행동하는 것’이라는데 정말 그렇다. 그 문장말고는 디엑스이를 표현할 다른 말이 있을까. 소위 동물 권리 운동에서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혹자는 궁금해 할 수도 있겠다. 왜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 기획 토크에서 동물해방 운동하는 사람과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하는 사람을 만나는 걸까. 전쟁과 동물 그리고 성소수자. 모두 몸에 관한 이야기이어서 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몸이 전쟁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 자신의 몸이 전쟁터의 경계선이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는가? 사실, 아직도 정말 어렵다. 내 몸이 전쟁터라니? 난 이렇게 잘 먹고, 잘 싸고, 잘 살고 있는데?근데 그게 권력이라면. 지금 우리가 눈을 한번 깜박이는 순간에도 셀 수없는 존재들이 폭압에 의해 죽어간다. 그러니 당신이 지금 앉아서 이 글을 보고 있는 순간도 권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신이 권력자라는 것은 아니다. 왠지 모르게 권력자라는 말은 거부감부터 드는데, 개인이 어떠한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조가 우리 몸 당신의 몸 가운데에서 숨 쉬듯 당연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평화롭게 밥을 먹고, 여행을 할 때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거나 차마 지르지도 못하며 죽어간다. 그 폭력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권력이 이 구조에 있다. 정확히는 그 폭력들을 쉬쉬하는 권력이 존재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청양의 한 돼지 사육사에 화재가 났다고 해서 예술활동가와 함께 간 적이 있다. 화재가 난지 이틀 후에 그가 기사를 보고는 정확한 장소를 알고자 연락을 했을 때 마침 일정이 맞아 급히 1일 일정으로 다녀온 것이었다. 도착한 곳의 현장은 이미 치워진 뒤였으나 아직 흔적이 남아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우리는 아기돼지의 사체들을 목격할 수 있었고, 잘려나간 엄마 돼지들의 갈비뼈와 피를 보았다. 그 몸은 정확히 전쟁 희생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그 강요된 죽음을 애도하고자 했다. 우리를 농장안으로 안내한 마을 주민은 우리가 애도하고자 온 일반인이란 걸 알고는 내 몸을 붙잡고 끌어내려고 했다. 애도하는 몸, 애도 받는 몸이 허락되지 않았다. 다만, 전쟁 피해의 몸만 있었다. 쫓아난 뒤, 우리가 다시 그 몸을 확인하고 시체라도 거두기 위해 갔을 때 그 몸들은 우리에게서 감추어졌다. 아기들은 어딘가 쓰레기통에 버려졌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떠올리자면 그렇다. 폭력을 폭력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권력이 작용한다. 경찰이 왔고, 그들은 당연히 사유지의 돼지들을 물건으로 취급하며 우리를 온건하게 비난했다. “아가씨, 그래도 저 분 사유지잖아요. 사유지에 들어가는 건 엄연히 불법이에요.”
네, 알고있지요. 법이 애도를 못하게 한다는 걸. 애도가 법에 의해 금지된다는 걸 알고 왔습니다. 말하진 않았지만, 가야한다고 판단하고는 묵념을 했다. 우리가 법을 초월하며 행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불법이어서는 아니었다. 우린 그렇게 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정한 우리에게도 죽음의 책임을 피할 권력이 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던 것이다. 경찰과 돼지의 주인은 우리의 묵념을 막지않고 지켜보았다.

방해없는 애도는 그래서 지켜내야할만큼 중요하다. 활동가의 방구석 1열에 패널로 또한 참여해주신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공동집행위원장 예정 활동가는 ‘고 변희수 하사 추모 행동’에서의 방향들을 설명해주셨다. 해당 액션을 기획하며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애도’를 제대로 하는 것에 초점을 둔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특히 그 날만큼은 애도에 어떠한 방해도 없이 참여자들이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룹 채팅을 관리하는 것 또한, 혐오세력(소위 혐세)의 침입을 최대한 빨리 솎아내는 것에 집중하셨다고. 애도의 정치란 그러한 ‘우리’의 애도를 막는 권력을 말하는데, ‘마음껏 슬퍼할 권리’도 직접행동으로서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나도 당일에 동물권 동지들과 참여했었는데, 지하철에서, 지하철을 빠져나오면서 그리고 시청 광장 앞에서의 모든 과정들이 세심하고 따뜻하게 느껴져 변하사님 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애도하는 마음이 쏟아지지 않게 잘 품고 있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몸들의, 동물들의 전쟁을 전쟁이라고조차 부르지 않는 사회에 산다. 사실 그것부터가 폭력이다. 비폭력이란 가해하는 권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인데, 여기서 그의 눈은 어디일까. 저 높은 빌딩들 사이 어딘가 있는 것? 국회의사당에 있는 양복에 있는가?

멀리 있는 것들에 대해 나는 자주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 답을 가깝게는 내 집에서 찾는다. 식탁 위에, 내 신발장 안에, 내 화장대 위에, 욕실 욕조 위에. 가해가 있다. ‘몸’을 갈아 만든 음식, ‘몸’의 즙을 짜서 만든 비누. 홀로코스트다. 유대인의 몸으로 비누와 가죽 가방을 만든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전쟁이 끝났다고 믿는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전쟁은 더 일상으로 침투하여 우리 자본주의 땅에서 우리와 사이좋은 친구인 척 숨쉬고 있다.

그래서 디엑스이코리아는, 동물해방을 외치러 일상으로 가나보다. 그리고 그 눈을 똑바로 보려고 외치고 사랑과 분노로 노래를 부른다. 애도를 가로막으려는 법에게 한 방먹이기도 한다.

비로소 나는 디엑스이와 함께 일상 속 권력의 눈을 보며 물을 수 있다.

당신의 음식은 전쟁의 희생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