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2023년 여름, 미국 뉴욕에 위치한 국립 9.11 기념관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기념관 앞에는 정사각형의 넓은 공간이 있었다. 사방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중앙의 네모난 구멍으로 흘렀다.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 ‘그라운드제로’다. 기념관 안에 들어가면 9월 11일의 참사를 담은 사진들, 빌딩의 잔해 일부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때 빌딩의 일부였던 콘크리트 벽에는 그날 희생된 사람들과 소방관들의 사진과 그들을 기리는 메시지들이 붙어 있었다. 사진 촬영이 금지된 한 전시관에는 전화기가 놓여 있었고, 그걸 통해 빌딩에 충돌하기 전 탑승객들이 가족에게 전화를 하는 절박하고도 체념한 듯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투박한 장치들은, 그때 그곳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도 ‘상상’할 수 있게 만들려고 애썼다. 참사 수습에 고군분투하는 시민과 군인들, 미국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 그리고 테러리스트를 향한 복수의 다짐. 기념관의 끝에 다다를 쯤, 오사마 빈라덴이 은신해 있던 안전가옥의 벽돌 하나가 전시된 모습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그 모든 희망과 복수를 향한 열정이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는 듯이, 적장의 목을 대신한 건물의 잔해가 놓여 있었다.
여길 둘러보는 시기에는 이 이상의 생각을 하진 않았다. 워싱턴에서 내셔널 몰(National Mall)과 미국사 박물관을 둘러보고 온 후라 미국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그리고 또 그 가치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들, ‘기억의 문화’에 꽤 압도당해 있는 상태였다. 국가적 참사를 기억하는 저마다의 방법이 있지만, 미국은 어딘가 더 엄숙하고, 경건하고, 더 종교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국가의 기억이 된다는 것은 늘 어느 한 편에서는 망각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기념관이 기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존 다우어의 <전쟁의 문화>는 여기에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왜 어떤 것은 국가의 기억이 되지 못했는가?
세 가지 유비: 진주만/히로시마/9.11/이라크
1941년 12월 일본의 전쟁 선택처럼 이라크자유작전은 군사적으로 전술적 승리이자 전략적 참사였다. 양쪽 경우 모두 최고위 정책결정자들은 적의 심리와 대처 능력을 과소평가했고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분쟁에 뛰어들었다. 권력 핵심부 내 이성적인 사람들은 우려와 의심을 강력히 표명하는 데 소심했고, 확신을 갖고 용기 있게 행동하기보다는 권위에 충성했으며, 재빨리 손을 들어 주거나 갑작스레 주변으로 밀려났다. 최고위층에서는 이데올로기, 감정, 희망적 사고가 합리성을 밀어냈고, 일단 전쟁 기계가 실제로 굴러가기 시작하자 비판은 패배주의와 도덕적 나약함, 심지어 반역의 기미가 엿보인다는 오명을 썼다. 이는 도쿄에서 일어난 사실이었으며, 60년 뒤 워싱턴에서도 역시 그랬다. (174)
저자는 3부에 걸쳐 세 가지의 유비를 제시한다. 1부에서는 진주만 기습을 단행한 일본과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 그리고 진주만과 9.11을 나란히 놓는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미국에게는 커다란 “오욕”이었다. 영화 <미드웨이>의 장면들처럼 어느 날 갑자기 박살난 미군의 함정과 희생당한 군인의 모습은 가히 비극이었다. 불타는 쌍둥이빌딩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는 왜 사전에 참사를 막을 수 없었는지, 왜 기습을 허용했는지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정부에서도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졌고, 한결 같이 당국의 정보 실패와 관료제에 의한 구조적 실패를 원인으로 꼽았다. 정황 자체가 충분히 미국에 위협적이고 안보 관련자들도 이전부터 행정부에 지속적으로 경고 메시지를 보냈음에도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 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적에 대한 인종적 오만이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만들었다. “쪼끄만 노란 개자식들”이 그런 공격을 해낼 리 없다는 확신이 진주만을 허용했고, 60년 뒤에는 “하찮은 테러리스트”가 “복잡하고도 창의적인 공격”을 감행할 리 없다는 동일한 확신이 9.11을 허용했다.
이러한 미국의 인종주의는 ‘망각’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반복됐다. 2부에서는 히로시마와 9.11을 유비한다. ‘그라운드 제로’는 원래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폭심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9.11 이후 이 용어는 완전히 전용됐고, 미국 자신의 폭력과 연결되는 모든 시선을 차단하는 벽이 됐다. 다우어는 미국의 원폭 투하와 융단폭격이 정확히 민간인을 겨냥한 “테러”였음을 상기시킨다. “노동자들을 죽이는 것도 병사들을 죽이는 것만큼 정당화할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모두가 전투원이라고 주장하기는 너무도 쉬웠다.”(261) 그럼에도 미국은 스스로를 “테러리스트와 무고한 민간인을 구별”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것을 구분하지 않는 저 순전한 ‘테러’에 대한 전쟁은 정당하고 정의로운 것이었다. 미국이 만든 ‘그라운드 제로’는 잊히고, 자신들이 당한 ‘그라운드 제로’만을 기억했다.
망각은 곧 선택적인 기억을 의미했다. 3부에서는 점령기 일본과 이라크를 유비한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침공과 그 결과의 모델로 점령기 일본의 ‘성공’을 반복적으로 상상했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라는 거짓 명분을 들먹이며 이라크를 공격했고,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다. “사담이 몰락하자마자 그들은 말했죠. 이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수 있을 거라고요. 무슨 마법처럼 말이죠.”(496) 하지만 그런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해방 정권이 세워지기는커녕, 사담 후세인 정권의 몰락 이후 극심한 내전은 나중에 ‘이슬람국가’(IS)가 등장하는 토양이 되었다. 일본과 이라크는 너무 다른 사회였다. 서구 열강의 인위적인 분할, 중동에 대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오랜 개입과 전쟁, 그리고 불안정한 정치와 권위주의 체제 속 약한 시민사회 등 이라크는 일본과 다른 조건에 처해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그런 맥락을 무시하고 자신의 지정학적 설계에 맞게 그 나라에 새로운 질서를 이식하려고 했다. 맥락은 중요하지 않았다. 미국은 9.11 이후 “역사는 오늘 시작된다”고 선언했다. 어제는 고려할 가치가 없었다.
전쟁의 문화
두꺼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것이 일종의 ‘예언’과 같다고 생각했다. <전쟁의 문화>가 처음 출간된 것은 2010년이다. 지금 중동에서는 팔레스타인에서, 이란에서 똑같은 역사가 반복 중이다. 누군가는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개인적인 야망으로, 누군가는 합리적인 전략전술의 소산으로 파악한다. 물론 모두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군사적 개입으로 단칼에 해결하려고 할까? 왜 ‘테러리스트’들, 그리고 그 수뇌부들만 제거하면 알아서 자유가 찾아올 것이라고 여기는가? 왜 같은 과오, 같은 오욕이 반복되는가? 다우어는 ‘전쟁의 문화’에 주목한다. 특정 민족이나 문명의 속성이 아니라, 전쟁 상황 자체가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인식의 패턴이다. 적에 대한 인종적인 과소평가와 오만, 증거가 아닌 믿음 기반의 사고, 자국 폭력의 망각과 타자의 폭력에 대한 비난, 선택적인 역사 호출, 선과 악의 이분법,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과 폭력의 역사가 그 역사적 맥락에서 하나의 ‘코드’로 굳어지고 새로운 악에 대한 새로운 전쟁의 정당화로 이용되는 것이다.
물론 코드화되고 이분법적인 전쟁의 논리에 대한 설명은 새롭지는 않다. 또한 미국의 ‘내로남불’ 또한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이 서평은 미국을 중심으로 썼지만, 단지 미국을 비난하고 상대방을 선의의 편으로 추켜세우는 것이 아니다. 일본과 중동의 무장단체들 또한 똑같이 종교적이고 환상적인 언어로, 해방과 복수를 읊조리는 ‘전쟁의 문화’가 싸움을 초래했다. 물론 이렇게만 말하면 진주만/히로시마/9.11/이라크라는 사건과 장소에 더 디테일하지만 중요한 차이들은 소거되기 쉽다. 그저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쉽게 ‘전쟁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체념으로 빠지기도 쉽다. 저자는 그걸 의식하듯 끊임없이 ‘같지 않다’라고 말하지만, 역사를 유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간결하고 인상적이면서도 오류에 빠지기 쉬운 방식이다. 그럼에도 “경제적 동기들과 더불어 비경제적 동기들, 합리적 행위와 더불어 비합리적 행위가 미치는 영향을 인식해야 한다”(630)고 말하는 저자의 제안처럼, 전쟁을 추동하고 지속시키며 반복하게 만드는 데에는 어떤 ‘문화’들이 존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덧붙여서 그때에는 아직 없었기 때문에 저자가 쓰지 못한 또 하나의 유비를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긴 장에 걸쳐서 원자폭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인상 깊었던 부분은 원자폭탄 제작에 협력한 과학자들의 ‘열정’에 대한 설명이었다.
원자폭탄에 관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 미학의 이 대단한 나르시시즘은 거의 숨 막힐 듯하다. 부수고, 날리고, 불태워 나를 새롭게 만든다. 사실 그때 그는 말 그대로 부수고, 날려 버리고, 불태우는 기술을 선진화함으로써 그 자신이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고 상상했다.(396)
어제의 전쟁에 원자폭탄과 테러가 있었다면, 지금의 전쟁은 AI와 드론이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가공할 위력을 보여준 기술은, 팔레스타인을 실험실 삼아 검증되고 세계 이곳저곳에 팔렸다. 미국 정부는 군사AI 기술에 어마어마한 투자를 하고 있다. 국방AI 기업인 ‘팔란티어’와 ‘안두릴’은 각각 <반지의 제왕>에서 모든 것을 감시하는 수정구인 ‘팔란티르’와 악의 세력 사우론을 물리치는 검 ‘안두릴’에서 따왔다. 이들을 지원하는 투자자인 피터 틸은 마치 그동안 미국의 ‘오욕’이 ‘관료제적 구조’에서 왔다는 평가를 의식하기라도 한 듯 관료제는 물론 기술 발전을 가로막는 민주적 절차를 깨부수자고 말했다. 그들은 단지 경제적 이익이 있기 때문에 군사 AI를 개발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거대악 ‘사우론’에 맞서는 반지원정대와 같은 모습으로 자신들을 상상한다. “우리는 이제 제국이며, 우리가 행동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실을 창조한다.”(225)
전쟁의 문화는 국가 권력에 너무 뿌리 깊게 내려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존 다우어가 책을 쓴 시기와 지금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적어도 허울뿐인 자유와 해방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조차 없다는 점이다. 전쟁의 문화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대비하며, 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는 “상상력”을 빈약하게 만든다. 국제규범을 근거로 이스라엘을 비판하면 코웃음치며 ‘세상물정 모른다’라고 치부하는 때에, 어떻게 평화의 상상력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세상은 단순하지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지만, 적어도 지금의 보편 규범과 권리의 언어는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은 이들이 다른 세계를 만들어 보려고 분투하면서 만들어졌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 최소한의 것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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