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빈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영화가 시작되고, 화면을 메우는 것은 반가운 얼굴들이다. 뉴스에서 봤던, 책에서 읽었던, 현장에서 만나곤 했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있는 얼굴들. 그러나 스크린 속 그들은 내가 아는 모습보다 훨씬 앳되다. 조금 더 비장하고, 그래서 조금 더 취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난 5월 9일, 세계 병역거부의 날(5월 15일)을 기념해 전쟁없는세상과 한베평화재단 그리고 서울인권영화제가 공동 주최한 상영회에서 만난 영화,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금기에 도전>의 이야기다. 영화는 2000년대 초반부터 2018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대체복무제가 시행되기까지, 총을 들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걸어온 20여 년의 세월을 기록한다.

 

2004년 전쟁없는세상 사무실 개소식 때, 활동가들과 병역거부자를 찍고 있는 김환태 감독(왼쪽)

2004년 전쟁없는세상 사무실 개소식 때, 활동가들과 병역거부자를 찍고 있는 김환태 감독(왼쪽)


병역거부가 지금보다 훨씬 낯설고 위험하게 들리던 시절, 군대에 가지 않기로 한 이들의 이유는 다양했다. 종교적 신념으로 병역을 거부한 것은 여호와의 증인만이 아니었다. 생명 존중과 평화 추구가 곧 자신의 믿음이기에 입대를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을 목격하며 한국 정부의 파병에 반대해 군 복무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병역거부를 선언한 젊은이들을 흔들림 없는 영웅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젊은 그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낯설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서툴기도 하고, 긴장하고 힘겨워하기도 한다. 영화는 그 취약함들을 지우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그 흔들림은 그들의 용기를 더 깊이, 더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건강하게 돌아올 것”을 다짐하며 감옥으로 향하는 뒷모습, 자신의 선택이 부모님에게 남긴 상처를 떠올리며 흘리는 눈물, 수감 생활이 끝난 지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감옥에 있는 꿈을 꾼다는 고백, 그리고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그럼 나라는 누가 지키냐?”는 거친 고함까지. 영화는 병역거부 운동의 파고를 따라가며 총을 들지 않은 사람들이 감내해야 했던 어려움과 외로움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그렇기에 영화가 기록한 시간을 충실히 따라온 끝에 마주하는 2018년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대체복무제 도입은, 설령 병역거부에 편견을 가졌던 이들에게도 감동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부침을 겪고, 흔들리면서도 계속 고민하며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묵묵히 걸어온 사람들의 여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쟁없는세상이 주최한 상영회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건, 특별한 경험이었다. 조금 더 나이 들고, 그만큼 더 다정해진 모습으로 행사장을 지키는 그들의 모습까지가 내게는 이 영화와 이번 상영회의 완성처럼 느껴졌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지난 기록의 주인공일 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질문들을 붙들고 우리 옆에서 함께 씨름하는 동료들이기 때문이다.

이어진 GV에서는 영화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 오리와, 지난 2월 완전병역거부를 선언한 한베평화재단 활동가 두부가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18년의 운동사를 돌아본 영화에 이어, 대체복무제 도입 이후에도 남아 있는 병역거부의 질문들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2018년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대체복무제 도입은 병역거부 운동의 중요한 성취였다. 그러나 총을 들지 않을 권리가 인정되었다고 해서 전쟁 준비 체제에 협조하지 않을 권리까지 온전히 확보된 것은 아니다. 현행 대체복무제는 36개월 교정시설 합숙이라는 형태로, 복무 기간과 방식, 심사 구조 면에서 여전히 징벌적 성격을 지닌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군 복무뿐 아니라 현행 대체복무제까지 거부하며 전쟁과 군사주의의 구조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완전병역거부 선언은, 여전히 남겨진 질문들을 마주하게 했다.

한편, 오리의 이야기는 또 다른 지평을 연다. 우리 사회의 징병 대상이 남성이기에, 입영통지서를 받고 감옥에 가야 했던 남성들의 경험은 병역거부 운동의 핵심에 있었다. 그러나 전쟁과 군사주의는 병역의무를 부과받은 이들에게만 작동하는 구조일 수 없다. 여성으로서 운동의 당사자성을 고민하면서 함께해 온 시간, 그리고 무기거래감시 캠페인으로 활동을 확장해 온 오리의 여정은 군사주의와 평화의 문제가 젠더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묻는 과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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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의 대화에서 이야기를 하는 전쟁없는세상 오리 활동가. 어떻게 긴 세월을 활동을 이어올 수 있냐는 질문에 “함께 돌아볼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만드는 게 중요했고, 번아웃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어떻게 쉬어야할지를 찾을 수 있도록 서로 북돋아줬다”고 대답했다.


한동안 만나는 활동가들에게 마다 “어떻게, 어떤 힘으로 계속 활동할 수 있는지?” 묻고 다닌 적이 있다. 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또 다른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 한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전쟁에 맞서야 한다는 것, 매일 애쓰고 있는데도 세상은 점점 나빠지기만 하는 것 같다는 감각. 그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때마다 떠오르던 질문이었다.

영화가,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이어진 대화가 증언하는 것 역시 운동의 시간이 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운동 역시 사람을 소진시키고,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뒷걸음치는 것만 같을 때도 있다. 그러나 같이 걸어온 시간을 함께 돌아볼 수 있다는 것, 함께 이룬 성취 위에서 그다음을 다시 고민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지난 시절 그때그때 우리의 모습에 쑥스러워할 수 있다는 것은 병역거부 운동이 남겨온 아주 귀한 흔적이라고 느낀다.

상영회가 끝나고 남은 것은 이처럼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다양한 감각이었다. 운동을 시작하고 지켜온 이들을 향한 고마움,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어려움과 외로움 위에 우리가 서 있다는 부채감, 우리 곁에 이렇게 멋진 동료들이 있다는 든든함,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질문에 함께 응답해야 한다는 책임감까지. 그래서 결국 내 안에 남은 것은 다시 그 얼굴들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