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전쟁없는세상 비폭력프로그램 담당 사무국 활동가)
2012년 3월 초, 전쟁없는세상은 캠페인전략세우기 트레이닝을 진행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이명박 정부가 대체복무제 도입 약속을 폐기하고 병역거부운동 전체가 계속 멘붕 속에서 3년 넘게 침체기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틀을 꽉 채워 진행했던 이 트레이닝에서 우리는 MAP(Movement Action Plan)이라는 전략모델을 활용하였는데 이 이론은 사회운동의 진행과정을 여덟단계의 시기로 나누어 사회운동가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재의 운동과 연결시켜 가장 효과적인 전술과 전략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지금은 폐간한 전쟁없는세상의 계간지 <전쟁없는세상> 33호에 성민이 소개한 참가후기를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전쟁없는세상은 그 트레이닝 이후 사회운동을 더 큰 그림에서 볼 수 있었고 좌절감이나 허탈함과 같은 부정적 감정에서 어느 정도 탈출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아무튼 그 이후 우리는 이러한 사회운동 방법론에 관한 트레이닝이 한국의 사회운동에 많이 전파, 보급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비폭력프로그램’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전쟁없는세상의 주요 활동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후 3년 간 <비폭력 캠페인을 위한 안내서> 등의 자료발간, 매년 초심자를 위한 비폭력 트레이닝을 개최하는 등 활동을 꾸준히 지속해왔다. 비폭력 트레이닝이라든가 사회운동론 등의 주제가 익숙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 활동은 주로 ‘우리는 이런 것을 한다’고 알리는 것에 중점을 두었지만 한편으론 몇 년전 전쟁없는세상처럼 각자의 캠페인이 난관에 봉착한 조직이나 사회운동에 관한 교육이 필요한 단체에서 우리를 찾아준다면 보다 효과적인 트레이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러다 드뎌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행성인)와 성소수자부모모임을 만나게 되었다.
동인련에서 행성인으로 변신을 꾀하면서 이 멋진 단체는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단체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터였다. 특히 행성인이 인큐베이팅 하고 있는 성소수자부모모임은 활동을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았고 모임에 참여하는 부모님들은 사회운동의 경험이 없으시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마침 작년 초심자를 위한 비폭력 트레이닝에 참가했던 행성인 사무국장 나라님의 추천으로 우리와 연결이 될 수 있었다. 이후 트레이너 네트워크의 숲이아, 아침, 행성인, 부모모임의 활동가들과 3차례 정도의 사전 미팅을 하면서 4월 초, 총 2주 동안 <캠페인 전략 세우기>와 <민주적으로 함께 활동하기> 트레이닝을 진행하기로 하고 실제 트레이닝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조율해가기 시작하였다.
첫주 트레이닝에서는 먼저 사회운동의 여덟 단계와 활동가의 네가지 유형에 대해 소개하고 이후 연습활동으로 나는 어떤 유형의 활동가인가를 알아보았다. 이 활동은 단체 내, 외부 활동가들의 성향을 이해하게 하고 최선의 협력방법을 모색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각 모둠끼리의 논의가 끝나고는 디브리핑 시간을 통해 각자 모둠에서 나온 얘기들을 나누고 하고 싶은 얘기들을 덧붙였다. 쉬는 시간 후 이어진 연습 활동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행성인의 활동목표 중 하나를 사회운동의 여덟 단계에 대비시켜 논의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2016 행성인이나 부모모임 활동가들 중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 좀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이 활동을 사회운동의 각 단계에 맞춰 정리, 평가해보고 이 캠페인이 전체 운동의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를 판단해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우리가 진단한 그 단계에서 그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전략을 논의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시간 관계상 우리편찾기 연습활동을 소개하는 것으로 활동을 마무리 하였다. 이 활동은 사회운동의 궁극적 목표인 사람들의 마음(의견)을 어떻게 하면 전략적, 효과적으로 우리 편으로 끌어올 것인가에 관한 툴이다. 대중은 한덩어리가 아니기 때문에 알린다, 설득한다 등의 전략만으론 실패하기가 쉬운데 우리 운동이 곧잘 간과하는 분야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는 미래 상상하기라는 연습활동을 진행하면서 트렌스젠더 의료보장이라는 행성인의 활동목표 중 하나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들을 살펴보았다. 트렌스젠더 의료보장이 2025년 달성된다는 가정 하에 지난 10년간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아이디어스토밍을 한 후 이 조건들이 과연 트렌스젠더 의료보장을위해 충분한 조건인지, 필요한 조건인지, 영향력 있는 조건인지 혹은 관계가 있으나 무시될 수 있는 조건인지 아니면 아예 관계가 없는 조건인지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았다. 이 연습활동이 훌륭한 이유는 일단 우리 운동의 어떤 목표를 쟁취했다는 것을 가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참가자들을 임파워하고 기분을 좋게 만들어 창의력을 북돋는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회운동의 목표가 달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장기적이고 종합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어떤 구체적 캠페인을 막 시작한 그룹이나 단체에 추천하고 싶은 툴이다.
둘째주에는 사업에서 우리 내부 조직으로 방향으로 돌려 함께 활동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갈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와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으로 트레이닝을 진행하였다. 갈등 트레이닝에서는 갈등삼각형 툴을 이용해 어떻게 하면 서로가 모두 만족스러운 갈등해결을 할 수 있을까를 알아보았다. 입장의 차이를 넘어 서로의 이해관계를 파악하고 그 깊숙히 숨어 있는 욕구를 꺼내어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보는 것이다. 과거 자신이 갈등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방법이 그 갈등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어떤 방법은 도움이 되지 않았는지를 살펴보고 실제 있을법한 갈등상황을 시나리오로 이 갈등을 행성인에서 집단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관해 소그룹 활동도 해 보았다.
갈등이 보다 개인적인 부분에 집중한다면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은 집단적인 결정에 관한 트레이닝이다.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은 전쟁없는세상의 정관에 명시된 의사결정의 원칙이지만 사실 기존 찬성 아니면 반대 식의 의견표명에 익숙한 우리에게도 이 방식이 아주 익숙한 것은 아니다.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은 기본적으로 찬성, 반대의 2가지가 아니라 ① 안건에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저지 ② 지지하지 않지만, 막진 않을 테니 나 빼고 해라는 묵인 ③ 다소 우려되는 점이 있지만 받아들이겠다는 수용 ④ 안건을 지지하고 거리낌없이 실행하겠다는 동의, 이 4가지를 기본 입장으로 한다. 100명이 찬성해도 단 한명이라도 저지 의사를 밝힌다면 그 안건을 통과시킬 수 없다는 의사결정 과정의 특성상 소수의견이 반영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특히 저지와 묵인이 기존 찬반에서 반대쪽 입장으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때 둘을 많이 헷갈려 한다는 것, 동의가 적고 묵인이나 수용이 많이 나오면 저지 입장이 없다 하더라도 그 안건이 힘을 받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 원칙을 가져가는 단체들에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행성인에서 논의된 적이 있던 어떤 안건을 가지고 합의에 의해 의사결정을 하는 연습을 해보았는데 이 날은 트레이닝은 이후 바로 부모모임의 회의가 예정되어 있어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연습 활동을 해보진 못해 아쉬웠다.
행성인과의 2주는 참 여러 가지 면에서 영감을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잘 몰랐던 행성인의 활동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는 영광을 누렸고 전쟁없는세상의 비폭력프로그램 활동가로서 나의, 우리 프로그램의 어떤 점이 부족하고 어떤 측면에서 더 보강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수 있게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만약 이 글을 읽으시는 누군가가 사회운동에 관해 여러 가지고 궁금하시거나 본인이 진행하시는 캠페인이 어떤 난관에 부딪혔다거나 특정한 직접행동을 계획 중이시라면 그 고민과 계획을 전쟁없는세상과 함께 풀어보시면 어떨까 조심스레 제안드려보고 싶다. 제안을 수용하실 분은 여기를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