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쭝(활동가)

 

 

처음 평화캠프 공지를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열심히 공부해서 더 나은 활동가가 되어야지!!!’ …가 아니라 사실은 이런 거였다.

‘3박4일에 5만원? 완전 가성비 끝판왕이구나!’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님들, 죄송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떠오른 생각. ‘근데… 3박4일은 너무 긴 거 아니야?’ 그렇게 좀 망설이던 차에 눈에 들어온 결정적 카피. “의기소침과 좌절에 빠진 전쟁없는세상이 운동의 전망을 계획하고 활동가들 각자가 스스로의 역할을 찾게 되었다는 그 전설의 프로그램” …이게 가능해? 진짜로?

이렇게 여러 가지 기대와 욕심, 호기심으로 신청한 평화캠프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성비 끝판왕이 맞았다. 단언컨대, 5만원이 아니라 50만원이라고 해도 아깝지 않을 퀄리티였다.

3박4일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고 즐거웠고(한 1주일 했으면 좋겠다), 새로 배우거나 다시 확인한 점도 많았고(어떤 운동도 해낼 것 같은 근자감이 생긴다), 무엇보다 함께 지낸 30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소중하고 고마웠다(좀 비현실적인 결말이지만 진짜다).

안 다녀오신 분들에게 이 은혜를 나누기 위해, 좀더 본격적으로 자랑질을 해보자면…

 

신난다 : 미리 맛보는 승리의 아드레날린

예전부터 불만이었다. 비영리단체 대상의 교육과 강의가 조직 운영과 모금 분야에 집중된다는 점, 또한 대부분 외부의 전문가가 교육을 진행한다는 점에 대해서 말이다. 마치, 사업전략 수립과 기획, 평가에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사회운동은 전문적이지 않은 것처럼.

세상은 진정성과 노력만으로 바뀔 수 없다. 사회 변화가 그렇게 쉬울 수는 없고, 쉬워서도 안 된다. 운동은 고도의 과학적인 전략이어야 한다. 훈련과 연구, 방법론들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전파되고 누적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사회운동론을 공부하는 이런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시도 자체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렇다고 의미만 있는 시도에 그친 게 아니라 내용이 알찼다. 운동의 단계, 활동가의 역할, 타겟(우리 편)을 분석하면서 사업전략과 계획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또한 각각의 단계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전망하고 그에 맞는 활동도 구상해볼 수도 있었다. 전략 수립과 실제 액션까지 훑고 나니, 3박4일 동안 한 1년 어치는 더 똑똑해진 기분이다.

내용과 함께 형식도 새로웠다. 참여형∙토론형 워크숍이 방향은 맞지만 좀 귀찮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평화캠프에서는 움직이고 그리고 연기까지 하는 등 참여의 강도는 훨씬 센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너지와 아드레날린이 은총처럼 내려왔다.

이 중에서 가장 신나고 즐거웠던 것은 전략적 미래를 그리기 위한 타임머신. 대체복무제가 도입된 미래로 날아간 뒤, 그 동안 벌어진 일을 기억(?)하며 타임라인을 만드는 방식이다.

참가자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미래 그리기' 워크숍

참가자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미래 그리기’ 워크숍

현실의 수많은 제약조건들을 전제로 그린 미래는 늘 멀게만 느껴지고 심지어 암울하기까지 했는데, 타임머신을 타보니 현실을 뛰어넘어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대체복무제는 내 운동과제도 아닌데) 승리의 그 날을 맞으니 한껏 기쁨에 취했고, 이를 위한 개고생과 우여곡절의 날을 생각하면서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해피엔딩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편안하다 : 이 곳에서는 아무도 서로를 해치지 않아.

이렇게 보면 굉장히 빡센 프로그램 같고 그게 실제로 빡세긴 한데, 동시에 편안한 휴가 같은 나날이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 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워크숍이 느슨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채식으로 만든 식사도 놀랍도록 맛났다. (멸치 없이도 이런 육수가 가능하구나.)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평화캠프가 평화로웠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서로의 다양성이 존중됐다는 점 아닐까?

평화캠프 참가자들은 영역과 활동방식을 규정하기 힘든 1인 활동가∙아티스트, 전통적인 형태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다른 비영리단체를 지원하는 재단 활동가, 공익 활동에 관심있는 사람 등등이었다. 활동 방식도 다르고 이슈에 대한 입장과 이해도 조금씩 달랐지만, 놀랍게도 이 모든 사람들이 사이좋게 지냈다.

사실 나는 몹시 사람을 가리는 편이고 특히 초면의 사람들 앞에선 일단 쫀다.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도 가리고, 가치관에 동의하지만 (내 기준에) 너무 까칠하고 비타협적인 사람들도 조금 가린다. 그러나 평화캠프에서는 빠른 속도로 경계를 해제하고 경망스러운 본성을 드러낼 수 있었다.

워크숍은 물론 밤 늦게까지 계속된 술자리, 일명 ‘피스바’에서도 비영리 조직문화, 활동가, 젠더 등 다양한 이슈가 이어졌는데, 모든 대화가 말 그대로 피스피스했다. 솔직하게 의견을 이야기하면서도 서로를 공격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체복무제를 잘 몰랐던 참가자가 병역거부자와 술잔을 기울이다가 “그런 의미라면 병역거부에 찬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 기적도 목격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평화캠프는 바깥 세상과는 떨어진 공동체 같은 느낌을 주었다. 스스로 정한 이름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각자 해줄 수 있는 일(마사지∙노래∙커피∙실뜨기 등)을 정해서 나누는 공동체,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이 차별 없이 살아가는 공동체.

활동 공간도, 활동 방식도, 정체성이나 삶의 방식도 각자 다른 이들이 모였는데 놀랍게도 편안했다.

활동 공간도, 활동 방식도, 정체성이나 삶의 방식도 각자 다른 이들이 모였는데 놀랍게도 편안했다.

쫌 아쉽다 : 멋진 내일은 아직 ‘나중에’… 하지만 ‘지금 당장’ 시작해야지

이렇게 길게 평화캠프를 칭찬했지만, 아쉬운 점도 좀 있다. 평화캠프의 문제라기보다는 캠프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생기는 아쉬움, 바로 현실과의 차이에서 나오는 문제들이다.

한 가지는 프로그램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시간∙공간적 차이들이다. 평화캠프에서 배운 빌 모이어의 사회운동론은 1980년대 미국에서 나왔다. 그런데 나는 2017년 한국을 살고 있다. 물론 당시 이론이 꽤 정교해서 지금도 들어맞는 부분이 많지만, 한국의 비영리단체에 맞는 방법론과 사례 연구를 위해서는 더 많은 추가 연구와 개발이 필요해 보인다.

그보다 크고 어려운 부분은 바로 내 현실과의 차이다. 사무실 복귀한 날, 내내 마음이 찌뿌둥했다. 늘상 있는 휴가 후유증이 아니었다. 회의를 하거나 사업 자료를 보다가 문득문득 마주치는 이 감정은 일종의 그리움이었다. 과학적이고 전략적인 운동방식과 이를 위한 논의 과정이 그리웠고, 해피엔딩을 향한 에너지가 그리웠고, 내가 떠나온 공동체도 그리웠다.

그러나 비관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지금의 아쉬움을 극복할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진취적인 캐릭터가 아닌데… 아마도 평화캠프에서 맞은 ‘운동뽕’이 강력해서 그런 것 같다.

찾으려고 들면 ‘지금 당장’ 아쉬운 점은 수없이 많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수없이 많다. ‘나중에’ 오는 새로운 미래는 언제나 ‘지금 당장’의 행동에서 시작된다. 이번 평화캠프의 슬로건 <‘나중에’ 시대에 ‘지금 당장’ 행동하기>가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당장 새로운 사회운동론을 더 공부하고 고민해봐야지. 지금 당장 여러 운동에 참여하고 더 연대해야지. 쉬엄쉬엄 가더라도 멈추지 말아야지. 이 모든 과정에서 “다시 만나자. 자주 만나자”고 다짐하면서 헤어진 새롭게 만난 평화캠프 ‘동지’들이 나의 비빌 언덕이 되어줄 것이다.

평화캠프도 내 운동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