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참여연대 간사)
지난해부터 우리사회 남성(성)의 문제점을 공론화하는 방식으로 메갈리아의 구성원들이 활용한 ‘미러링’이라는 도발적인 전략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에 대한 남성 커뮤니티의 반발이 거세었는데, 현실 사회에서 발생한 여성혐오 범죄와 여성들의 집단적인 문제제기에 맞물려 그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장애인 등 과거에는 객체이자 대상이기만 했던 이들이 점차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에 따른 권리의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나는 것일까. 점점 더 많은 남성들이 역차별 주장에 호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남성들이 느끼는 그 피해의식과 두려움은 근거가 있는 것인가. 사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여러 사회지표들을 살펴본다면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더 고달픈 일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지만, 다수의 남성들은 자신들이 성별에 따른 차별을 받고 있다고 아우성들이다. 이 책 『그런 남자는 없다』 곳곳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처럼 한국사회의 과잉남성성은 남성세계 내 위계성을 강화시키며 그에 복종해야 하는 각 구성원들에게 그 세계에서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인격의 박탈에 따른 상실감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차별적으로 배분되는 사회적 자원(여성도 여기에 포함된다)에 따른 불만도 점점 더 심화시킨다. 그럼에도 그 궁극적인 원인은 모른(척 한) 채, 자신들의 박탈감과 억눌린 감정을 여성을 비롯한 여느 소수자에게 전가하는 이상한 현상이 바로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의 남성들에게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남성성을 더욱 주의 깊게 살펴봐야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한국사회 남성성을 본격적으로 파해친 책 <그런 남자는 없다> 표지
남성도 남성을 모른다
사실은 ‘남성성’이라는 개념도 사회적으로 구성된 젠더의 형태일진대, 사회적 관계와 구조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존재/역할모델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성찰하고 이해하는 것은 본인들이 처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사회의 남성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정체성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이 책의 마지막 장 「Digital Masculinity」에서 최태섭은 오늘날 한국의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서 놀랄 만큼 모른다.”고 썼지만, 나는 이에 덧붙여 한국의 남성들은 여성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남성 자신 대해서도 놀랄 만큼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들어가는 말」에서 허윤이 언급한 대로, 그동안 남성성은 생물학적 남성만이 발현할 수 있는 진짜real의, 자연스러운 속성으로 가정되어 왔다. 남성 이성애중심주의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관계를 맺는 방식을 통제하는 지배적인 시각이었고, 따라서 남성성은 정체성이 아니라 보편성, 일반성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했다.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장애인 등 소수자들은 자신들이 배제되어 온 사회적 삶을 몸소 체험하면서, 보다 섬세한 눈과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제각기 삶의 전략을 구성해왔지만, 남성들은 스스로 누구인지, 이 사회 속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다른 사회적 존재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는지조차 제대로 성찰할 기회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김영희의 글 「‘남성’의 불안과 우울을 대리하는 ‘여성의 죄」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미 전통사회에서부터 개별 남성주체는 남성세계에 편입되고 승인받기 위해 그것이 요구하는 틀대로 자신을 맞춰야만했으며, 동시에 여성을 신체적·성적으로 지배해야한다는 강박에도 놓여있었다. 그러한 강박과 모순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신경증은 남성들이 여성을 타자화하고, 책임을 지우려는 시도가 비단 오늘날만의 이야기는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잘 따르기만 한다면 적절한 보상과 안정성이 주어진다는 믿음은 그 모순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의미의 ‘남성성’을 유지하는 기제로 작동해왔다. 조서연은 「군인, 사나이, 그리고 여성들」에서 군을 소재로 한 대중문화 컨텐츠 분석을 통해 ‘남성이 보호와 부양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 대가로 성녀(어머니로 표상되는 정서적인 위로)와 창녀(성적 위로)로 표상되는 이분법적 여성성을 획득하는’ 내러티브를 읽어낸다.
하지만 그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욕망과 행위, 소유의 주체는 오직 남성들뿐이라는 인식은 여성을 단지 수동적인 존재로 대상화하면서 작동해왔다. 여전히 남성들은 지금껏 본인들이 대상화해왔던 여성들을 소유하기를 욕망하지만, 역으로 이제는 점점 주체가 되어가고 있는 여성들이 남성을 욕망하지 않으면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 김엘리가 「카키, 카무플라주 하이브리드 남성성」을 통해 설명한대로 지식정보사회로의 전환, 여성의 사회진출,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기계발 담론, 남성의 몸도 상품화되고 소비의 대상이 되는 소비사회의 속성으로 인해 이제는 남성 자신들도 남성성 수행만으로는 결코 과거와 같은 사회적 보상을 획득하지 못함을 알고 있다. 또한 손희정이 「폐소공포증 시대의 남성성」에서 지적한 바대로 이제 여성은 남성성 수행의 보상이기는커녕 유연화 된 노동시장에서 남성과 경쟁하는 관계로 비춰지기도 하며 따라서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중문화에서 구현되는 전통적인 남성성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규범적 강박으로 남성, 여성 모두를 억누르고 있다.
구태의연한 남성성의 한계를 벗어던져야 한다
한편에서는 냉전을 종식하지 못한 그 역사적 업보로 인해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자 인식의 틀로서 뿌리내린 군사주의,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사회의 전통적 유산을 이용하면서도 공동체를 해체해가며 이윤의 논리에 따라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 우리사회의 남성성은 바로 이 두 가지 요소를 지탱하기 위해 남성들에게 강요된 역할모델이자 전형(典型)이었다. 그 모순적이며 실현 불가능한 젠더 모델이 남성들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속 재생산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이제는 그 모델이 구태의연한 것이 되어버렸음에도 다수 남성들은 과거의 사고방식을 쉽게 놓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체계는 아직도 남아있는 그 남성성의 환영을 악용해, 남자의 불안감과 불만의 근원이 이 사회의 주요 무대 위에는 얼씬도 해본 적이 없거나 이제 겨우 한 발을 내밀고 있는 존재에게서 기인한 것이라고 호도한다. 그런 점에서 “남성이 기성 체제에 순응하면서, 불안과 공포, 막막함의 원인을 사회적 소수에게 전가하는 폐소공포증에 걸려있다.”는 손희정의 진단은 타당하며, 남성성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고스라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 남성들은 이미 본인들 내면에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그 신경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지금껏 믿어왔던 ‘남성성’이라는 허울을 과감하게 벗어내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상의 다른 주체들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덜하게) 한국사회의 남성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 여성을 비롯한 여타 다른 존재의 침탈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동안 사회적 자원을 한정된 것으로 상정하고,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남성세계의 다툼과 위계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며, 여성과 여타 존재를 그로부터 배제하는 구조가 이어져왔다.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되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들려오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지배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모두 남성의 모습으로만 대변되고 있다. 여성과 그 밖에 소수자 주체들은 공적담론에서 여전히 소외되고 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생각의 틀로 바라보고 살아가야만 한다. 변화는 공감과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타 존재에 대해 손을 내밀려면 먼저 나 자신을 알아야 하고, 그 이후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타 존재와 힘을 합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되물어야 한다. 오늘날 남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