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수(예비군 훈련 거부자)

전쟁없는세상 주:

김형수 님은 예비군 훈련 거부로 여러 건의 재판을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병역법에 대한 위헌 여부 결정을 기다리느라 한동안 재판이 연기되었는데, 12월 13일부터 재판이 다시 재개 됩니다. 판사는 김형수 님께 “내면의 양심을 밖으로 꺼내보일 순 없다는 것은 알지만, 예비군 훈련 거부 사유가 평화주의라면 김형수 씨가 평화주의자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전쟁없는세상과 함께 김형수 님은 그간의 활동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재판부에 제출할 예정입니다. 이 글은 김형수 님이 재판부에 제출하는 문서의 일부분입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해 글을 공개합니다. 긴 글이지만 꼭 읽어봐주시길 바랍니다.

 

 

기독교의 평화주의 전통

저는 개신교인으로 평화주의 신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종교인의 병역거부, 특히 개신교도의 병역거부는 개신교 내의 소수 그룹인 여호와의 증인의 선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개신교인으로서 병역거부를 하는 저는 독특하거나, 이상한, 낯선 사례로 여겨집니다. 물론 한국 내 주류 및 다수 개신교인들은 국가가 부여한 병역을 이행하고 있지만, 병역거부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만의 선택이 아닌 넓게는 기독교, 좁게는 개신교 내에서도 선택 가능한 행동입니다. 개신교에는 평화주의 전통이 오랫동안 이어져왔기 때문이고, 역사적으로 이 전통을 지켜온 종파가 있었습니다. 물론 평화주의 전통은 소수 종파에 계승돼 온 것은 사실이지만, 여호와의 증인만의 전통만이 아닌 기독교 내의 중요한 흐름이었습니다.

저는 장로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시작했지만, 기독교 평화주의를 접하게 되면서 신앙인으로서 평화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이 평화주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길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는 현재 주류 및 다수 개신교인과는 다른 선택이지만 저의 개인적 성서해석이나 일탈행동이 아닌 기독교 평화주의의 역사와 성서해석에 근거한 것입니다.

서구 유럽의 역사에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인(313년)을 받고, 국교(380년)가 되기 이전의 기독교를 ‘초기 기독교’라고 말합니다. 초기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고 국교가 되면서 잃어버렸던 핵심 가치 중 하나가 평화주의 전통이었습니다. 학계 내에서도 4세기 이전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합니다. 평화주의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고, 적용할지는 종파마다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평화라는 가치가 성서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이고 비폭력 평화주의 가치가 초기 기독교를 서술하는 중요한 특징이라는 점, 국교화 이후에 이 가치를 잃어버렸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비폭력 평화주의는 군복무나 살상, 폭력,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신약성서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따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비폭력 평화주의의 성서적 근거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에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인이란, 단순히 예수가 영적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삶에 녹여내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원수도 사랑하라는 급진적 삶의 윤리를 실천하는 방편으로서 비폭력 평화주의적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루이스 스위프트는 “첫 2세기 동안에는 군복무 문제와 씨름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없었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실제적으로 정부기관을 유지하거나 명령할 책임이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170년경부터 군 복무 중인 그리스도인이(군 복무를 하다가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 출현하면서 이에 대응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기독교 역사 연구에 따르면 군 복무 중인 그리스도인이 많아질수록 군복무에 반대하는 글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초기 기독교가 군복무에 반대했던 이유는 당시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서 군복무는 황제숭배와 연결되었고, 기독교는 황제숭배를 우상숭배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자 하르낙은 이 외에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기독교는 전쟁과 피 흘림을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초기 기독교가 평화의 가치를 중시하고 지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평화사상은 힘을 잃었습니다. 캄페하우젠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회는 평화주의적이었지만 콘스탄틴 대제 이후 교회는 제국을 지켜야할 책임을 부여받았고, 교회는 이런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기독교가 체제의 일부가 되면서 기독교인이 피흘리는 전쟁에 참여하는 문제는 피흘림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로 초점이 이동했습니다. 즉, 전쟁의 문제가 아닌 의로운 전쟁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한 쟁점이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내용의 전부는 <초기 기독교의 평화주의 전통>, 이상규, 2006.에 빚지고 있습니다.)

평화주의 가치가 희석되다가 다시 한 번 회복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 시점이 바로 종교개혁시기입니다. 구교(가톨릭)의 부패로 개혁의 요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개혁의 요구가 유럽 전체로 확산하면서 크게 두 줄기로 뻗어 갔습니다. 먼저 루터를 중심으로 독일과 북유럽에서의 큰 흐름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루터 사후 독일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필립 멜란히톤과 장 칼뱅으로 대표되는 개혁파입니다. 두 그룹 사이에는 교리에 대한 이해차이가 있었지만 한 가지 핵심적인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국가권력을 동원한 개혁을 추구했다는 점입니다. 루터는 작센 지역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에게 후원을 받아 로마교회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고, 개혁파인 칼뱅이나 츠빙글리도 지역 시의회나 영주들과 함께 종교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교회사가들은 이들을 정부 주도형(magisterial) 혹은 관 주도형 종교개혁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동일한 개혁 선상에 있었지만, 국가권력과 결탁하는 것에 반대한 개혁흐름이 있었는데, 바로 재세례파 그룹입니다. 이들은 종교개혁의 흐름이 무뎌지고 보수화되는 것을 국가권력과의 결탁에서 찾고, 교리적으로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신칭의를 더 급진적으로 해석해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유아세례를 받은 이에게 본인의 의지로 신자됨을 고백하고, 신자로서의 삶을 결단하는 의미의 세례를 다시 받아야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다시 세례를 준다는 의미에서 재세례파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이들이 종교개혁 시기 주류 종교개혁가들과 다른 점이 산상수훈을 근거로 성서의 핵심을 평화라고 본 점입니다. 당시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기, 이들은 전쟁에 반대하며 평화주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물론 주류가 되지 못하고 같은 개혁파(개신교)에서도 박해를 받으면서 소수 종파에 머물렀지만 현재까지 재세례파 그룹들은 반전평화의 가치를 신앙 공동체 내에서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상, <전쟁을 불러온 종교개혁, 계승해야하는 이유, 뉴스앤조이, 2017를 참조 및 인용했습니다.)

재세례파 그룹들의 평화주의적 전통과 신념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보여주는 일화도 있습니다. 1560년대 말 겨울, 네덜란드인 더크 빌렘스(Dirk Willems)라는 사람이 재세례파라는 이유로 한 보안관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빌렘스는 얼어붙은 강을 안전하게 건넜으나 그를 쫓던 보안관이 물에 빠지자 빌렘스는 되돌아가 그 보안관을 구출하고 나서 체포되어 화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상, <아미쉬는 어떤 사람들인가?, NEWSM, 2007에서 인용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재세례파 그룹의 한 갈래인 메노나이트의 활동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이 38도선을 중심으로 고착되어 가던 1951년 여름,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의 행정위원회는 한국에서 사역을 시작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1951년 10월 27일 한국의 첫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 사역자가 된 달라스 보랜(Dallas Voran)이 한국정부의 입국허가를 받고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간호와 다양한 구제활동을 하고, 직업학교를 세워 교육했으며, 농촌지도 사업을 하고, 평화사역을 진행했습니다.

평화사역의 일환으로 동남아시아 평화 혹은 화해 노동캠프를 수차례 진행했습니다. 이 캠프 결과 ‘한일 화해 위원회’(Korea-Japan Reconciliation committee)가 결성되었고, 이 위원회는 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파괴한 수원 제암리교회의 예배당 복구를 위해 3만 달러를 모금했다고 합니다.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 일원으로 한국에온 봉사자들을 영어로 ‘PAX men’이라 지칭했습니다. 이 용어는 제1,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군복무를 대신하여 봉사하는 남자들, 곧 ‘대체복무자’를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되었지만, 실제로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의 경우 이 팍스 멘은 평화교회 훈련을 통해 전쟁을 거부하고 전쟁 대신 구제사역을 한국에서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지부를 대구 경산에 두었는데, 그 이유도 한국전쟁 직후 전쟁 피난민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지역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이상 내용의 전부는 <한국전쟁과 메노나이트 평화운동 – 아나뱁티스트 한국교회사 서술을 위한 서론적 고찰>, 정성한, 2014에서 참조 및 인용했습니다)

메노나이트 교회는 선교와 구제-봉사 사역을 구분하여 수행한다는 독특하고 철저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전쟁 후 다양한 교파와 교회가 생기는 상황에서 또 다른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것이 메노나이트가 해야 할 일이라 판단해 결국 구제와 봉사를 맡은 MCC는 1971년에 한국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더 도움이 필요한 나라로 그 사역을 옮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2001년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KAC, Korea Anabaptist Center)가 만들어졌습니다. 센터 창립에 가장 가까운 계기는 강원도 화천의 아바샬롬공동체와 춘천의 예수촌교회 사람들이 성경적 교회 회복을 위한 모임을 통하여 16세기 재세례신앙운동의 의의와 적절성을 재발견하였고 이를 둘러 싼 새로운 인식과 운동이 한국 땅에서도 필요하다는데 공감하면서부터 한국에서의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센터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현재 서울과 춘천에 아나뱁티스트 교회가 설립돼 있고, 일부 기독교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아나뱁티스트 모임 등도 형성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이상, 한국 아나뱁티스트의 역사는 <재세례파 형성 및 한국 유입 과정과 신종교적 의의>, 조응태, 2014 16쪽 ~ 18쪽에서 전부 인용하였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여호와의 증인만이 비폭력 평화주의 가치를 병역거부를 통해 실천하고 있지만, 그들뿐 아니라 재세례파 그룹 또한 평화주의 가치와 전통을 지켜온 그룹입니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병역거부는 초기 기독교의 입장이었고, 병역거부와 전쟁반대는 기독교 역사에서 꾸준히 주장된 입장이었습니다.

저는 평화에 관해 공부하고 평화 행동의 하나로 병역거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재세례파 신학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비록 신앙을 키어온 교회는 일반 개신교회고 아직 그 울타리를 벗어나진 않았지만 재세례파 신학과 신앙이 저희 실천과 행위에 분명한 근거와 제 선택을 설명하는 신학적 언어를 제공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삶과 이를 공유하는 교회 공동체를 일치시키기 위해 최근에는 교회를 재세례파 교회로 옮기려는 중에 있습니다.

예비군 훈련 거부 기자회견. 예비군 훈련 거부자들과 함께한 퍼포먼스. 왼쪽부터 김형수, 이상, 조성현.

예비군 훈련 거부 기자회견. 예비군 훈련 거부자들과 함께한 퍼포먼스. 왼쪽부터 김형수, 이상, 조성현.

나는 왜 평화주의 전통을 따르게 되었는가

저는 2008년 대학 입학 후 한국기독학생회(IVF)라는 선교단체에서 활동하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성서를 다시 공부하고, 신앙인이란 무엇인지 친구들과 함께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2008년 하반기 무렵 예배모임에서 송강호 선교사의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개척자들>이란 단체에서 평화운동을 하고 있었고, 신앙인으로서 왜 평화의 가치가 중요한지 강의를 했습니다.

제 주관적 기억에 의존하고 있지만 당시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면 이러했습니다. “기독교인이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예수의 핵심 가르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예수가 이야기한 급진적인 삶의 윤리다. 차별과 폭력, 갈등과 분쟁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사람들 사이 다툼의 악순환에서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고 평화의 선순환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중재자로 살아야 한다.”

송강호 선교사가 몸 담은 <개척자들>이란 단체는 당시 인도네시아 아체의 분쟁지역에서 평화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체는 독립국가를 꿈꾸는 아체족이 인도네시아에 흡수된 뒤 일어난 종족갈등으로 자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이곳을 놓치지 않으려는 정부군과 무력충돌이 벌어지던 곳이었습니다. 송강호 선교사는 이곳에서 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고, 다툼과 보복으로 폭력의 반복되는 이곳에서 평화교육을 통해 평화의 선순환으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활동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강의를 통해 성서의 핵심 가치 중 하나가 평화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개인윤리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사회에 적용될 때 어떤 활동으로 이어지는지를 들으면서 제가 기독교인으로서 평화의 중요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강의를 계기로 기독교인으로서 평화의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단체 활동을 하면서 다시 성서를 공부하게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평화가 성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습니다. 제가 깨달은 바는 이렇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평화는 다툼과 갈등이 없는 상태라는 좁은 의미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평화는 깨진 모든 관계가 하나님 안에서 충만하게 회복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라는 관계가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이 훼손된 관계가 충분하게 회복된 상태가 평화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핵심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온 세계에 평화를 이루길 원하신다는 것이고, 평화가 이뤄지는 가장 구체적이고 선명한 표본을 예수를 통해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경의 몇 구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에서만 평화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지향하는 이상의 핵심에 평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신앙인이란 단순히 성서의 몇 구절을 믿는 것이 아닌 성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이해의 표본이 되신 예수의 삶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 참된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 신앙인으로서 요구되는 바의 핵심은 평화의 이상을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살아내느냐에 있다고 결론짓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하루아침의 결론은 아니었고, 몇 년에 걸친 느린 고민의 결과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고민이 느렸던 이유는 평화를 신앙의 핵심으로 삼을 때 짊어져야할 삶의 불편과 무게를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깨닫게 된 평화의 관점에서 전쟁은 사회와 그 구성원의 관계와 삶을 일거에 파괴하는 가장 최악의 사건입니다. 군대와 무력을 통해 사회를 보호한다고는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 그 순간 승리와 패배, 사회 보호는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과 칼, 폭탄과 미사일로 인해 죽고 사회적 관계는 파괴됩니다. 수십 만 수백만이 죽어나가는 현실 앞에 국적도, 신앙도, 체제나 이념도 무의미합니다. 모두가 공멸하는 과정이 전쟁이고, 이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으로서는 절대 참여하거나 기여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전쟁을 하게 되면 그 이후에는 서로에 대한 증오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전쟁을 직접 일으킨 1차적 책임을 찾겠지만, 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겐 자신을 공격한 상대가 적이고, 문제의 근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이 극단적이고 폭력적일 수록 화해할 여지는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신앙인인 저는 휴전상태인 한국에서, 병역을 이행해야하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이에 응답해야했지만 후회스럽게도 2011년 군입대 하였습니다. 입영을 거부함으로써 감옥에 갈만큼 제 신념과 결단이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니 그곳에서 평화적 가치 실현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군대에 간다고 해서 당장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며 타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군 생활을 하면서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군대는 전쟁을 하지 않는 순간에도 전쟁을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조직입니다. 사격훈련, 수류탄투척, 유격훈련은 상대를 제압하고, 적을 죽이기 위한 연습입니다. 군대는 전쟁이 가능한 조직이 되기 위해 강압적인 상명하복의 군사주의 문화와 질서를 배우도록 개인을 학습시키고, 길들이고, 훈련시킵니다. 저라는 한낱 미약한 개인은 아 질서와 분위기 속에서 제 가치와 신념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군 생활은 평화주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조직을 극복할 수 없는 개인의 한계를 발견하게 된 시기였습니다. 신념이 지향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때론 괴로워하고 대부분 회피하면서 지냈습니다. 이미 군대에 발을 들였기 때문에 병역이행 과정에서 병역거부를 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이제 와서, 뒤늦게 병역거부를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우스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시기를 보내다가 2013년 제대 후 2014년부터 예비군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가까운 지인의 예비군 병역거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인이 예비군 훈련을 거부하며 쓴 글을 보면서 다시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왜 병역거부를 결심하지 못하는지 스스로를 깊이 되돌아봤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병역을 거부하게 되면 감옥에 가야합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국가의 명령을 더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요구에 따르지 않아도 제 삶에서는 어떤 불이익도 없지만, 국가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감수해야할 불이익이 더 크기 때문에 병역거부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믿는 신인 야훼 하나님보다 현실의 국가를 더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성서의 가르침을 제 입맛대로, 제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습니다.

평화가 제가 믿는 예수를 따르는 삶의 핵심이라면, 어떤 불이익이 예상되는지에 상관없이 신앙이 요구하는 바를 따라야 합니다. 저는 겉으로는 성서의 예수를 믿는다고 했지만, 본질은 그렇지 못했다는 생각에 많이 괴로웠고, 지난날이 후회스러웠습니다. 이제는 저에게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고민과 그것을 유발하는 계기 앞에서 회피하지 않고 어떤 불이익이 있든지 현재 제가 사는 삶에서 평화의 삶을 살아내기 위한 선택을 해야겠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인 나에게 요구되는 바였고 스스로 답해야할 일이라고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전쟁에 반대하고 군사행위 일체에 반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입대 전, 예비군 훈련 전, 전쟁 났을 때가 아닐까 합니다. 병역거부는 사회가 허락하지 않고 있는 것이기에 병역거부를 하면 직업선택 등과 같은 사회생활에 많은 제약이 당연히 뒤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간다하더라도 믿는 바대로 살아낼 때 국가의 규율에 구애 받지 않는 사상, 양심 그에 따른 실천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고 거짓 신앙이 아닌 참신앙의 삶이란 자부심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병역거부를 하기로 결심하게 됐습니다.

유엔자유권 위원회의 권고 1주년을 맞아 권고사항 이행을 한국정부에 촉구하는 기자회견장의 김형수. 김형수 님은 평화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병역거부자 가운데 한 명이다.

유엔자유권 위원회의 권고 1주년을 맞아 권고사항 이행을 한국정부에 촉구하는 기자회견장의 김형수. 김형수 님은 평화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병역거부자 가운데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