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틸드(싱어송라이터)

 

 

#1. 모두가 경험했지만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이야기

평화란 무엇일까? 요즘은 많이 알려진 대답이 하나 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로 가는 길이 곧 평화다!” 아마도 평화에 대한 다양한 상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을 더 중요시하는 대답이 아닐까 싶다.

사랑도 비슷하다. 인지언어학의 창시자이자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통해 진보 진영에 프레임 논쟁을 던진 조지 레이코프는 공저인 <삶으로서의 은유>에서 우리가 사랑을 인지할 수 있는 까닭은 은유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사랑은 만져지는 실체가 아니기에 여러 가지 은유를 통해 그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실체를 가늠하기 힘든 평화에도 은유가 필요하다. 바로 평화를 설명하는 단어들이다. 그 중에 ‘저항’이라는 단어와 평화가 만나 탄생한 책이 <저항하는 평화>이다. 한국 사회의 평화를 고민하는 이 책은 평화를 위한 저항, 평화를 만드는 저항에 지향점을 둔 대담집이다. 정치, 사회, 종교, 젠더, 국가, 교육 등 사회의 각 분야에서 만나게 되는 평화를 둘러싼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가운데 병역거부, 재일조선인, 정의로운 전쟁, 성소수자, 교실 내 폭력 등의 사안을 두고 저항과 탈주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다.

이 책은 군대와 평화를 중심주제로 한다. 한국 사회의 평화 문제는 주로 남북분단이라는 현실적 장벽에서 비롯되고, 그것을 유지하는 주된 도구는 군대이며, 남한 사회의 형성에서부터 ‘병영문화’가 사회 전반을 규정해 왔다는 점은 다른 사회에서 찾기 힘든 특징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회사 동료들과 점심을 먹다가 우연히 군대 얘기가 나왔다. 한국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군대에서 뺑이 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데, 듣고 있던 여성 동료가 자신이 몸담았던 예체능계 학교에서 똑같은 일을 겪었다며 놀라워했다. 이렇듯 군대와 한국사회 전반이 병영적 특성을 갖고 있음을 많은 이들이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뿐.

그러나 이 책은 우리에게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책이 들려주는 이른바 ‘소수자들’, 병역거부자, 성소수자, 여성, 재일조선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병영사회인 한국 사회가 소수자에게 끼치는 폭력을 목도한다. 나아가 평범한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도 이미 알게 모르게 병영문화의 피해자이며, 진정한 평화는 ‘다수’가 ‘소수’의 편에 서서 함께 발맞추어 저항할 때 이룰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2. 균열내고, 흔들고, 저항하고

<저항하는 평화>는 2015년에 출판되었고 책 속의 대담은 세월호 참사를 전후로 진행되었다. 그렇기에 세월호 참사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읽는 이 책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국제관계, 국가안보라는 거시적 평화로부터 한 개인의 양심을 다루는 미시적 평화까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유기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끔찍한 참사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감히 그 슬픔을 가늠할 수 없는 참사로부터 우리는 최대한 값진 교훈을 길어야만 한다. 그것이 안보와 안전, 국가의 이름으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진정한 속죄이자 위로이리라.

국가의 무능력으로 인해 벌어진 최근의 사건은 천안함 침몰, 그리고 세월호 참사였다. 천안함이 안보무능을 상징한다면 세월호는 안전무능을 상징한다. 대담자 중 한 사람인 김종대 정의당 의원에 따르면, 안보와 안전을 하나로 놓고 보는 포괄안보 개념은 세계적인 추세이다. 중동과 같은 상황을 제외하면 국가 대 국가의 전쟁 자체가 줄어드는 반면 내부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발생하는 위기상황은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종래에 국가의 기본 직무로 여겨졌던 안보뿐만 아니라 이제는 안전문제도 일종의 안보 바운더리에 묶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안함과 세월호가 과연 본질적으로 다른지, 그 문제의 근원에 자리하고 있는 국가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먼저 고민해야 한다.

 표지

<저항하는 평화> 표지

 

<저항하는 평화>는 한국 사회의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현상을 곳곳에서 끊임없이 드러낸다. 천안함의 군인들이 지키라고 명령받은 국민의 범주에는 세월호 희생자도 포함된다. 국방의 의무에는 이성애자와 성소수자가 모두 들어가 있다. 남성은 징병제의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군필’이 중요한 경력이 되는 사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대가를 취하며 살아간다. 사회에서 국가, 안보, 안전, 평화 담론이 구현되는 모습은 복잡하고 어지러워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남의 편이라고 금을 그었던 사람이 각도를 조금만 돌려 보면 나와 같은 처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토록 모순적이고 양가적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군대보다 더 군대 같은 사회 속에서 무력해진 청년을 비추고, 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하던 성정체성을 오히려 감옥에서 이해받는 아이러니를 들려주며, 억지로 끌려가지 않으니 모병제가 좋은 것 아니냐는 피상적인 이해에 균열을 내고, 병역거부와 기피의 이분법을 넘어 ‘도망’할 것을 주문하며, 상식적인 ‘국민’의 바운더리를 ‘재일조선인’의 입장에서 흔든다.

그리고 이러한 증언을 토대로 우리가 처한 복잡한 현실을 들여다보면서 한국 사회에서 평화 담론이 전개되기가 얼마나 난해한지를 보여준다. 세월호와 천안함에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남북분단과 안보위협은 여전히 공기처럼 정서 깊숙히 머물러 있다. 분단과 통일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다수와 소수라는 뚜렷한 경계선을 넘어 새로운 평화를 그려보는 일은 요원하게만 보인다.

 

#3. 평화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려면

<저항하는 평화>는 평화 담론을 다양한 어조로 논하는 가운데 하나의 의식을 공유한다. 평화에 근본적으로 ‘구조적 문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구조의 유지와 형성에 참여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형성된 구조를 학습하고, 미래에 어떤 구조에 참여하며 발전시킨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구조의 피해자이자 구조를 이용하는 가해자이다. 학교 폭력문제와 성소수자 차별로부터 국가 안보의 의제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양가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평화를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동료가 필요하다. 한 사람이 각각 피해자와 가해자로 자신을 드러낼 때 그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야 하겠지만, 그 지향점은 저항하는 평화로의 동참이어야 한다. 진정한 평화를 방해하는 썩은 곳을 도려내고 싸매어 새로워지기까지 자신의 결단도 필요하지만 누군가의 도움 또한 절실하다. 어렵게 시작한 평화의 길을 벗어나지 않고, 걸으면 걸을수록 더 건강하고 튼튼해질 수 있도록 서로 돌보아야 한다.

이 서평을 쓰는 와중에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도보다리에서 한가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남북의 두 정상을 보며 가슴 한켠이 시큰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국가란 필요악이며 국가를 넘는 세계를 상상해야 한다고 믿으며 살고 있지만, 그 대화가 한반도의 민중에 대한 거시적인 평화를 주제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몇 십 년을 쌓여온 분단의 날카로운 상처가 내 안에서 아무는 느낌마저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남북이 만드는 평화국면과는 상관없이 평화롭지 못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일촉즉발의 갈등 속에서도 가만히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있다. <저항하는 평화>는 이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지를 고민하도록 초대할 것이다. 그 초대에 응하여 좀 더 진지하게 세상과 내 삶의 평화를 고민하기 시작한다면, 주위를 둘러보며 동료를 찾아보라. 저항을 왼다리 삼고 평화를 오른다리 삼아 걷는 많은 사람들, 병역거부자이기도 하고 성소수자이기도 하며 비국민이고 학교폭력의 희생자이기도 한 몸과 마음들이 당신과 함께 걸어갈 채비를 마치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