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욱(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

 

 

올해 초 시민단체 일을 시작했다. 그전에는 집회나 투쟁현장을 기웃거리던 게 전부였다.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다. 내가 일하는 단체는 나를 포함해 2명의 상근자와 10명 정도의 운영위원들이 꾸려가는 작은 단체다. 작은 단체임에도 여러 사안을 논의하는 데 있어 이견이 많았고 합의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역량이 부족하다 보니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은 멀어 보이고, 나는 고작 이 정도밖에 할 수 없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다. 나의 활동이 무용한 것처럼 생각되면서, 때때로 무력감이 찾아왔다. 무력감이 개인을 좀먹는 다는 것과 사회운동의 차원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잘 알면서도 쉽게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개인의 자존감과 지속가능한 사회운동을 위해서라도 무력감에 잘 대처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0년차 활동가인 내게 활동가를 위한 평화캠프에 참가한 것은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활동가를 위한 평화캠프에서는 사회운동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했다. 사회운동의 정의, 단계, 성공과 실패의 원인, 행위자 등 사회운동을 이루는 요소를 나누고 각 요소들을 어떻게 결합해야 더 나은 사회운동을 만들 수 있을지 참가자들과 함께 고민했다. 여기서 굳이 캠프에서 배웠던 세세한 내용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 잘 정리되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캠프에 직접 참여해서 듣는 게 가장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선 캠프에서 배운 것 중 오래 가져가자고 다짐한 것 두 가지 정도를 말해보려 한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기

무력감은 언제 찾아올까? 내 경우는 바꾸고 싶은 대상에 비해 스스로가 너무 미약해 보일 때 무력감이 오는 것 같다. 내가 하는 일은 쓸모없어 보이고, 대상은 더 거대하게 느껴질 때, 결과가 뻔히 보이는 것 같아서 선뜻 행동에 나서기가 망설여진다. 캠프에서는 전쟁없는세상이 직접 겪었던 어려움을 예로 들면서 정체되었다고 느낄 때, 시선을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돌리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말해줬다. 사회운동의 여러 가지 요소를 분석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의 위치를 보다 잘 파악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진행되는 사회운동의 과정 속에 지금 자신이 어떤 단계에 위치해 있는지, 자신을 포함한 여러 행위자들이 운동 내에서 각자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일은 자신뿐만 아니라 바꿔야 할 대상 또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 도와준다. 내가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있다.

일과가 끝나고 난 뒤 자유시간에 보드게임 ‘코드 네임’을 하고 있는 평화캠프 참가자들

일과가 끝나고 난 뒤 자유시간에 보드게임 ‘코드 네임’을 하고 있는 평화캠프 참가자들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의 역할과 요구를 진지하게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루의 공식 일정이 끝나고 ‘피스바’에서 모이는 자유시간에 ‘코드 네임’이라는 보드게임을 했다. ‘코드 네임’에서 중요한 것은 같은 팀원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버리면 결코 게임에 이길 수 없다. 섣불리 다양성을 봉합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해나가는 일은, 어렵더라도 꼭 해내야 할 일이다. 조율의 과정에서 서로는 각자가 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될 수 있다. 활동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요소 중 하나는 개인의 성취감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자기를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 작은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딛을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게 될 때 더 차분하게 상황을 직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로를 존중하기

캠프 첫 날, 3박4일간의 일정을 위해 참가자들은 원칙을 먼저 세웠다. 원칙을 세우는 기준은 모두가 동의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정해진 원칙의 대부분이 의사소통과 관련된 것이었다. ‘솔직하게 질문하기’, ‘옳다, 그르다가 아닌 방식으로 말하기’, ‘편안하게 지적하고 받아들이기’ 등. 캠프 내내 참가자 대부분이 서로 합의한 원칙에 따라 대화를 나눴다. 대화는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이었고 또 서로에게 존중받는다고 느낄 수 있는 통로였다.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대부분이 그렇게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일이든 그렇지 않겠냐마는, 사회운동 역시 대화를 통해서 대부분의 일이 진행된다. 상명하복에서부터 평등한 발언구조까지 집단마다의 의사소통 구조는 다양할 것이다. 어떤 의사소통 구조든 간에 서로가 존중받는다고 느낀다면 그 집단은 오래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캠프 첫 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원칙 만들기 시간

캠프 첫 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원칙 만들기 시간에 함께 만든 원칙

캠프의 정식 일정은 아니었지만, 요구가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단체 내부에서의 의사소통에 대한 각자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말 한 마디 꺼낼 수 없는 답답한 회의 분위기나 발언권의 형식적 평등은 있지만 실질적 평등은 없다는 이야기, 사적 관계와 공적 관계가 잘 분리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 등. 서로 다양한 경험을 나눴다. 앞에도 썼던 것처럼, 사회운동은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선한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캠프에 참여하면서, 사회운동은 선한 결과만이 아니라, 선한 마음을 존중하는 선한 과정 또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함’의 기준은 모호하지만, 내 나름의 기준은 누구도 부당하게 소외되거나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기준은 마땅히 사회운동을 해 나가는 활동가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누군가를 갉아먹어야만 지속되는 운동의 방식은 사회운동이 바꾸고자 하는 권력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회의 대안을 생각하기에 앞서, 사회운동 안에서도 더 나은 운동의 방식을 고민해야 하는 것 같다.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가 사회운동이 만들고자 하는 사회라면, 그것은 사회운동 내부에서부터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를 위한 사회운동

캠프 첫 날, 각자를 소개하기 위해 캠프 참가자들이 돌아가면서 ‘나는 사회운동이 00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사회운동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때의 맥락은 결국 사회가 좋아지면 사회에 살고 있는 나도 좋아진다는 맥락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사회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들과 내가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은 내게 있어서는 굉장히 추상적인 것이었다. 마음으로는 동감하지 않으면서도, 자기합리화의 일환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다녔던 것 같다.

캠프의 원칙 중 ‘존재 자체를 안전하게 드러내고 환영하기’라는 원칙이 있었다. 캠프의 대부분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었다. 자유시간에는 서로를 위해 각자의 재능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안전하고 환영받는다고 느꼈다.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할 뿐 아니라 스스로 존중받음을 느끼며,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곳. 사회운동이 ‘존재 자체를 안전하게 드러내고 환영’하는 곳을 만들어가는 일이라면, 이제는 기꺼이 자기를 위해 사회운동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