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미(기차길옆작은학교 큰이모)
우리에게 생존은 모두가 잘 지낼 수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를 상상하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타자들, 즉 구조 바깥에 존재하는 아웃사이더들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생존은 우리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벼리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시스터 아웃사이더/오드리 로드/후마니타스. 178쪽
1980년대 말 빈민지역에 들어가 공부방을 열었다. 가난한 아이들 뒤에는 하루하루의 삶이 지옥인 엄마들이 있었다. 도시에서 자라 빈민이 되었든, 충청도나 전라도에서 이농을 해왔든 빈민여성들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밤새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고도 아침이면 밥을 지어 놓고 공장에 나가던 그들은 대개 스무 살 전후에 만난 남자와 강압적인 성관계를 갖고 원치 않는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공부방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심리 상담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간 상담기관에서 엄마들이 받는 첫 질문은 늘 “원하는 아이였습니까?”였다. 그 질문을 받으면 엄마들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때마다 엄마들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다시 세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공부를 같이 하고, 여성노동자대회에도 같이 가고, 경제공동체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늘 제자리였다. 엄마들은 억압을 내면화 해 스스로 열등하고 힘이 없는 존재로 규정했고 몸을 낮췄다. 그래도 10년쯤 지나자 용기를 내 이혼을 하는 엄마들이 생겼다. 덕분에 우리는 가정을 파탄 냈다는 비난과 원망을 받았다.
나 역시 만석동에서의 첫 10년을 주부로, 엄마로, 활동가로 전사의 삶을 살아야했다. 다른 남자들에 비해 집안일과 육아를 많이 돕는다고 생각하는 남편이, 집안일과 육아가 아내를 돕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이라고 인식하기까지는 투쟁이 필요했다. 공부방 자원교사로 와서 공동체를 선택한 여자후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부방 엄마들과 달리 안정된 직장과 동지이자 친구 같은 남편과 가정을 꾸려갔지만, 일터나 직무와 상관없이 여성은 늘 남성과는 다른 존재로 차별받았고, 고단한 몸으로 집에 오면 엄마의 역할, 아내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은 다른 엄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방 엄마들의 삶이 우리보다 더 척박하고 고단한 걸 알면서도 그들과 만나 함께 변화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저는 대학에서 일하기 때문에 자식을 제때 잘 먹일 수 있는 유색 여성 레즈비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일자리를 찾지 못해 아이를 잘 먹이지 못하는 유색 여성이나 집에서 낙태와 불임시술을 받아 뱃속이 망가져서 아이가 없는 유색 여성과 저 사이의 공통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면, 자식 없이 살기로 한 레즈비언, 동성애를 혐오하는 공동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기에 커밍아웃하지 않고 살아가는 여성, 죽음 대신 침묵을 선택한 여성, 저의 분노가 방아쇠가 되어 자신의 분노를 폭발시킬까 봐 잔뜩 겁먹은 여성을 제가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 여성들이 저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저는 그녀들이 받은 억압뿐만 아니라 저 자신이 받는 억압에도 기여하는 셈입니다. /228쪽
1997년 둘째아이를 낳고 나서 영화 ‘안토니아스라인’을 보았다. 나는 그 영화를 통해 우리 공동체가 가야 할 길을 보았지만, 함께 공동체를 준비해 가던 남자 후배들은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때만 해도 나는 페미니즘을 특정 계급의 여성들의 것이라 여겼다. 부끄럽게도 페미니스트란 우리와 같은 아웃사이더가 아닌 전문직 중산층 여성들을 일컫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자 후배들의 그 거부감의 근거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속한 기찻길 옆 작은 학교가 30년 넘게 이어 올 수 있는 것이 우리 공동체가 자매들의 공동체였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 공동체가 겪은 몇 번의 위기는 남성들의 방식이 우위에 있을 때였다. 그것이 남성들의 정체성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탓이든, 여성들보다 지적으로나 힘으로나 우위에 있고, 훨씬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논리를 우리 여성들이 내면화한 탓이든 말이다. 그러나 결국 그 위기들을 이겨낸 것도 자매애였다. 그럼에도 내가 살아 온 과거와 현재,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갈 미래를 페미니즘 관점으로 통합하게 된 것은 불과 3년여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정도로 나는 페미니즘에 무지했다. 페미니스트들의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최근 몇 년 사이다. 그렇게 일천한 페미니즘 독서 경험 중 오드리 로드와 가장 강한 유대감을 느낀 이유는 내가 내 스스로를 아웃사이더의 자리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오드리 로드는 흑인이며, 여성이고, 레즈비언이었다. 미국에서는 흑인여성으로 산다는 건 그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로 산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나라에서 백인이 아닌 여성의 경우 유방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80퍼센트, 자궁 절제술 및 불임 시술 같은 불필요한 의료 시술의 빈도는 백인 여성의 세 배, 강간, 살인, 폭행의 피해자가 될 확률 또한 백인 여성에 비해 세 배 더 높습니다. /100쪽
미국의 빈곤문제를 다루는 책을 보면 흑인여성들의 열악한 삶을 드러내는 통계들이 차고 넘친다. 미국 사회에서 법원에 의해 퇴거 명령을 받는 흑인여성 세입자들은 남성들의 두 배, 가난한 백인 지역의 여성에 비해 열 배 가까이 높다고 한다. 도시마다 흑인 동네의 여성들은 백인 여성들에 비해 소수임에도 퇴거당하는 세입자의 30퍼센트를 흑인 여성이 차지한다고 한다. 오드리 로드는 그런 악조건에 무릎을 꿇는 대신 약자들을 억압하는 낡은 권력에 저항했다. 나는 오드리 로드를 읽는 동안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서로의 자녀를 키워 주며, 서로의 전투에 나서 주고, 서로의 땅을 경작해 주던 흑인 여성의 포용력과 생명력을 전해 받았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가장 가난하고 억압 받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떠올렸다. 여성들 중에도 더 열악한 처지로 내몰린 이들은 비정규직, 혹은 초단시간 여성 노동자들(그 여성이 기혼이든 미혼이든 상관없다), 이주여성들, 성매매여성들이었다.
올해 내가 자란 동두천이 무대가 되었던 소설 ‘거대한 뿌리’가 개정판을 내면서 제목을 ‘나의 동두천’으로 바꿨다. ‘동두천’이 상징하는 것들을 좀 더 분명히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책을 가지고 올 가을 ‘성매매집결지 100년 아카이빙 전’에서 ‘두레방’대표와 북토크를 하게 되었다. 마침 포천에서 결혼이주여성들을 만나던 참이라 갈 때마다 동두천에 들렸다. 캠프 케이시나 캠프 호비의 미군들이 대부분 평택으로 이전했다는데도 미군기지는 여전히 거기 그대로 시의 40퍼센트를 그대로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지촌은 화려한 벽화와 관광특구라는 간판에 어울리지 않게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어릴 적 도시를 짓누르고 있던 어둠의 정체가 미군기지 때문이었음을 깨달은 건 더 자란 뒤였지만 나는 그곳에서 가장 멸시 받고 차별 받는 이들이 기지촌의 언니들이라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중학생이 되면서는 기지촌의 언니들이 그곳에 오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고, 미제와 미국을 좋아하면서도 미국사람의 피가 섞인 아이를 트기라고 차별하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기지촌에서 살았던 경험은 나를 차별에 예민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2018년 가을 그 기지촌의 기억과 다시 마주하면서 오드리 로드를 더 깊이 만나게 되었다. 내 어릴 적 기지촌 언니들은 대부분은 가족의 부양을 위해 그곳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40년, 50년이 지나 F6 비자로 한국에 온 필리핀, 러시아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결혼이주여성들도 다르지 않았다. 30년 동안 만석동에서 만나 온 여성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성들은 국가, 민족, 종교를 초월해 가부장제의 희생양이었다. 혹은 가부장제를 핑계로 억압과 차별을 일삼은 사회와 가족의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는 그들의 연대를 가로막고 서로를 두려워하고 혐오하게 조장해왔다. 정부의 다문화 정책은 그들의 차이를 ‘균질화 된 초콜릿 우유처럼 구별 불가능한 입자의 혼합물’로 만들 뿐 그들이 같은 여성으로, 노동자로, 엄마로 만나는 길은 가로 막았다. 또한 같은 남성노동자, 장애인, 난민, 성소수자들과 연대할 길은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그 길을 뚫고 새로 내는 일이 바로 여성의 일이라고 믿는다. 오드리 로드는 그 길을 일굴 힘을,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에너지를 일깨웠다.
차이는 단순히 관용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됩니다. 차이는 우리의 창의성이 불꽃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극성과도 같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성들이 상호 의존의 필요성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동등한 것으로 인정받는 서로 다른 힘들 사이의 상호 의존 속에서만, 우리는 그 어떤 지침이 없는 곳에서도 행동할 수 있는 용기와 자양분, 그리고 이 세상에서 새로운 존재 방식을 추구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176쪽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들 가운데 누구 하나 배제되지 않는 미래를 만들어 가는 데 헌신하는 것이며, 그런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의 독특한 정체성에서 나오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우리의 동일성을 인식하는 동시에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251쪽
2018년은 우리나라의 혐오 문화가 사회 곳곳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볼 수 있는 사건들이 쏟아졌다. 동성애자에 대한 과도한 혐오와 공격, 장애인들의 휠체어 출근 투쟁에 쏟아진 비난들, 제주에 온 예맨 난민들을 향한 공포와 혐오, 고양저유소의 화재 사건을 다루는 경찰의 태도에서 드러난 이주민에 대한 차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인정에 대한 남성들의 위기감, 그리고 멈출 줄 모르는 여성 살해. 나는 그 혐오와 폭력에 대항하는 길은 아웃사이더들의 연대라고 믿는다.
촛불정부라고 일컬어지는 현 정부가 만든 몇 가지 변화 중 하나는, 헌법재판소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게 대체복무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 뒤로 대체복무제를 마련해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정부과 정치인들의 태도나 일부 시민들의 반응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취약한지를 보여주었다.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는 분명 70여 년 간 계속된 분단 상황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신자유주의가 가져 온 경제적 불평등, 계층갈등의 심화, 개선되지 않는 성차별, 열악한 사회복지제도, 미숙한 정치 등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뒤엉켜 있다. 최저임금인상, 주 52시간제 법제화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 역시 자신의 부와 기득권을 조금도 내놓지 않으려는 자본과 권력이 부추기는 우리끼리의 싸움이 되고 말았다.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이분법적 사고를 강요한다.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고, 지배하지 않으면 지배당하는 것이니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밟히는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11쪽
우리는 낡은 권력과 똑같은 방식을 써서는 낡은 권력과 싸울 수 없어요. 우리가 이 투쟁에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저항하는 것, 그러면서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을 건드릴 수 있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 내는 것뿐이에요. /161쪽
우리가 바라는 변화가 쉽게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면서 2018년을 힘겹게 살아야 했다. 그때 오드리 로드를 만나 다시 자매들과 이웃들과 친구들의 손을 잡을 힘을 얻었다.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되풀이 해 읽을 때마다 보이지 않던 길이 새로 보인다. 쉰이 훨씬 넘은 나이에 만난 오드리 로드는 가난한 여성들, 이주민들, 난민들, 장애인들, 성적소수자들, 평화활동가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우리 아이들과 함께 그 울타리를 부술 용기를 주었다.
내 안에서 당신을 발견하듯 당신도 당신 안에서 내 모습을 환기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내 모습을 새겨 넣는 조각칼이 바로 나이다. /284쪽
사랑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생존법이다. 때론 흑인 어머니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 그것밖에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 다정함은 잃기 마련이다. 어머니는, 마치 대리석에 분노의 메시지를 새기듯, 세상에 나를 새겨 넣었다. /2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