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덕 (징병문제연구자)
대만의 국민투표 결과를 두고 ‘인권은 여론에 맡기지 말고 위에서 찍어 내려야 한다’고 주장을 SNS에서 심심치 않게 접한다. 대만에선 우리나라로 치면 헌법재판소에 해당하는 사법원 대법관 회의가 2017년 5월에 동성결혼을 금지한 민법의 혼인 규정을 위헌으로 판결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동성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안건이 부결됐다. 인권정책을 도입할지 여부를 대중여론에 맡기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하지만 인권정책이라는 이유로 ‘위에서 찍어내려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전혀 없어서 이 역시 무책임한 발상이다.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제를 내년 연말까지 도입하라고 결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대만 사법원은 2년 내 민법의 혼인 규정을 수정 또는 제정하도록 결정했다. 따라서 대만의 현 상황은 한국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고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는 과정이 순조롭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등처럼 다가온다.
인권정책은 양날의 검이다. 인권은 모든 인간이 자유와 평등을 향유하는 시민이 될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유엔의 인권기구는 회원국들이 시민들에게 보장해야 할 인권기준들을 세세하게 규정해두었다.
인권이라는 양날의 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권은 또 다른 식민주의를 불러들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2005년 유엔총회는 ‘보호할 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이라는 개념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어떤 국가가 자국민의 인권을 보장하지 않거나 그럴 수 없는 경우 국제사회가 개입할 수 있다. 2008년 러시아가 조지아를 침공하면서 내세웠던 것이 바로 ‘보호할 책임’이었다. 국제사회가 인권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겠다고 적극적인 인권기준을 도입했던 취지와 달리 인권이 침략을 정당화한 셈이었다. 이처럼 인권 같은 비안보적인 사안이 안보화(securitization)할 때 군사적 개입도 정당화하게 되는 아이러니도 발생한다.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와 관련해서도 ‘국제인권기준’이라는 것을 마치 고정불변한 경전처럼 접근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찍어내려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인권의 보편성이라는 가치는 당대의 현실조건과 상황 속에서 여러 행위자들의 입장을 조율하면서 잠정적인 기준으로 구체화할 따름이다. 따라서 국제인권기준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결론적으로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보다 그러한 기준이 어떤 논의에 기초해서 공감대를 얻게 되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유엔에서도 1980년대 후반에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명시적으로 인정하기 전까지 20년 정도를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이어왔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권의제로 인정하려는 시도는 유엔 창설 초기부터 있었다. 1948년 12월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제정된 <세계인권선언>의 전문은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면서 동시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활동가들의 주장에 근거가 되었다.
“최근에 일어났던 전쟁에서처럼 인권을 무시하고 멸시했던 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했던가를 기억해 보라. 인류의 양심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야만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늘날 보통사람들이 바라는 지극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이제 제발 모든 인간이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희구하는 것이라고 모두가 한목소리로 외치게 되었다”
<세계인권선언>은 나치 독일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과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합의 속에서 탄생한 잠정협정이었다. 1966년 통과된 자유권규약은 사상, 양심 그리고 종교의 자유에 대한 보장을 명시했다.
자유권규약 제정 당시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시민들의 보편적인 권리로서 명시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평화운동기구로 불리는 국제평화국(International Peace Bureau)이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자유권규약에 명시하기 위해서 제출한 보고서는 병역거부 인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전쟁은 <세계인권선언>에 의거하여 국제적인 갈등들을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원칙으로 폐기처분 당했다. 유엔은 평화를 수호하는 자격을 스스로 부여했다. <세계인권선언>의 정신과 내용에 따라서 개인의 양심에 따른 반응은 고려될 수 있고, 국가나 군사동맹에 의해 행해진 정의롭지 않은 사건에 따른 조건들에 따라 병역거부를 촉진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만일 필요하다면 군에 복무할 의지를 표명하는 경우 유엔의 감독 하에 병역을 수행할 수 있다.”(The Right to Refuse Military Service and Orders, 1968년 8월)
하지만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의 대표자들이나 반식민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탈식민국가들의 실질적인 독립과 완전한 주권행사를 위해서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반대의사를 강하게 표명했다. 그들이 보기에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보편적인 인정은 서구가 ‘제3세계’의 실질적인 독립을 방해하려는 ‘사다리 걷어차기’에 불과했다.
반-아파르트헤이트, 반전운동과 반식민운동을 묶다
물론 ‘제3세계’ 대표자들 중에서도 병역거부권을 평화를 위한 방안으로서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블록 등에서 온 대부분의 대표자들은 ‘침략적이거나 제국주의자들의 전쟁들에 복무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자신들의 국가를 지키고 정당한 이유로 무장을 하고 싸우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전운동과 반식민운동은 양측이 공감대를 만들 수 있었던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갈등을 이어갔다. 1970년대 중반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가 국제적인 문제가 되면서 유엔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에 대한 논의는 비로소 새롭게 진전될 수 있었다.
1973년 네덜란드의 반-아파르트헤이트 활동가 시처 보스그라(Sietse Bosgra)가 유엔에 제출한 ‘앙골라, 모잠비크, 그리고 기니-비소에 대한 포루투갈의 지배에 대항하는 해방운동의 무장투쟁에 대한 보고서’는 국제법이 아파르테이트 체제 하에서 병역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지원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와 식민주의의 희생자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지원은 이러한 해방운동들을 지원함으로써 압제자들을 몰아내는 데 협조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포르루갈 군대로부터 탈영하거나 입대를 거부하는 것은 포르투갈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싸움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두고 보편적인 ‘권리’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거부자들에 대한 국제적인 지원이 <세계인권선언>에 적힌 전쟁법과 난민법에 기초했다고 설득했다. 탈영자들과 거부자들에 대한 지원은 포르투갈의 지배가 불법이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서구 유럽의 국가들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탈영자들을 제한 없이 정치적 망명자들로 인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덴마크 정부가 아파르트헤이트 거부자들에게 준 지위는 국제적인 지원의 모범으로 소개되었다.
보스그라가 보고서를 제출한 지 1년이 좀 더 넘는 후에 유엔총회는 아파르트헤이트 범죄에 대한 규탄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아파르트헤이트 범죄에 참여한 개개인을 상대로 법적 책임을 묻도록 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서 아파르트헤이트에 참여하는 범죄를 피하기 위해서 징집에 협조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국제적 의무가 되었다.
그럼에도 양심적 병역거부는 보편적인 ‘권리’로서 인정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유엔총회는 양심적 병역거부권 인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병역거부를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하는 데 사용되는 군대나 경찰력에 복무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라고 명시적으로 인정한 첫 사례였다.
병역거부에 대한 이처럼 명시적인 인정은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흑백분리정책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탈식민국가의 대표자들에게도 폭넓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 결의안의 양심적 병역거부권 인정은 비록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특정 정책에 국한된 인정이기는 했지만 후일 유엔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에 대해 보다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논의의 기초가 되었다.
유엔인권위원회 역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반대하는 높은 여론에 힘을 입어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새롭게 다룰 수 있었다. 1980년 네덜란드 대표가 인권위원회에서 국가적 양심적 병역거부 정책들에 대한 현황에 대해 조사하도록 사무총장에게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안했다. 이 제안을 반대하는 대표자들도 있었지만 결의안은 결국 통과되었다.
이듬해인 1981년 인권위원회의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보호에 대한 보조위원회’는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제안했다. 새로운 연구조사는 오스비온 에이데(Asbjoen Eide)와 차마 무반가-치포요(Chama L. C. Mubanga-Chipoya)가 맡았다. 1982년 에이데와 무반가-치포요가 제출한 예비보고서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거부를 모든 ‘침략적 전쟁’에 적용하여 양심적 병역거부를 보편적인 양심의 자유 차원에서 다룰 것으로 제안하는 결론을 내렸다. 덴마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남아공에서 병역거부로 망명한 사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망명을 받아들이는 국가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엔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보편적인 권리로서 인정하는 과정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국제적 비판이 주요한 사건이었다면 에이데와 무반가-치포요의 보고서는 논의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반전운동의 무풍지대’에서 공감대는 어디에
소위 ‘국제인권기준’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보편적 권리로서 인정한 결과는 이처럼 지난한 논의 끝에 나온 것이다. 여기서 탈식민국가의 대표자들과 반식민운동의 활동가들이 입장을 바꾸게 된 계기를 주목해야 한다. 이들 중 누구도 인권이라는 가치에 의해 찍어 눌리진 않았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것이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주로 서구의) 반성을 넘어서 당대의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인종차별과 군사적 점령을 해결하기 위한 효과적인 정책이 될 수 있다고 받아들였을 따름이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인정이 비서구 국가의 주권보장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탈식민국가의 대표자들 역시 보편성에 대해 공감했던 것이다.
유엔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둘러싸고 오간 논의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탈식민국가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보편적인 인권으로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 곤혹스러운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은 게다가 남북 간에 전쟁을 치루고 군사적 대치를 이어오고 있다. 한국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나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 심지어 베트남전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에서도 빗겨난 ‘반전운동의 무풍지대’로 오랫동안 지내왔다.
이 상황에서 국제인권기준이라는 것을 가지고 탑-다운 방식으로 ‘찍어눌러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오히려 더 고립만 가중시킬 것이다. 인권의 보편성은 그런 식으로 찍어누르는 것이 아니라 공감대를 확장시켜 나갈 때 수용될 수 있다. 문제는 그 공감대를 어디에서 어떻게 찾느냐는 것이 아닐까.
※ 이 글은 콜롬비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제레미 케슬러(Jeremy K. Kessler)가 쓴 ‘The Invention of a Human Right: Conscientious Objection at the United Nations, 1947-2011’(2013)을 주로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