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평화’와 ‘전쟁’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 둘이 우리 사회에서나, 정치에서나, 교육에서나 동등한 무게로 균형 있게 다루어지고 추구되어야 할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 나에게는 마치 ‘배부름’과 ‘굶주림’을, ‘평등’과 ‘차별’을 동등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처럼 어리석게 들린다. 평화는 보편적으로 지향해야 할 상태이고, 반면에 전쟁은 피해야 할, 끝내야 할 상태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쟁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그 목적과 이유로는 평화를 들곤 한다. 평화는 목적이 될 수 있지만 전쟁은 목적이 될 수 없다. 인권과 같은 우리가 합의하고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 체계는, 평화, 자유, 평등, 진실 등의 가치 판단을 담고 있고 분명한 기준과 방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은 종종 잊히고 무시당한다. ‘차별할 권리도 인권’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 ‘반(反)인권적 주장과 인권 옹호의 주장을 공평하게 다루라’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가짜 뉴스나 음모론, 차별·폭력 선동을 의견의 다양성으로 포용하라고 요구한다. 전쟁과 평화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보편적 가치인 평화 쪽이 억압당하고 내몰릴 때가 더 많은 것 같지 않은가. 평화의 목소리는 정치적이라고, 반국가적이라고 공격받고 소수의견이 되기 십상이다. 반면 전쟁의 언어와 도구들은 현실주의를 내세우며, 혹은 산업과 상품이라는 명목으로 사회나 학교에 받아들여지고 유통된다.

‘방위산업’은 전쟁을 산업과 상품의 형태로 포장하는 말이다. 방위산업을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킬 첨단 기술 혹은 외화를 벌어올 수 있는 먹거리라고 부를 때, 전쟁과 살상을 준비하고 조장한다는 그 본질은 가려진다. 국내 최대 규모의 무기박람회인 서울 ADEX(Seoul International Aerospace & Defence Exhibition,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는 그 가장 대표적인 현장이다. 겉으로는 ‘첨단 산업 전시회’, ‘국방 기술의 축제’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무기가 거래되고, 전쟁을 상품화하는 공간이자 행사이다.

특히 올해 ADEX에는 팔레스타인 학살에 깊이 관여한 이스라엘 전범 기업들이 대규모로 참가한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에서의 학살에 대해 국제 사회의 규탄이 거셈에도 학살 무기를 만들고 판매하는 기업들도, ADEX 주최 측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해 온 무기들을 ‘실전 검증된 무기’라고 홍보하는 전범 기업들이 동참하는 것은, ADEX가 전쟁과 폭력을 미화하고 전쟁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꾀하는 국제적 공모의 장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행사에 청소년들이 ‘진로체험’이라는 이름으로 동원되고,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참가가 장려되고 있는 실정이다. ADEX는 ‘퓨처스데이(Future’s Day)’, ‘학생의 날’을 지정해 학생을 대상으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관련 직무, 채용 정보, 기업 홍보를 결합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무기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을 시뮬레이션 체험하는 부스도 있다. 일부 학교는 이 행사를 현장체험학습, 진로탐색 활동으로 공식 승인하고 단체로 참가한다. 교육청이 ADEX에 부스나 홍보관을 내고 취업 연계를 하는 사례도 있다. 전쟁 무기와 전범 기업들이 미래 산업이자 첨단 기술로, 진로로 청소년들에게 다가가고, 이것이 공교육에 의해 승인과 지원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 동안 교육당국에서나 학교에서나 전쟁 무기를 미화하고 체험하는 것이 보편적 교육적 가치에서 적절한지 고민하고 토론한 적이나 있을지 의문이다. 하다못해 이러한 전쟁 무기 박람 행사를 지원하는 일이 편향적이라는 논란이라도 일어야 마땅한 일인데 말이다.

일부 국가에서는 이러한 무기박람회들을 ‘청소년 관람 불가’ 행사로 제한하고 있고, 일반인 관람을 하지 않는 식으로 행사를 열기도 한다. 방위산업을 돈벌이로만 상찬하고 전쟁 무기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어 보이는 한국 사회에 비하면 큰 차이가 느껴진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쟁과 군수산업이 엄연히 성행하는 와중에, 단순히 누군가의 접근을 막는 것만으로는 전쟁과 폭력의 실상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평화를 배울 기회를 보장할 수 없다. 평화권이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평화에 대해 배우고 전쟁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는 것도 청소년들의 교육권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무기란 것은 상서롭지 못한 도구이니, 만물이 이를 싫어한다.(兵者不祥之器, 物或惡之)”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2000년 전에 이미 나온 현명한 통찰은, 오늘날 전쟁 무기가 훨씬 더 발달하고 산업이자 권력이 된 시대에는 더욱더 곱씹어야 할 내용이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우리 사회의 주류가, 교육과정의 밑바탕이자 목표가 되어야 한다. 전쟁과 무기, 군수산업을 평화의 가치로 평가하고 비판하며 경계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청소년들은 무기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무기가 만들어 내는 죽음과 불평등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도 그렇고 모든 시민이 가자지구에서처럼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학살의 문제점을 알고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ADEX에 대해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방향을 그런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