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쭝(비폭력 트레이닝 트레이너)

 

 

사울 알린스키가 쓴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은 보기 드물게 사회운동 방법론을 다룬 책이며, 그런 것 치고는 더욱 드물게 꽤 스테디셀러다. 2008년에 하드커버로 나왔는데, 2016년에는 소프트커버로 2쇄가 나왔다. 심지어 이 책을 기반으로 한국 사회변화의 방향을 제언하는 책(<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도 나왔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함께 읽는 책 모임도 많이 있다. 나도 두 곳의 모임에서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었다. 심지어 책을 중고로 샀는데, 목차에 챕터별 발제자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전 주인도 이 책으로 모임을 한 것이다. 그만큼 이야기할 거리도 많고, 무엇보다도 꽤 재미있다. 번역이 그다지 깔끔하지 않은데도 3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이 술술 읽힌다.

그러나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과는 좀 달랐다. 급진주의자라기보다는 실용주의자에 가까웠고, 규칙이라기보다는 참고자료 같아 보였다. (책의 부제는 “현실적 급진주의자를 위한 실천적 입문서”인데, 내 생각에는 이게 훨씬 내용에 부합하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시작하는 급진주의자

일단 이 책이 강조하는 활동 방식은 우리가 ‘급진’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유형-과격하고 비타협적인 투쟁-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 사울 알린스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타협을 찬양한다. 타협은 핵심적이고 아름다운 단어라는 것이다. 그는 “당신이 무에서 출발한다면 100%를 요구하고 30% 선에서 타협하라. 당신은 30%를 번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여러 차례 과격한 활동방식을 비판했다. 혁명은 개혁으로부터 시작되며, 개혁에 대한 반대를 부추기는 사람은 무의식 중에 극우파의 동맹자가 된다는 것이다. 경찰을 “돼지”, “쌍놈”이라고 부르는 급진주의자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자신을 정형화시켜서 남들이 “아, 뭐 쟤는 그냥 저런 얘”라고 반응하고 즉시 돌아서게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한 마디로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급진주의자는 “내가 원하는 세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부터 시작”하는 사람이며, 이는 곧 체제 내부에서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경찰과 군 방위군이 폭력을 행사한 뒤 많은 학생들이 그에게 “여전히 우리가 현 체제 내부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이것이다.

세 가지 중 하나를 하라. 첫째, 가서 통곡의 벽을 쌓고 너 자신을 위로하라. 둘째, 미쳐버린 후에 폭탄 투척을 시작하라. 하지만 그 방법은 단지 사람을 우파로 돌아서게 만들 뿐이다. 셋째, 교훈을 얻어라. 고향으로 가서 조직화하고, 힘을 모아서 다음 전당대회에서는 너희 자신이 대의원이 되어라.

또한 ‘규칙’이라는 것도 이 책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다. 여러 가지 원칙이 등장하지만 절대적인 규칙은 없다. 이 책에서 알린스키는 여러 차례 독단적 교리를 혐오한다고 강조했으며, 특정한 주장이나 전술이 교조화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급진주의자들은 유연해야 하며, 유동적인 정치적 상황에 적응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알린스키는 “우연이 일어났을 때 창의적 조직가는 바로 알아보고 그것이 그냥 사라지기 전에 붙잡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전술을 만들어냈으며, 우연적 요소도 놓치지 않고 적극 활용했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사례는 1939년 7월 14일 대규모 집회에 대한 것이었다. 7월 14일은 프랑스 혁명 기념일이며, 이 집회 일정은 매우 상징적으로 선택된 것이다…라고 시카고 역사에 쓰여였지만 이는 훼이크다.

그 날이 선택된 것은 오로지 우연이다. 마침 집회 장소가 비어있었고 참가단체들도 한가한 날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 기자가 “프랑스 혁명 기념일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은 너무 혁명적이지 않냐”고 질문을 했고, 알린스키는 ‘이런 우연의 일치가!’라고 생각한 뒤 모든 집회 연설자들에게 ‘프랑스 혁명 기념일’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는 거의 모든 연설의 기본 주제가 되었고, 역사는 “계산되고 계획된” 전술로 이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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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표지 이미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윤리적으로 포장하라”

이미 충분히 눈치챘겠지만, 알린스키는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이다. 그는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나쁜 수단을 동원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그에게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는가’라는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지, 그 목적은 치러야 할 대가만큼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 또한 수단이 과연 잘 작동할지 하는 것이다. 그는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나서 그것을 윤리적으로 포장하라”고 말한다.

그는 심지어 폭력 투쟁에 대해서도, 그것이 정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실행하고 이를 윤리적으로 포장할 수 있는 사람 같아 보인다. 실제로 책에 실린 활동 사례들을 보면 (아마도 효과적인 조직화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폭력 투쟁을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한 온갖 기만과 말 바꾸기에는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의 주장들은 논란의 여지가 매우 많다. 대강 몇 개만 꼽아봐도 그렇다.

혁명을 위한 순교자를 갖기 위해서는 서너 명의 사람이 죽어야만 하지만, 열 명이 넘어서는 안 된다. 그 숫자를 넘어서면 순교자가 아니라 오물처리 문제만 생긴다.

당신 조직이 수적으로 작다면 조직원들을 보이지 않게 숨기고는 큰 소리를 내어서, 그것을 듣는 사람이 당신 조직의 숫자가 실제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믿게 만들라.

표적을 선별하고 고정시키고 개인화시키고 극단적인 것으로 만들어라. 표적은 구체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결정이 내려지고 나면 자신의 대의명분이 100% 옳으며 상대방의 주장은 100% 틀렸다는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겨준다. 꽤 많은 경우 그 동안의 활동을 성찰하게 만들지만, 아마 때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것이다. 꼭 윤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사회운동 효과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어떤 전술도 정확히 동일할 수는 없다”

나는 특히 극단적인 표적을 만드는 방식에 대해 동의하기 어려웠다. 자칫하면 사회 구조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상황을 축소하고, 표적에서 제외된 나머지 사람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100% 옳고 너는 100% 틀렸다”는 식으로 싸우다 보면, 10%의 작은 허점으로도 큰 실패를 초래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특정 진영의 승리를 위한 싸움으로 변질되기도 쉽다.

‘조직’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책에는 ‘활동가’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알린스키는 대신 ‘조직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변화는 힘으로부터 오며, 힘은 조직으로부터 온다”고 믿었다. 또한 “강력한 조직을 세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지루하지만, 그것이 게임이 진행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조직화되지 않은 시민행동에 종종 거리감을 두었다. (이에 대한 비판은 <21세기 시민혁명>에 자세히 나온다.)

나는 그의 주장에 무척 공감하지만, ‘다른 길은 정말 없는가’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는 (아마 다른 나라에서도) 시민들이 직접 크고 작은 시위를 제안하거나 운영하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운동 조직이 활기를 잃어가고 있으며, 조직 없는 ‘독립활동가’, ‘1인활동가’가 등장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알린스키 말대로 게임의 룰을 무시한 행동인 것일까?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나와는 또 다른 지점에서 각자의 반론이나 질문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알린스키는 (하늘나라에서) 이를 무척 반가워 할 것이다. 자신의 주장이 교조화되는 것에 대해서도 무척 반대했으니까.

그는 실패한 조직가의 사례를 들면서 “마치 나의 발표를 한마디 한마디 재생하는 녹음테이프를 듣는 것 같았다”고 지적했다. “어떤 상황도 그 자체로는 반복되지 않고 어떤 전술도 정확히 동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지금 여기서 우리의 규칙과 전술은 무엇이어야 할지, 그 대답은 아마 우리의 경험과 상황을 토대로 우리가 직접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많은 한국의 운동조직에게 이것이 가장 핵심적이고 매우 시급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급진주의자의 규칙>은 꽤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 같다. 되도록 같은 운동을 하는 사람들끼리 혹은 같은 조직의 동료들끼리 읽어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