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운(영화감독)

전쟁없는세상 주:

이 글은 3.8여성의날을 기념하여 기획한 글입니다. 전쟁과 군사주의가 어떻게 여성을 착취하는지에 대한 글을 기획하면서 이고운 감독께 글을 부탁했습니다. 이고운 감독은 2016년 한국내 미군기지 주변 클럽으로 이주노동 오는 필리핀 여성들과 그 산업 생태계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호스트 네이션>을 연출하였고, 현재 한국내 기지촌 미군위안부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방파제의 여자들>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매년 봄이 되면 김연자 선생님은 팀스피릿 훈련을 기억하신다. 김연자 선생님은 1990년대 기지촌 여성 문제를 최초로 공개 증언한 생존자 활동가로 현재 내가 찍고 있는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중 한 분이다. 김연자 선생님은 미군을 따라 도착한 3월의 추위가 덜 가신 농촌과 산촌을 기억할 때마다 몸서리가 쳐진다고 한다. 전쟁을 가정한 훈련이라 미군들의 긴장과 폭력성이 한껏 고조돼 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몸서리쳐졌다고 한다. 그리고 20년이 넘는 기지촌 생활을 그만둔 것도 어느 해 봄 팀스피릿 훈련장 한 천막 업소에서 바닥 중의 바닥을 경험하며 하느님을 찾게 되면서 라고 한다.

김연자

1990년대 기지촌 여성 문제를 최초로 공개 증언한 김연자 선생님

김정은과 트럼프의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뒤, 미국이 키리졸브와 독수리 훈련을 폐지한다는 발표를 보며 나는 김연자 선생님의 팀스피릿 훈련이 떠올랐다. 1968년 북한군의 청와대 습격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한미 연합훈련을 기원으로 팀스피릿 훈련은 이후 키리졸브, 독수리 훈련으로 이어져 50년 동안 실시되어왔다. 세계 최대의 야외 기동 훈련이라는 독수리 훈련은 1980년대에는 한미 연합 병력 최대 20만 명이 90일 동안 실시하기도 했다. 현재 구리시의 인구가 20만 명이 못 되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큰 병력이 남한 전역에서 모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휴식과 긴장 해소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여성이 동원되었을지 생각해보면 아득해진다. 김연자 선생님의 자전 수필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 분 전까지 악을 쓰다> 중에서 한 부분을 옮겨본다.

팀스피리트 훈련이 시작되어 여자들은 업주를 따라 경상북도 예천으로 향했다. 나도 16통 할매를 따라 예닐곱 명의 동료와 함께 옷 몇 가지만 챙겨들고 눈발 속에 택시를 대절해서 뒤따랐다. 16통 할매는 아메리카 타운에서 달러 장사와 미제 물품 장사를 했는데, 훈련 기간에도 훈련지로 가서 반짝 장사를 했다. 아메리카 타운에서는 우리 말고도 ‘팬 하우스 클럽’ 등 여러 곳에서 여자들을 데리고 원정을 나갔다. 울긋불긋 화려하게 꾸며논 박정희 대통령이 다녔다는 초등학교 앞을 지나고, 굽이굽이 산을 넘어 예천 공군 부대 앞에 도착했다. 밭 위에서 천막을 치고 임시 클럽을 만든다고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한국 공군 부대 앞에 있는 닭튀김 집에서 돈을 주고 탁자와 의자를 몇개 빌려와 늘어놓고, 천막 둘레를 요란한 깜박이 등으로 장식했다. 홀 간판만 휘황찬란했다.

바람이 스며드는 임시 천막 안에서 펄럭이는 천막을 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춤추는 데도 만들고 재즈와 트위스트가 번갈아 흘러나오니 천막은 제법 클럽 분위기가 났다. 천막 홀 뒤쪽에는 사과 궤짝을 뜯어 판자로 칸을 막아놓은 방들이 촘촘히 들어섰다. 작은 연탄난로로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았는데도, 신문지로 도배한 널빤지 사이로 바람이 쉴 새 없이 들어왔다. 죽 늘어선 방 맨 끄트머리에는 구덩이를 파고 드럼통을 박아 화장실을 만들었다. 이 멀리까지 원정을 나왔으니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군산에서 온 우리 중 몇 명은 천막 클럽에서 일했고, 다른 여자들은 주변 농가의 빈방을 빌려 탁자를 들여놓고 일할 데를 만들었다. 주변에는 전국의 기지촌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먹는 곳, 입는 곳 가릴 것 없이 이런저런 가게를 차렸다. 여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왔는데, 동두천에서는 주로 빚이 많은 여자들이 포주의 손에 억지로 끌려온 경우가 많았다. 나도 담요 부대로 다닌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아무리 미군들을 많이 상대해도 수입의 반은 고스란히 포주들에게 갔다. 또 군산이나 다른 지역 기지촌에서 일할 때는 소문이 안 좋게 날까 봐 비싸게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 임시 기지촌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갑자기 시골 동네에 가게들이 들어서고, 논밭 위에서 밤새도록 음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여자들이 버젓이 시골 동네를 헤집고 돌아다녀도 동네 사람들은, 속으로야 ‘에이, 더러운 것들’이라고 욕을 할지언정 없는 방도 만들어 내줄 정도였다. 여자들은 팀스피리트 훈련지에 갔다 오면 한결같이 심한 병을 얻었다. 골병이 든 몸은 살갗이 헐었고, 성병이나 임신의 고통을 겪었다. 훈련이 고될수록 미군들은 여자를 험하게 다뤄서 그 고통이 평소보다 몇 곱은 더했다. 이곳에서도 성병 검진은 빠지지 않았다. 보건소 직원들이 파견을 나왔다. 여자들이 전국에서 몰려왔으니 검진 카드가 없는 이도 많았는데, 카드가 있든 없든 검진을 받게 했다. 이런 곳까지 모여든 여자들도 대단했지만 정부도 참 대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메리카타운 왕언니, 죽기 오 분 전까지 악을 쓰다> 김연자, 삼인, 2005]

미 인도-태평양 사령부의 봄은 아시아 전역의 순환 훈련의 연합체인 파시픽 패스웨이(Pacific Pathways) 훈련으로 시작된다. 태국의 코브라 골드(Cobra Gold) 훈련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키리졸브, 독수리 훈련 그리고 필리핀의 발라카탄 훈련으로 봄 순환 훈련을 마친다. 그리고 여름이 시작되면 호주의 하멜(Hamel) 훈련, 말레이시아의 케리스 스트라이크(Keris Strike) 훈련, 인도네시아의 가루다 쉴드(Garuda Shield) 훈련, 태국의 하누만 가디언(Hanuman Guardian) 훈련 그리고 한국의 을지 프리덤 가디언(Ulchi Freedom Guardian)을 거쳐 일본의 오리엔트 쉴드(Orient Shield)로 순환 훈련을 마무리한다. 미국 하와이에서 출발한 미군 병력과 자원이 아시아 전 지역을 순환 형태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와 전통의 아시아 각 나라의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각 국가의 성판매 여성들의 상황은 김연자 선생님이 기억하는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한다. 마치 과거 한국의 팀스피릿 훈련지에서 그랬듯이 경제발전 정도가 낮은 국가들은 이 훈련이 성판매 여성뿐 아니라 군용식량과 탄피를 줍는 아이들까지 특수를 누리는 연례 행사가 되고있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봄 한국의 키리졸브, 독수리 훈련 그리고 을지프리덤 가디언 훈련이 폐지되었다. 올 것 같지않은 변화와 균열이 마침내 한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재 나는 <방파제의 여자들(가제)>이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지난 2014년 6월 25일 122명의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나는 이 소송을 따라가며 한국 정부와 미군이 반세기에 걸쳐 조직적으로 시행해온 기지촌 성병 관리의 역사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일 제국주의자는 군 위안부 제도를 정조 방파제라고 부르기도 했다. 군대와 사회 사이에 방파제 역할을 하는 특별한 여성들을 만들어서 군인이 민간의 정숙한 부녀자를 강간하는 것을 막고, 지역 사회에 성병 창궐을 예방한다는 것이다. 군 위안부는 단지 해외 주둔 군인의 성적 위안 만이 아니라 병력 보호와 사회 보건 목적에 합당한 제도라는 것이다. 해방 후 정부는 공창제를 법적으로 폐지하지만, 유엔군 위안부 혹은 미군 위안부만 예외적으로 국가에 등록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강제 성병 검진을 해왔다. 그리고 정부는 1980년대 말까지 성병에 걸린 기지촌 여성들을 초법적으로 감금 처벌해왔다. 일본제국주의 시절에 피 식민지인으로서 당한 가혹한 역사에서 기원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계승한 이 제도는 2014년에야 법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됐다.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며 기자회견을 했다.

지난 1월 28일 평화운동가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이신 김복동 선생님께서 소천하셨다. 그 소식을 들은 김연자 선생님께서 내게 연락해오셨다. 김복동 선생님 빈소에 조문하고 싶다고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하셨다. 아픈 다리를 절며 송탄에서 서울로 올라오신 김연자 선생님을 모시고 빈소에 섰다. 두 분은 2000년대 초 국제사회에 군대와 성폭력 문제를 증언하는 여러 자리에 함께하신 경험이 있다고 한다. 당시 70대의 김복동 선생님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를 증언하시고, 50대의 김연자 선생님은 기지촌 미군 성폭력 피해를 증언하셨다고 한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증언이 끝나면 두 분은 심란한 마음에 서로를 보듬을 시간이 없었다고 그게 좀 후회된다고 김연자 선생님이 기억하신다. 1990년대 시민사회가 기억 투쟁의 일환으로 우리 사회의 터부였던 국가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개인의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하였고, 그 최전선에 김복동 선생님을 비롯한 일본군 성노예 피해 증언이 있었다. 김연자 선생님 같은 분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30여 년 뒤 김복동 선생님 빈소에서 헌화하시는 김연자 선생님을 보니, 김복동 선생님을 시작으로 이어져 오는 이 여성 운동의 역사에 새삼 숙연해졌다. 운동은 지루하고 변화는 영원히 올 것 같지 않지만 느리게 천천히 오고 있다. 미투#metoo 운동 또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증언에서 시작된 역사를 이어받아 한국에서 유독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이 여성운동의 불씨가 지핀 평화 운동, 반군사주의 운동이 한국 땅을 넘어 아시아 전역의 평화, 반군사주의 운동가들에게도 영감이 되길 바라본다.

 

 

지난 여성의날 특집 글들 

왜 군인은 ‘침묵’ 하는가? – 군대와 미투(#Metoo) 운동

여성, 병역거부를 선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