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석 (전쟁없는세상 회원)

 

두 개의 아웃팅이 지키고자 한 정체성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는 군형법 92조 6항에 의거해서, 몇 년 전에는 육군이 그러더니 이제는 해군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동성애자 장병들을 색출하는 함정수사를 펼쳤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무슨 공안검사가 운동권 주동자 색출하듯이 군은 게이 데이팅 앱에 잡입해서 동성애자 군인을 찾아내었고, 중세에 고해성사라도 하듯이 관계 시 포즈는 어땠는지 사정은 했었는지 언제부터 남자를 좋아했는지 따위의 질문을 물어보기도 했다.

재밌는 것은 92조 6항을 보면 항문성교와 추행이 한 조문 아래에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항문성교와 추행이 대체 어떤 관련이 있으며, 합의 하의 성관계가 어째서 추행과 동일시되는 것인지 통 모를 일이다. 분명 군형법 92조 6항은 항문성교에 대한 집착과 항문성교로 인해 침범당할 호모 소셜과 남성 정체성의 위기감이 바탕이 된 조항 같다. 항문을 삽입당했을 때 침범당하는 남성됨, 남성성이라는 정체성이 문제라도 되는 것이었을까. 이 일을 둘러싸고 많은 여성단체와 성소수자 단체들이 성명을 내고 비판을 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해군에서는 상관의 성폭력으로 인해 피해자 여군이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다. 재밌는 것은 최근 여기저기서 주목을 받고 있는 래디컬 페미니즘 성향의 페미니스트들 중 일부는 이 두 사건 뒤에 여성단체와 성소수자 단체들이 게이 장병 색출 사건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자살한 여군 사건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비판을 했다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급기야 워마드 같은 근본주의적인 페미니스트들은 기존의 여성단체들이 전부 게이 중심이라고 비판하면서 “게이민우회냐”, “게이의 전화냐”는 식으로 비꼬았다. 동성애 혐오표현인 “X꼬충”같은 용어가 등장하기도 하고, 남성 군인이 남성 군인을 성추행하거나 죽이는 사건을 두고서 “자적자(자X의 적은 자X)”에 불과하다고 조롱하고, 급기야 게이들을 아우팅 시켜야 한다고 함정 수사를 했던 헌병 수사관들과 마찬가지로 게이 데이팅 앱에 들어가서 동성애자 개인들의 신상을 유포시키기도 했다.

군에 의한 아우팅과 워마드에 의한 아우팅, 크게 상관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지만, 나는 여기서 모종의 공유된 하나의 징후를 느꼈다. 남성의 정체성이 침범당하고 허물어질까봐 두려워하는 이성애자 남성 연대의 남성 정체성에 대한 집착과, 역시 마찬가지로 여성 억압을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교차성을 ‘스까’라고 조롱하고 억압의 근원이기도 한 순수한 여성의 정체성을 기이하게 지키려고 하는 알 수 없는 운동의 등장.

우리는 분명 정체성 다원주의적인 다문화 세계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만큼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예컨대 아이리스 영 같은 정치철학자는 한쪽에서는 도시화가 진행되지만 다른 한쪽에선 여전히 지역주의 같은 정체성이 중요하게 작동한다고 말한다. 낸시 프레이저 같은 페미니스트 역시 사회주의가 이상향을 잃어버린 지금은 ‘인정투쟁’이 계급투쟁을 대체해버렸다고 분석한다. 의미 있는 정치적 기획이 실종되었고, 그럼에도 여전히 동성애자와 여성에 대한 제도적 인정은 미비한 신자유주의의 풍경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불안할수록 인간이 특정한 정체성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은 이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다.

 

평화주의자가 반대하는 것, 퀴어정치가 비판하는 것

군사주의와 퀴어라는 주제로 글을 요청 받고나서, 어떻게 이 두 주제가 연결될까 고민이 되었다. 대체 둘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물론 전쟁이나 폭력, 군사주의적 남성성은 퀴어의 삶과 불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평화주의자는 군사주의의 폭력에 반대하고, 퀴어정치는 동일성에 집착하는 정체성/동일성 정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아마티야 센의 『정체성과 폭력Identity and Violence』이라는 책에서 센이 주장하는 정체성과 폭력 간의 관계가 떠올랐다. 정체성은 퀴어가, 폭력은 평화주의가 전복시키고자 하는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티야 센은 정체성과 폭력 간의 연결을 추적한다. 센에 따르면 오로지 독보적인 단일한 정체성(계급, 지역, 성별, 인종)을 강요하는 정체성 환원주의는 개인의 정체성 소속관계의 선택을 가로막는 제약으로 작동할 뿐 아니라, 분파주의seperatism와 지역주의parocialism를 조장함으로써 대립과 갈등을 부추긴다. 이는 종교나 인종의 차이로 인해 벌어지는 학살, 전쟁, 테러 등을 떠올리면 쉽게 납득이 된다. 센에 따르면 “우리가 이른바 독보적인 정체성(대개는 호전적이다)을 갖게 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의식이 길러지면 폭력은 더욱 조장”(17쪽)된다.

센에 따르면 “정체성은 또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것도 닥치는 대로 죽일 수 있다. 한 집단에 대한 강한, 그리고 배타적인 소속감은 다른 집단과의 거리감과 분리됨의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집단 내의 연대성은 다른 집단과의 불화를 부채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적당히 선동되고 조장된 한 집단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다른 이들을 잔인하게 폭행하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31~32쪽)있는 것이다.

이러한 센의 문제의식은 공동체주의의 정체성 발견론과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예컨대 공동체주의는 우리가 가족, 국가, 지역공동체 같은 정체성들을 부여받고 태어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개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부여받은 정체성들이 강요당하거나 변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한편 세계가 서구문명과 동양문명의 충돌로 이루어져있다는 문명충돌론은, 문명 내부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을 은폐하고 단순화한다.

이런 견해들은 단 하나의 정체성(정체성 환원주의)을 중시함으로써 폭력과 테러, 전쟁과 학살을 부추긴다. 다문화정책을 비판하며 백인 인종 순혈주의를 지키고자 총기난사를 했던 노르웨이와 뉴질랜드의 테러범을 보라.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고자 게이 클럽에 테러를 했던 올랜드의 총기난사 사건을 기억해보라. 여기서 정체성이 사람을 죽였다. 군 내부의 동성애자를 “사내답지 못하다”라고 색출하려는 광기도, 생물학적 근본주의에 입각해 트랜스젠더를 향해 “젠신병자”라고 혐오표현을 쏟아내는 트랜스젠더 배제적인 페미니스트(TERF)들의 퇴행도, 정체성이 어떻게 폭력과 연관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는 생각이 든다.

Flower_carpet_at_Christchurch_mosque_shooting_memorial,_Thursday_21_March_2019

사진

뉴질랜드 모스크 총기난사 추모 현장 사진(위)과 올랜도 게이 클럽 총기난사 추모 현장 사진(아래)

 

정체성을 가로지르며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정체성이 억압의 원인도 되지만, 동시에 그런 피해자 정체성에 놓인 상태에 애착을 갖고서 그 정체성에 갇혀버린 채 인정투쟁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다. 나아가 그런 정체성 환원주의에 갇힌 채 근본주의의 폭력으로 치닫는 사람도 있다. 교차성에 대한 논의대로 사람은 하나가 아닌 다양한 정체성을 동시에 부여받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정체성 역시 고정되거나 선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센은 “우리 시대에 화합에 대한 바람은 인간 정체성의 다원적 성격을 더욱 명료하게 이해하는 데 상당 부분 달려 있다. 넘나들 수 없는 단 하나의 확고한 분리선으로 첨예하게 갈라지는 것에 저항해 서로를 가로지르면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다원성임을 인식해야”(18쪽)한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군사주의와 폭력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이자 병역거부자로서, 또한 동시에 성별이분법과 성차별에 반대하는 퀴어이자 페미니스트로서, 국가, 민족, 남성, 가족, 이성애 같은 내가 선택할 수 없었고 단지 발견할 수밖에 없었던 정체성이 불편했지만, 내가 부여받든 선택했든 어느 한두 가지 정체성만으로 나를 설명해야만 하는 환원주의적인 상황도 불편했다. 왜 나는 누구누구의 팬이나 어떤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나의 소속관계를 정할 수 없는 걸까? 여러 정체성중 어떤 게 중요한지 의미를 부여할 자유도 있어야하는 게 아닌가?

군과 극우 개신교의 동성애자 탄압,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생물학적 근본주의가 서로 닮아간 사례에서 보듯이, 정체성 환원주의가 폭력과 대립을 부추긴다면 결국 개인들이 다양한 정체성 소속관계를 선택할 수 있음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이 해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별이나 성적지향, 가족이라는 정체성이 운명이거나 고정된 것임이 아님을 보여주는 퀴어운동가들의 다양한 투쟁들(예컨대 성중립화장실이나 동성결혼법)이나, 국가나 민족, 군인처럼 부여받는 정체성 역시 선택과 변경이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는 병역거부자들과 평화운동가들의 투쟁은 국가와 가족, 성별과 성적지향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정체성과 폭력’에 저항함을 보여주는 동일한 시도가 아닐까 싶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군사주의와 퀴어, 정체성과 폭력, 퀴어운동과 평화운동이라는 의제는 서로 만나게 될 수밖에, 아니 만나야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