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지만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전제로 할 때에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국민 다수의 동의를 받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인격적 존재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를 국가가 언제까지나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 신념에 선뜻 동의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제 이들을 관용하고 포용할 수는 있어야 한다.”
1년 전, 2018년 11월 1일 대법원은 사법사상 처음으로 병역거부자에게 무죄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리면서 위와 같이 말했다.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 민주주의의 정신’이기 때문에 병역거부자를 처벌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병역거부자들의 재판을 살펴보면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 과연 지켜지고 있는지, 대법원이 강조한 민주주의의 정신이 실현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헌법재판소의 지난 해 6월 결정 이후 수백명의 병역거부자들이 재판을 받았다. 여호와의증인 병역거부자들은 대부분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병역거부자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죄를 선고 받았다. 그 중에는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에 병역거부를 한 사람도 있지만, 헌법재판소 결정 이전부터 병역거부를 하고 재판 중이었던 사람도 있다.
유죄 판결의 근거와 이유는 대동소이하다. 과거 입영영장을 연기한 점, 입영영장을 받았을 때 바로 병역거부를 하지 않은 점, 병역거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거나 관련 활동을 하지 않은 점들을 근거로 “병역의무의 이행이 인격적 존재가치를 파멸시킬 정도로 신념이 깊고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대구지법 형사2단독 판결문 중)고 판단한다. 한편 전쟁없는세상의 병역거부운동에 적극 참여한 병역거부자에게도 “피고인의 현재 신념이 피고인의 삶의 일부가 아닌 삶의 전부로서 유동적이거나 가변적이 아니라고 현 단계에서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서울남부지법 판결문 중)며 유죄를 선고한다.
재판 과정 또한 재판 결과만큼이나 문제가 심각하다. 많은 재판이 병역거부자의 양심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극단적인 상황을 던진다거나 함정 같은 질문을 던진다. 강도가 가족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폭력을 행사할지 말지 묻는 것은 양심의 자유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양심을 흠집 내기 위한 공격일 뿐이다.
재판 과정, 그리고 그 결과로서 유죄 판결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 원인 때문이다. 재판부가 양심에 대해 굉장히 협소하게 해석하기 때문이고, 대법원에서 종교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 세운 기준을 기계적으로 모든 병역거부자들에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양심은 사람에 따라 양심의 모습, 양심이 형성되는 시기, 양심에 따른 행위, 발현되는 방법 들이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은 모든 폭력에 반대하지만 다른 사람은 군인이 될 수는 있어도 부당한 명령 만은 따를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행동하지만, 어떤 사람은 묵묵히 조용히 양심의 가치를 지켜간다. 어떤 사람은 입영영장을 받기 전에 평화주의자가 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제대한 이후에 평화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양심의 개별성, 복잡성에 대한 이해 없이 양심에 대한 협소한 해석을 바탕으로 대법원의 판례를 기계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에 양심을 심사한다는 명목으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가 반복되고 있다.
병역거부자들의 재판을 진행 중인 재판부는 특별하고 심각한 결격사유가 없다면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인정해줘야 한다. 대체복무 심사위원회에서 판단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 1년 전 대법원이 이야기한 민주주의의 정신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깊게 새겨야 한다.
2019년 11월 1일
전쟁없는세상
*사진은 작년 11월 1일 대법원의 무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 당시 대법원 앞에서 진행한 기자회견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