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직장내 장애인식개선교육 강사)
상당수의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해결하기 불가능해보이는 부조리와 맞닥뜨린다. 그 부조리는 ‘악마’ 혹은 ‘신’과 같이 다른 세계의 존재이거나, 공동체를 핍박하는 다른 나라일 수 있다. 더러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우리의 ‘왕’일 수 있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은 온갖 고생 끝에 자원을 모으고 힘을 길러 세상의 일부 혹은 전부를 바꿔놓는다.
이러한 게임의 서사는 사람들이 처한 사회적인 상황을 빗대어 표현하는 듯하다. 더욱이 가난, 차별, 권력의 독점, 전쟁 등의 상황은 수천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여전하다. 변화를 시작하기도 어렵고 끝내기도 어렵다. 게다가 변화에 실패했을 때 현실의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일은 컴퓨터를 끄거나 테이블을 엎는 수준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어려움에 더해 권력자로부터의 보복(백래시)을 겪으며 그 동안 만들어온 성과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성공적인 변화가 더러 있더라도, 보이지 않는 실패는 그것보다 더 많다.
이러한 어려움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느끼는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만든 보드게임이 있다. 이름부터가 <세상을 바꾸다>(약칭 ‘세바꾸’)인 이 게임은 사회 변화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장 직설적이면서도 실용적으로 던지는 게임이다.

사회운동 전략 보드게임 <세상을 바꾸다>는 전쟁없는세상이 펴낸 소책자 <어떻게 세상을 바꿀까?>에 수록된 운동설계워크숍 MAP(Movement Action Plan)을 기반으로 디자인한 게임이다. 사회운동의 여덟단계, 사회운동에 필요한 활동가의 4가지 역할을 기본으로, 진샤프가 정리한 사회운동의 여러 방법을 활용했다.
차근차근, 각자 역할 맡아 사회운동 단계 완수해야
게임 이름은 거창하지만 세바꾸에는 사회 변화에 관한 특별한 묘수가 있지는 않다. 한 방에 상황을 역전하는 방법도 별로 없고, 개인기로 불리한 상황을 뒤집기 어렵다. 대신 기본적인 방법론에 충실하여 운동의 단계를 하나씩 끌어올리는 턴제 게임이다. 사회운동이 생소한 사람들에게는 이 게임의 개념과 용어가 다소 익숙하지 않을 수 있으나, 큰 틀에서 보면 자원과 유닛을 모아 목표를 달성해 나가는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과 유사하다.
플레이어들이 수행할 사회운동의 단계, 각자의 역할은 사회운동 이론가 빌 모이어가 만든 ‘운동의 설계도(MAP, Movement Action Plan)’ 이론에 근거한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바꾸고자 하는 문제가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일상의 반복’ 단계에서 시작해 끝내 다수의 마음을 얻어 운동을 성공하고 그 성과를 지속하는 단계인 ‘투쟁의 지속’까지 총 8개 단계를 거쳐야 최종적인 승리에 다다른다.
각 플레이어는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각 역할은 ‘행동’의 유형별로 특수한 보정치가 있다. 먼저 ‘조직가’는 인력과 자원를 모으고 운동 단체가 겪는 여러 내부적인 어려움을 해소하는 내부 워크숍 등에 특화되어 있다. ‘시민’은 대중의 참여가 필요한 선전 활동이나 집회 등의 행동에서 강점을 보이며, ‘행동가’는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는 급진적이고 직접적인 행동, 상황의 후퇴를 막는 점거, 농성 등에서 이점을 얻는다. ‘개혁가’는 ‘교육’ 활동과 공청회, 사례 연구, 법률 제정 등 제도화된 방법으로 세상을 개혁하는 데에 유리하다.
각자의 역할을 근거로 플레이어는 ‘교육’을 통해 활동에 필요한 아이디어인 ‘행동카드’를 확보하고, ‘모금’과 ‘조직’을 통해 활동을 수행할 자원과 인력을 모아야 한다. 이후 ‘행동’으로 이동해 단계를 진전시키거나 많은 자원을 획득하는 행동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
특히 이 게임의 ‘행동’은 실질적으로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부분이다. 행동카드에 적힌 각종 행동(파업, 집회, 법안 제정 등)을 성공시키면 운동의 단계를 한 단계씩 올릴 수 있다. 단 행동을 성공시키지 못하거나, 반감을 살 수 있는 ‘행동’을 할 경우 기존에 이룬 단계를 끌어내리는 ‘반격’이 존재한다. 이는 실제 사회운동에서 권력자의 방해, 조직 내 여러 문제들, 대중들의 적대감 내지 무관심 등을 반영하는 것으로, ‘반격’을 받지 않도록 ‘행동’을 신중하게 결정할 필요가 있다.

행동 카드와 이벤트 카드. 행동 카드와 이벤트 카드는 실제 사회운동에서 활동가들이 실행하는 방법들, 겪는 일들에 기반했다. 각각의 행동 카드는 특정한 역할이 수행할 때 가중치가 발생한다. 또한 각 행동은 사회운동의 특정 단계마다 더 효과적이거나 덜 효과적이기도 하다.
게임은 이런 구성을 통해 시민들과 새내기 사회운동가들이 사회운동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게임에는 사회 변화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60종류 이상의 행동카드가 있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들은 세상을 바꾸는 행동이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또한 게임 속 ‘행동’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은 사회운동에 대중의 지지, 조직과 자원 들이 필요하다는 점도 자연스레 드러낸다. 이로써 활동가들이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고 사회운동에 대한 거부감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세상을 바꾸는 데 ‘정답’은 없다, 다양한 전략적 선택 고민하게 해
세바꾸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를 꼽는다면, 승리까지 도달하는 데에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 게임에서 유효한 ‘한 방’ 전략은 존재한다. 게임 극초반에 인력, 자원, 행동카드를 모아 중후반에 연속으로 ‘행동’ 칸에 가서 단계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철저한 준비만 된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회적인 상식에 부합하기는 하지만, ‘한 방’만이 강조되면 게임 난이도가 너무 쉬워지고 획일적인 플레이만 강요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제작자들은 우연성을 게임에 도입했다. ‘행동’을 하더라도 모든 행동이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각 행동이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지지도를 주사위 2개의 눈으로 구현했다. 플레이어가 던진 주사위 눈이 행동카드에 정해진 값보다 높아야 행동에 성공할 수 있다.
또한 매 턴 ‘정세’가 달라진다. 진보정당 집권, 긴급한 현안 해결, 우호적인 언론 보도와 같이 여러 활동에 유리한 이벤트가 나오면 ‘행동’의 성공률이 높아지거나 아예 단계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진전시킬 수도 있다. 반대로 극우정당이 집권하거나 조직 내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성폭력, 활동가 소진, 독단적인 운영 등) 활동에 제한을 받고 어렵게 끌어온 사회 변화를 후퇴시킬 수도 있다.
아울러 애초에 초기에, 혹은 ‘교육’을 통해 어떤 행동카드를 뽑을지도 랜덤이다. 원하는 카드가 나온다면 순조롭게 게임을 진행할 수 있지만, 해당 국면에 사용하기 어려운 카드가 나온다면 다른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다만 우연성만을 강조한다면 이른바 ‘뽑기’, ‘운빨 망겜’이 될 우려가 있으므로, 확률을 가늠하여 보다 성공에 유리한 경우를 판단할 요소들도 함께 반영했다. 실제 사회운동에서 실행할 수 있는 여러 행동은 현재의 국면에 적절한 경우도 있고, 부적절한 경우가 있다. 이를 게임에 반영해 단계별로 행동 성공 난이도를 조절했다.
예컨대 ‘사례 연구’의 경우 아직 문제가 가시화되지 않은 1~2단계에는 효과적이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7~8단계에는 효과가 줄어든다. 반대로 ‘대규모 집회’는 7~8단계에서는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으나, 1~2단계에는 실행하기 어려운 옵션이다. 그래서 단계별로 효과적인 행동은 주사위 눈을 낮게, 효과가 없거나 실행하기 어려우면 주사위 눈을 높게 설정했다. 또한 한 플레이어가 ‘행동’할 때 다른 플레이어가 ‘연대’ 칸에 있으면 연대하는 플레이어의 수만큼 행동 성공에 요구되는 주사위 눈 수를 줄여준다.
이러한 게임의 요소들 때문에 이전 판에서 성공했던 전략이 다음 판에서는 실패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급박한 상황에서 성공하기 어려운 도박 수를 던질 수 있고, 반대로 반드시 성공하는 ‘행동’만을 할 수도 있다. 아울러 플레이어들이 각기 다른 역할을 갖고 협력하는 상황에서 플레이어들이 ‘행동’을 할지, ‘연대’를 할지, 아니면 자원을 축적할지도 전략적인 차원에서 검토해야 한다. 다양한 상황에서 게임은 최고의 답을 제시하진 않지만, 플레이어들이 성공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분석하도록 유도한다.
‘서사’는 없지만, ‘다양성’ 구현하는 시뮬레이터로서의 가치 충분해
물론 이 게임에는 흔히 사회를 바꾸는 게임에 들어가는 웅장한 서사는 없다. 멸망의 위기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영웅도 아니고, 외세의 침략에서 나라를 지키는 지도자도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하는 위기의 순간이나, 모두가 승리하는 환호의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도 없다. 이 게임의 주인공은 원래 사회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일개 시민이거나 활동가들일 뿐이며, 중요한 순간은 오로지 ‘정세’ 혹은 운동의 ‘단계’로 건조하게 드러날 뿐이다.
세바꾸가 방법에 집중하는 만큼, 스토리를 담기 어려울 수는 있다. 대신 게임에 다양한 사회운동을 접목해서 여러 차례 플레이해보는 시뮬레이터로서의 가치는 크다. 세바꾸 플레이어들이 게임에서 내걸 수 있는 것들은 전쟁 없는 세상과 같은 추상적인 목표일 수 있고, 양심적 병역거부권 인정, 차별금지법 제정, 이주민 노동허가제,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와 같은 구체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 외에 어떤 것이든 플레이어가 원하는 변화를 목적으로 해서 플레이해보자. 실제로 게임이 활동가들이 할 수 있는 행동들을 직접 제시하지는 못하겠지만, 사회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에게는 최소한 어떤 종류의 행동이 어떤 상황에서 적합할지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세상을 바꾸다>는 협력 게임이다. 플레이어들은 서로 역할을 수행하며 협력해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사회운동 캠페인을 성공으로 이끌면 모두의 승리이고, 제한된 라운드 안에 성공을 하지 못하면 미완의 성공으로 남게 된다.
몇 년 전에 화물 트럭을 운전하는 <유로 트럭> 시리즈가 나왔을 때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을 하는 시뮬레이터가 어떤 재미가 있는지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큰 제한 없이 다양한 상황을 경험할 수 있다는 특징이 많은 사람들을 이 게임으로 이끌었다. 조금 더 복잡하긴 하지만 무한히 건물을 짓고 도로를 짓는 시뮬레이션 게임 <심시티>의 성공 요소도 여기에 있다.
사회운동 시뮬레이터로서 세바꾸는 전략성과 다양하고 반복적인 플레이 가능성, 그리고 재미를 갖췄다. 사회운동 자체를 다루는 것은 어디에서나 볼 수 없는 희소성이 있다. 비록 이 게임이 유로 트럭이나 심시티같은 인기를 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가능할지도?), 구해서 사람들과 함께 해볼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