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쭝 (비폭력 트레이너 네트워크 망치)

 

 

문제 해결에 미온적인 공공기관에 항의하기 위해 공식 행사가 열리는 무대 위에 올라가 항의 발언을 하고, 의장에게 가짜 피를 던지더니 급기야 그를 수갑으로 무대에 묶어버린다. 회사에 들어가 사무실을 피 칠갑으로 만들고 구호를 외친다. 수업 중인 고등학교 교실에도 들어가 ‘선전전’을 펼친다. 만찬장에서 피케팅을 하고 유골을 뿌린다.

이는 모두 영화 <120bpm>에 담긴 직접행동 사례이다. 이 영화는 에이즈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운 ‘액트업파리(Act up Paris)’의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런 활동들은 한국에서는 얄짤 없이 ‘불법 폭력 단체’라고 욕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액트업파리는 스스로를 ‘비폭력 단체’라고 설명한다.

영화 의 포스터

영화 <120bpm>의 포스터

 

죽음 앞에서는 존재 자체가 무기다

‘데모 강국’ 프랑스의 기준으로도 이런 활동은 꽤 과격하게 보이는 듯하다. 다른 에이즈 관련 단체들은 종종 액트업파리를 비난한다. 때로는 내부에서도 논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적어도 액트업파리 안에서는 ‘에이즈를 방관하는 정부 당국이나 제약회사에 맞서 행동한다’는 활동 방향에 이견이 없다. 직접행동이 제안될 때마다 이들은 너도나도 함께 하겠노라 손을 든다.

이들이 이렇게 과격하게 나서는 것은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적절한 치료를 통해 충분히 다스릴 수 있는 병이 되었지만, 여전히 에이즈는 작은 질병이 아니다. 영화의 배경인 1989년에는 아예 죽음의 질병이었다. 나는 한국에 ‘에이즈’라는 병이 처음 알려졌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사람들은 ‘에이즈(AIDS)’가 ‘아(A)이고, 이(I)제 다(D) 살(S)았다’의 약자라고 말하곤 했다.

액트업파리의 활동가들은 대부분 이렇게 삶의 끝에 선 HIV양성인 감염인 당사자다. 직접행동에 나설 때에는 장시간 구류에 대비해 약과 물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 영화는 몇몇 신입회원들의 등장으로 시작되는데, 이 첫 모임의 첫 공지사항은 바로 오랫동안 함께 싸운 동료의 죽음이다. 이들은 말 그대로 살기 위해 싸운다. 그래서 이들은 싸울 때 모든 것을 건다. HIV에 감염된 자신의 존재도 이들에게는 무기다. 사실 굉장히 효과적인 무기이기도 하다.

가짜 피

영화 <120bpm>의 스틸컷. 액트업파리의 활동가들은 이처럼 직접행동 때 가짜 피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들은 가짜 피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HIV 감염인의 혈액을 무서워하는 대중의 공포심을 활용하는 것이다. 피해자라는 정체성도 적극 이용한다. 제약회사가 이들의 행동에 불만을 제기하면 “우리가 한낱 폭도라면 고소해라. 회사가 피해자를 고소하면 볼 만하겠다”고 답한다.

당사자들의 존재는 단지 위협용은 아니다. 병을 시각화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에이즈라는 질병이 어떤 고통을 안겨주는지를 드러내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서는 에이즈에 걸린 사람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회 행렬의 선두에 입원 환자들을 세우려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방법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질문도 놓치지 않는다.)

 

‘게이, 약물 중독자, 수감자, 직업 여성’이 함께 싸운다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액트업파리가 “게이, 약물 중독자, 수감자, 직업 여성” 등 에이즈 고위험군의 당사자들을 모두 포괄한다는 점이다. HIV 양성이라는 것만 해도 엄청난 낙인이지만, 이들은 그에 더해 ‘문란한 행실’에 대한 비난까지 받아야 한다. 현재 한국의 인식도 딱 그렇다. 포털사이트의 영화 평점란에는 영화를 보지 않은 게 너무 티나는 호모포비아들이 우르르 몰려와 악담을 남겼다.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평은 “피같은 세금을 왜 지들이 항문 관리 못해서 걸린 에이즈 치료하는데 낭비해야 하는가”라는 혐오 발언이다.

이 같은 이중의 혐오는 문제 해결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동성애는 에이즈의 온상”이라는 프레임 안에서는 HIV 양성인 동성애자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어렵다. “에이즈는 부도덕한 행동의 결과”라는 프레임 안에서는 적극적으로 HIV에 대한 검사 및 관리, 치료제 개발을 할 수 없다. 이럴 때는 결국 “원인과 상관없이 사람들의 건강은 무조건 사회의 공동 책임”이라고 프레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 손을 잘 안 씻어 감기에 걸리거나 운동을 잘 하지 않아 성인병에 걸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HIV에 감염됐을 때도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보건복지부나 관련 산하 기관들은 바로 그런 일에 세금을 쓰라고 만든 부처이다.

다행히 액트업파리는 잘못된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다. 여러 고위험군의 상황을 다양하게 회의 안건으로 다루고,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요구한다. 이들은 “게이, 약물중독자, 수감자, 직업여성들은 에이즈로 죽어야 한다고 여기는 자들, 증오와 차별을 부추기는 데 에이즈를 이용하는 자들”을 에이즈 전쟁의 ‘반역자’라고 말한다. 정부의 실수로 오염된 피를 수혈받은 ‘순수한 피해자’ 감염인도, 주사기를 돌려쓰거나 콘돔없이 섹스를 해서 ‘자업자득으로 병에 걸린’ 감염인도 이렇게 액트업파리 안에서 함께 싸운다. 물론 생존을 위한 싸움은 하나도 근사하지 않다. 이들은 끊임없이 실수하고 실패한다. 직접행동 도중에 돌발행동을 한다. 기껏 열심히 직접행동을 해도 기사 하나 실리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싸움을 하는 사람은 도저히 우아해질 수가 없다. 활동가들은 종종 날선 말로 서로를 할퀸다.

영화 의 스틸컷

영화 <120bpm>의 스틸컷. 액트업파리의 활동가들은 잘못된 프레임에 갇혀있기를 거부한다.  게이, 약물중독자, 수감자, 직업여성 등 낙인과 편견이 씌워진 모든 이들이 함께 캠페인을 펼쳐나간다.

춤추듯 투쟁하듯,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

영화는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으로 액트업파리를 비춰준다. 활동가들이 가진 인간적인 매력들을 놓치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평면적인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웃고 떠들고 화낸다. 뜨겁고 애절하게 연애도 한다.

주인공 션은 “더 열심히 살게 됐다. 세상이 달리 보인다. 색이 더 풍부해졌고 소리로 가득해졌다. 삶이 더 생긴 것 같다”고 에이즈로 인한 변화를 이야기한다. 바로 웃으면서 “농담이야. 아무것도 안 변했어”라고 덧붙였고 실제로 질병이 그렇게 낭만적일 리는 없지만, 분명 이들의 삶은 에이즈로 인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죽음과 맞서면서 분명히 더 빨라지고 더 뜨거워졌을 것 같다. 영화에서는 춤추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 처음의 춤 장면에서 카메라는 클럽 안에서 음악에 자유롭게 몸을 맡긴 활동가들의 머리 위로 올라가더니 어둠 속을 떠다니는 먼지와 그 속의 HIV 바이러스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의 유골을 뿌리는 ‘정치 장례’인데, 클럽과 같은 암전을 넣어 활동가들의 움직임을 마치 초반의 클럽 장면처럼 연출했다.

제목 역시 의미심장하다. bpm(beats per minute)는 심박수라는 뜻인데, 60~100 사이가 정상이라고 하니 120bpm은 무척 빠르게 뛰는 박동이다. bpm은 동시에 음악의 템포 단위이기도 하다. 영화에 많이 나오는 하우스 음악이 약 120bpm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마치 “삶과 죽음 사이에 선 액트업파리 활동가들의 저항이 멋진 춤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제 더 이상 에이즈는 죽음의 병이 아니다. 적절히 치료만 받으면 당사자도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염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에서 30년이 지난 지금도 <120bpm>은 유효하다. 여전히 치명적인 ‘에이즈 혐오’와 싸우는 당사자나 활동가에게도 좋지만, 세상을 바꾸려는 활동가라면 누구에게나 이 영화는 흥미로운 작품일 것이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질문과 참고 사례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120bpm>은 세계 에이즈의 날(12월 1일)을 맞아 활동가들이 함께 보기에 딱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