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야(전쟁없는세상 사무국, 무기감시팀 코디네이터)
전쟁없는세상 주:
2020년 2월부로 전쟁없는세상 사무국 활동을 마무리하는 활동가 쭈야가, 무기감시캠페인팀 코디네이터로서 3년의 활동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글을 썼습니다.
사실 평화운동에 큰 관심이 없었다
부끄럽게도 그랬다. 2015년이 되어서야 강정을 인터넷에서가 아닌 현장에서 만나기 시작했고, 그때가 평화운동을 ‘직접’ 만나게 된 시작이다. 사실 나는 10년 전에 전쟁없는세상을 진작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있었다. 2009년 당시 성소수자 인권을 중심으로 연극을 하는 ‘맥놀이’라는 곳에서 활동했었는데 우리에게 평화캠프 초대 연락이 왔다. 양평의 개척자들에서 진행되는 캠프였고, 비폭력트레이닝과 여성징병 수다, 미군기지운동 등에 대해 배우고 나누는 내용이라고 했다. 그때 참가하지는 않았다. 만약 캠프에 참가했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 다른 모습으로 전쟁없는세상과 인연 맺고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렇다. 아쉽다. 일찍 못 만난 게 아쉽다. 전쟁없는세상과의 만나는 기회는 7년을 돌아 2016년에 찾아왔다. 당시 제주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해 여름 전쟁없는세상의 평화캠프를 다녀온 친구가 교육에 관심 많은 내게 비폭력트레이닝을 소개해주었다. 또 다른 친구는 예비군 병역거부를 고민하고 있는데 전쟁없는세상의 도움을 받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제주 생활을 마무리하는 마음을 갖고 있던 차에 두 친구 중 한 명이 전쟁없는세상에서 무기팀 코디네이터를 뽑는다며 지원해보라고 권유했다.
이제 막 평화운동에 눈 뜬 나였고 무기감시캠페인의 ㅁ도 몰랐다. 하지만 더 알고싶고, 더 배우고 싶다는 욕심으로 덜컥 지원했다. 결과는 뻔했다. 떨어졌다. 지금 돌아보면 말 그대로 쥐뿔도 모르면서 무모한 용기를 낸 것이었다. 나라도 나를 안 뽑았을 것이다.
코디네이터로는 떨어졌지만, 2차 면접을 준비하면서 무기거래 저항운동과 평화운동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졌다. 그래서 제주 생활을 접고 서울 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전쟁없는세상 책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연극으로 예술 교육자로 활동하면서 소수자와 약자의 이름으로 사회에 던지게 되는 질문들이 많았는데, 불평등과 혐오, 차별과 배제의 문화가 형성된 원인과 배경에 대해 전쟁이라는 생각까지 못 간 적이 많다. 그런데 책모임을 하고 전쟁없는세상에서 펴낸 책과 블로그 글들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치며 답을 찾았다.
2016년 9월, ‘드디어’ 전쟁없는세상 사람들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2016 대한민국방위산업전(DX KOREA) 저항행동 “WAR STARTS HERE”가 그 시작이었다. 그때 찍은 영상과 사진을 다시 보니, 저기의 내 모습이 영 어색하다. 함께하는 사람들도 낯설고, 퍼포먼스하는 것도 낯설었지만, 집회나 점거 농성장에 가보기만 하다가 이런 방법으로 집회를 하니 생경하면서 즐거웠다.
그때 사진을 보면서 빙그레 또 하나 미소 짓게 만드는 건 사람들이다. 그때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딱 한 명 뿐이었는데, 이제는 사진에 찍힌 모두의 이름을 알고 있다. 이름만 알고 있는 게 아니다. 그 한 명 한 명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어떤 성격인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매력이 있는지도 보인다. 고작 4년이 흘렀는데 각자의 얼굴에서 시간의 흐름도 느껴져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렇다. 전쟁없는세상에서의 꽉 채운 3년이 준 선물은 ‘사람’이다.
전쟁없는세상 무기감시팀 코디네이터가 되다
그리고 얼마 후 용석에게 연락이 왔다. 이전 활동가가 그만두게 되어서 무기감시캠페인팀 코디네이터를 새로 구하고 있는데 일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왔다. DX KOREA 저항행동을 함께 한 경험도 있고, 그때 참여하고 있던 책모임도 많은 공부가 되어서 전쟁없는세상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하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또 다시 무모한 용기를 내어 덥석 하겠다고 했다. 아… 그때부터 즐거움이 끝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당히 가볍게 만나던 운동을 깊게 만나게 된 시작이었다.)
무기감시운동은 한국에서 아직은 대중적인 운동이 아니다. 연구 자료도, 사람도 없다. 무기거래 관련해서 정부에 공개 정보 청구를 해도 ‘안보’의 이름으로 대부분 답을 들을 수 없다. 코디네이터로 일하면서 이런 벽들을 확인하게 되니 힘이 빠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무기거래가 수많은 비리 속에서 정부를 등에 업은 평화와 안보의 이름으로 시민의 세금으로 살상을 담보로 전쟁을 준비하고 일으킨다는 것, 무기를 사고 파는 나라의 평화는 보장되지만, 무기가 배치되고 쓰이는 곳에는 죽음과 파멸의 씨앗이 곳곳이 뿌려지고 있다는 것, 무기수출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한국이 이 죽음의 거래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 이 모두가 분명한 사실이지만 손에 잡히는 정보와 자료를 찾기 힘들었다. 그나마 해외 활동가들이 보내주는 자료와 해외에서 연구한 자료들에서 한국산 무기가 거래되고 쓰인 정황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 자료는 찾기 힘들었다. 정부도, 방산기업도 언감생심 그런 정보는 주지 않았다.
이런 한국에서 이 작은 조직이 무기감시캠페인을 한다는 것은 막막함과 무기력함과 싸우는 일이기도 했다. 그 시간을 함께해준 것이 팀원 박승호와 최하늬이다. 꼬박 3년을 어디로도 떠나지 않고 함께주었고, 지금도 함께해주고 있다. 너무나 고맙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이 글을 쓰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기감시캠페인의 코디네이터로 일하는 데 있어서 실무적인 부분이야 다른 영역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일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고민하고 질문하는 것들은 매우 달라야 했다. 머리도 팽팽, 마음도 팽팽, 의지도 팽팽 돌아가야 하는 질문들이 많았다.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의 영향과 결과는 무엇인가, 어떤 요구와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 어떤 대상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낼 것인가, 누구를 어떻게 우리 편으로 초대할 것인가, 어떻게 공동의 목적을 설정하고 동기부여 되도록 제안하고 이끌 것인가, 이 운동의 다음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피할 수 있는 질문은 없었고, 가끔 영 답이 찾아지지 않을 때에는 시키는 대로만 일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전쟁없는세상의 어느 누구도 시키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 질문하고 모두의 답을 찾아나가는 전쟁없는세상의 문화가 결과적으로 나를 스스로 성장하게 만들어 주었다. 전쟁없는세상의 이름으로 만난 모두가 평화운동을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사람들과 친구이고 동료라는 사실이 너무나 소중하고 고맙다.
나는 이제 전쟁없는세상 사무국 코디네이터를 자리를 떠난다. 하지만 뭉치라는 훌륭한 새 코디네이터가 무기감시캠페인팀에 들어와주었고, 여전히 박승호와 최하늬가 함께하고 있으며, 신재욱이라는 멋진 팀원이 합류했다. 나도 팀원의 위치에서 함께한다. 코디네이터로서는 마침표를 찍지만, 무기감시운동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그래서 이 글을 마무리하며 하고 싶은 말은 “잘 있어요.” 가 아니다. 전쟁없는세상과 함께 걷는 모두에게 전한다.
“쉽지 않은 평화의길, 앞으로도 같이 걸을게요. 잘잘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