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소연(연극창작자)
전쟁 속에서 무엇을 기록할 수 있는가
전쟁으로 사망한 우크라이나 여성 소설가의 전쟁 일기. 나는 『여성과 전쟁』을 그렇게 소개받았다. 전쟁 일기는 생존자의 일기이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는 자의 일기다. 전쟁 일기가 출판되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일 것이다. 저자가 살아서 펴내거나, 저자가 죽은 뒤 주변인들이 기록을 모아 펴내거나. 이 책의 경우는 후자이다. 2023년 7월 그는 서른일곱의 나이에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사망했다. 그래서 미완의 책이다. 우크라이나 동료 작가인 편집자들은 원고에 최소한의 개입을 하며, 미완인 부분은 그대로, 편집자 메모를 달아 출간하는 방식을 택했다.
『여성과 전쟁』의 많은 부분들은 취재 단계에서의 메모나 더 발전시키지 못한 초기 아이디어 상태로만 남아 있다. 책의 빈 페이지들은 쉽게 저자의 부재를 상기시킨다. 우리는 거기에서 전쟁이 지우고 파괴하는 사람들의 삶, 드러나지 않는 피해자들의 목소리, 이런 것들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또한 미완인 이 책의 상태는, 전쟁을 맞이한 작가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고민의 궤적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
“(…) 빅토리아는 전면전 초기 몇 달간 새로운 역할을 모색했으며,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그녀는 작가로서 새로운 목소리와 장르를 찾으려고 했다. 그녀의 아카이브는 인터뷰, 에세이, 역사 여행과 시뿐만 아니라 주제에 관한 조사에서 발췌한 이야기, 증인의 목소리를 담은 기록, 그리고 현장 임무 중에 수집한 보고서와 조사를 결합한 다큐멘터리 산문의 형식에 마침내 도달하기 전까지 이 책의 구조가 얼마나 여러 번 바뀌었는지를 보여준다.”(474, 「편집 후기: 빈 페이지들」)
전쟁의 와중에, 무엇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빅토리아 아멜리나는 소설과 어린이책을 출간하고 조지프 콘래드 문학상을 수상한 우크라이나 작가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그는 작가에서 전쟁범죄 조사원이 된다. 만약 그가 살아 있어 이 책을 완성해 발표했더라면 이 책은 아주 다른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작가가 서문에 언급했듯 전쟁 중 ‘여성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말이다.
실제로 『여성과 전쟁』은 변호사에서 군인이 된 예우헤니아 포도브나, 전쟁범죄를 기록하며 202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올렉산드르 마트비추크, 전쟁 일기를 쓰는 도서관 사서 율리아 카큘랴다닐류크, 소련과 러시아에 의해 탄압받고 처형된 우크라이나 작가들을 기리는 하르키우 문학관의 소장 자료들을 탈출시킨 테탸나 필립추크, 전쟁범죄 조사원에서 지뢰 제거 전문가가 되기로 한 ‘카사노바(콜사인)’ 등 전쟁 중 각자의 자리에서 활약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책은 또한 그가 직접 조사한 전쟁범죄 피해자들의 증언, 전쟁으로 파괴된 현장을 방문하고 쓴 글, 인터뷰와 문화 행사 기획 등 관련 활동을 하는 와중에 쓴 글 등을 방대하게 포함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긴 공백을 포함한 메모와 메모 사이에서 우리는 그가 듣고 보았을 것들, 그가 느꼈을 것들을 상상하게 된다.
『여성과 전쟁』의 여정은 러시아 점령군에게 살해된 동화 작가 볼로디미르 바쿨렌코의 행방을 좇는 과정을 포함한다. 아멜리나는 바쿨렌코의 미완의 일기를 발견하여 하르키우 문학관에 전달한다. 아멜리나는 이 책의 큰 부분을, 기록하는 자에 대한 기록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 여정의 와중에 바쿨렌코의 일기를 발견하는 일이 있었다면, 아멜리나 스스로 발견되는 자가 되는 일이 그 끝에 있었다. 아멜리나가 말하듯 ‘죽은 동료들에게 일어난 일을 찾아다녀야 하는’ ‘우크라이나 예술가들의 슬픈 전통’(139)에, 그 자신도 포함되게 되었다. 발견하는 자로서, 그리고 발견되는 자로서.
비폭력 저항의 관점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여성들을 바라보기’ 읽기
비폭력 저항의 관점으로, 폭력을 직접 겪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기록하는 사람의 기록을 읽는다는 것은 독자를 복잡한 맥락 안에 데려다 놓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폭력 앞에서 비폭력 저항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침략자에게 나라와 영토를 내주지 않기 위해 폭력 저항을 선택한 사람들의 편에서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 그것도 피해국 당사자인 사람의 기록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비폭력 저항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가?
『여성과 전쟁』의 영어 원제는 Looking at Women Looking at War, ‘전쟁을 바라보는 여성을 바라보기’다. 전쟁을 바라보는 여성을 바라보는 일은 무엇을 남기는가? 아멜리나는 우크라이나군에 입대해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전쟁이 길어지게 되면 언젠가 입대하게 될 자신의 미래에 대해 쓴다. 자신의 기록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하는 무력한 일기’(242)라 여기기도 한다. 작가는 어느 정도, 여성들도 전쟁의 와중에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투하지 않는 여성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 그는 이 여성들을 ‘영웅’으로 소개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전쟁에서 ‘영웅’을 만들기를 거부한다면, 전쟁을 바라보는 여성에 대한 기록은 무엇을 남기는가. 예컨대 스베틀라냐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여성의 전쟁 경험을 영웅화하는 대신, 여성의 전쟁 경험 간의 차이를 그대로 드러내며 병렬적 배치를 사용해 방대한 기록을 남기면서도 전쟁의 폭력성과 그 안에서 망가지고 변화되는 개개인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낸 바 있다.
우리는 아멜리나의 기록에서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 기록을 남기는 자와 그것을 다듬어 펴내는 자가 있었다면, 읽어내는 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단지 ‘남성들이 만든 전쟁’에서 ‘기존-남성-주류’의 시각과 다른 여성의 시각으로 전쟁을 본다는 이분법적이고 납작한 이야기 말고, 어쩌면 다른 이야기를 읽어내고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전투 바깥에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망설임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지 않을까. 여성들의 관점, 전투 바깥 사람들의 관점이라서 가능한 틈과 단서들을 이 글 속에서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주디스 버틀러는 『비폭력의 힘』에서, 비폭력을 “단순히 폭력이 없는 상태 또는 폭력을 삼가는 행동”이 아니라 “평등과 자유의 이상을 긍정하기 위한 지속적 참여”이며 “나아가 공격성의 경로를 바꾸는 방식”(ebook 43)이라 말한다. 그가 말하는 “공격적 비폭력”은, 비폭력 실천이라는 행위는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아멜리나의 초점은 제목에서 나타나듯, 전쟁을 ‘치러내는’ 여성보다는, ‘바라보는’ 여성에게 있다. 그는 전쟁범죄를 조사하는 여성들에 초점을 맞춘다. 전쟁을 고문과 학살 피해자들, 일상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관점을 통해 바라보고자 하는 여성들을 만나고 기록한다. 그들이 전쟁을 바라보는 이유는 “평화로운 삶을 이루는 토대는 모든 죽음의 이유를 아는 것”(310)이기 때문이다. 아멜리나는 전쟁을 바라보는 여성들을 본다. 그리고 그 일은 일관될 수도, 명확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바라보는 여성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 꽤 냉소적으로 나는 눈물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도 좋을지 고민할 것이다(66)”. 망설임 끝에 그는 사진 찍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또다른 망설임의 순간들이, 기록과 바라봄 사이, 문장이 되지 못한 메모와 완성된 문장 사이에 깃들어 있다.
우리는 독자로서 아멜리나의 글에서, ‘여성적 시각’에서 쓰인 영웅서사가 아닌, 전쟁이라는 상황 속 폭력 저항과 비폭력 저항 사이에서 망설이고 협상하며 제각기 저항의 움직임을 만들어가는 개인들의 실천과 선택을 읽어낼 수 있다. 작가 본인의 실천과 선택도 그 중 하나다. 무수한 폭력과 죽음을 보고 듣는 일과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 사이, 거기에서 이 글은 쓰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가 남긴 이런 메모를 읽게 되는 것이다.
“증인들은 숨을 쉬어야 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들이 숨을 쉬는지, 쉰다면 어떻게 쉬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알아차리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힘을 주는 것이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직 찾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
인류애와 조사 사이에서 우리는 인류애를 택한다.”(271)
덧없는 가정이 아닌, 망설임, 고민, 협상의 과정에서만 존재하는 평화
아멜리나가 자신의 설계에 따라 완성한 비중이 큰 이 책의 앞부분에서, 그는 독특한 시제에 자신을 가져다 놓는다. 대과거 시점에서 과거를, 그러니까 대과거에는 아직 오지 않을 미래인 시점을 서술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공통점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139)
“알라와 동료들이 몇 달에 걸쳐 만든 모자이크는 2022년 러시아의 포격으로 단 몇 초만에 파괴되고 말 것이다.”(143)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계속해서 결단하고 변화를 겪고 있는 자신과 다른 여성들의 상황을, 그는 이런 방식으로 서술한다. 나에게는 이것이 ‘한시적 생존자’의 서술방식으로도 읽힌다. 작가가 알고 있는 미래에 대해 서술한다는 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미래가 존재함을 가정한다. 아울러 작가가 과거 시점에서 현재를 보고 있다는 것은, 과거에 서술한 인물이 현재에 살아 있지 않을 가능성에 대한 불안을 끊임없이 독자에게 가중한다.
도래하게 될 불가역적인 평화가 존재한다는 덧없는 가정을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는 그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를 그 평화와 맞바꿀 수 있을까. 그런가하면 현실로 돌아와, 전쟁이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중계되며 전쟁 범죄자가 한 나라의 정상으로 TV 뉴스에 출연하는 현실의 세상에서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삶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평화란 덧없는 가정이 아닌, 그 망설임과 고민과 협상의 과정에서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멜리나가 전쟁 발발에 앞서 총을 사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에서 입대하기와 기록하기 사이에서의 망설임, 엄마의 역할과 전쟁범죄 조사원의 역할 사이에서의 흔들림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정말로, 한 어린이의 세계를 지키는 엄마로 살아내는 일과 전쟁범죄 조사원이 되어 위험하지만 꼭 필요한 일을 해내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앞서 인용한 버틀러에 따르면, “근본적인 윤리적 정치적 애매함을 경유하지 않는 비폭력 실천이란 없다. ‘비폭력’은 절대적 원칙이 아니라 진행중인 투쟁을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뜻이다”(ebook 39). 우리는 아멜리나가 남긴 흔들림과 망설임의 기록, 그 사이의 빈칸들 속에서, 비폭력 투쟁의 가능성들을 톺아보고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도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 삶들이 고통 속에 파괴되고 있다. 폭력과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정말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