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베트남전쟁 종전 50년, 베트남전쟁 진실규명에 응답을!]의 여덟 번째 글입니다. 이 글의 원본과 앞선 연재글을 오마이뉴스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50년의 시간과 변하지 않은 질문들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흘렀다. 사이공이 함락되던 그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 악몽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우크라이나에서는 포화가 멈추지 않고, 가자지구에서는 끔찍한 제노사이드가 계속되고 있으며, 전 세계의 군비경쟁은 가속화되고 있다.

베트남전쟁 종전 50주년을 맞는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히 ‘그때 왜 그랬을까’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 일어나는가’, ‘군사주의는 어떻게 형태를 바꿔가며 지속되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는가’이다. 베트남전쟁의 경험을 현재의 거울로 삼아 과거의 교훈이 오늘의 저항에 어떤 지혜를 제공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작업이다.

 

현재진행형 전쟁들 속에서 발견하는 연속성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을 베트남전쟁과 비교해보면 놀라운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러시아는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전쟁이라는 단어 대신 ‘특별 군사 작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소탕’을 명분으로 가자지구 주민을 상대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를 저지르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벌인 전쟁을 ‘베트남 내전’으로 부른다거나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냉전 시대와 달리 현재의 국제정치는 양상이 더욱 복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전쟁이 항상 민간인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다는 사실이다. 베트남에서 죽어간 수백 만 명의 민간인들처럼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가장 큰 희생을 치르고 있다. 또한 전쟁은 언제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계산에 의해 좌우되며 그 과정에서 인도주의적 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점도 변하지 않았다.

 

2022년 4월 16일 우크라이나 평화행진참여자들이 NO WAR라고 쓰여진 대형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2022년 4월 16일 우크라이나 평화행진참여자들이 NO WAR라고 쓰여진 대형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저항의 경험에서 얻는 교훈

베트남 반전운동은 20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사회운동 중 하나였다. 이 운동이 남긴 여러 교훈은 오늘날의 평화운동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첫째, 개인의 양심적 거부로부터 시작된 저항이 어떻게 대중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징병 거부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사회 전체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낸 과정은 소수의 헌신적 행동이 가진 파급력을 증명했다.

둘째, 다양한 사회계층과 집단들이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모델을 제시했다. 학생들의 캠퍼스 시위, 참전 군인들의 증언, 종교인들의 도덕적 호소, 여성들의 평화행진 등이 하나의 목소리로 모아질 때 정치적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연대의 경험은 현재 각기 다른 이슈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민사회 조직들이 어떻게 더 큰 변화를 위해 힘을 모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셋째, 비폭력 직접행동의 효과성을 입증했다. 베트남 반전운동에서 사용된 시민불복종, 대규모 집회, 상징적 행동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정치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된 평화적 시위의 이미지들은 전쟁 정책에 대한 국제적 여론을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베트남 반전운동은 단기적으로는 침략국가 미국이 평화 조약에 서명하고 남아있는 병력을 철수하며 1973년 미국에서 징집을 종료시키고 1975년에는 남베트남 정권에 대한 추가 원조를 중단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운동은 또한 장기적으로 ‘베트남 증후군’이라 불리는 영향을 가져왔다. 이후 30년간 미국의 대규모 해외 군사 개입을 일정 정도 억제하는 효과를 낳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시에도 병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때와 같은 대규모 저항에 대한 우려로 징집 재개를 정치권이 꺼리게 만들었다.

사회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이후 전략적 비폭력 행동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고 대안적 생활 방식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으며 당시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많은 개인과 조직을 중심으로 반전운동이 활성화되었다. 미디어의 우호적이지 않은 태도, 정부의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운동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거둔 상당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반전운동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면 앞으로의 반전운동은 전쟁 발발 이후의 이러한 반응적 성격의 운동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전쟁의 사슬을 끊어내기에는 역부족일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그 종료라는 즉각적 목표에도 집중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 군산복합체의 문제나 군대, 폭력적 외교정책, 더 나아가 사회 변혁에 대한 비전과 장기적 전략을 함께 고민해야 끊이지 않는 전쟁의 고리를 비로소 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전쟁 체제를 넘어서는 상상력과 실천

현재 우리가 직면한 과제는 단순히 개별 전쟁들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재생산하는 체제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군산복합체의 작동 메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무기 생산업체들이 어떻게 정치인들과 결탁하여 군비증강을 추진하는지, 안보 전문가들이 어떻게 위협을 과장하여 군사적 대응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지, 그리고 미디어가 어떻게 이러한 논리를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교육 분야에서의 군사주의 확산도 주목해야 할 문제다. 전쟁을 영웅담으로 포장하고, 국가 안보를 최우선 가치로 강조하며, 군사훈련식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등의 방식으로 군사주의 문화가 재생산되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평화교육의 확산, 비폭력 갈등해결 방법론의 보급, 그리고 비판적 사고능력을 기르는 교육 과정의 개발이 필요하다.

경제 영역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군비에 투입되는 막대한 예산을 사회보장, 환경보호, 교육 등 평화적 목적으로 전환하는 것은 단순히 예산 배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군비 지출의 기회비용을 가시화하고, 평화적 경제 발전 모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들을 축적해나가야 한다.

기술 발전이 전쟁의 양상을 바꾸고 있는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 드론 전쟁, 사이버 공격, 인공지능 무기 등 새로운 형태의 군사 기술들은 전쟁의 문턱을 낮추고 있다. 이러한 기술들에 대한 국제적 규제 방안을 마련하고, 기술 발전이 평화적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2024년 1월 19일 대전 방위사업청 앞에서 한국 정부의 이스라엘 무기수출을 규탄하는 집회. 한국 정부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대량학살로 전세계가 규탄의 목소리를 내는 와중에도 그치지 않고 무기를 수출하고 있다.

2024년 1월 19일 대전 방위사업청 앞에서 한국 정부의 이스라엘 무기수출을 규탄하는 집회. 한국 정부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대량학살로 전세계가 규탄의 목소리를 내는 와중에도 그치지 않고 무기를 수출하고 있다.


연대와 희망의 네트워크 구축하기

베트남전쟁 시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반전 연대의 경험은 현재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당시 유럽 전역과 일본 등지에서 동시에 벌어진 반전 시위들은 국경을 넘나드는 시민사회의 연대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시위, 가자 연대 집회 등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달로 소통과 조직화가 즉각적이고 조금 더 쉬워지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정보 공유,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한 국제적 캠페인 조직, 디지털 도구를 이용한 창의적 행동 방식 등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정보 조작, 감시 강화, 디지털 격차 등의 문제들도 대응해야 할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베트남전쟁 종전 50주년을 맞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다. 베트남 반전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냉정히 분석하고, 그 교훈을 현재의 조건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50년 전 “전쟁을 끝내라”고 외쳤던 목소리들이 오늘날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더 큰 꿈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꿈이 현실이 되는 날까지 우리의 저항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