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31일, 유럽연합(EU)은 고문 및 그 밖의 잔혹한,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에 사용될 수 있는 장비의 거래를 규제하는 ‘고문 방지 규정(Anti-Torture Regulation)’의 적용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이번 개정으로 얼굴덮개와 눈가리개, 족쇄, 섐복(sjambok, 무거운 채찍), 라티(lathi, 죽봉), 드론 장착 화학자극제(최루액 등) 발사장치 등 본질적으로 잔혹한,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장비가 금지 품목에 포함되었고, 운동충격발사체(고무탄 등) 및 발사기, 악취물질 등 역시 통제 품목에 추가되었다.
이 변화는 지난 수년간 국제 시민사회와 유엔 고문 특별보고관이 고문 무역을 종식시키기 위해 조사와 캠페인을 이어온 결과다. 그 노력은 전 세계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를 예방하는 데 실질적 기여를 할 수 있는 제도적 성과로 이어졌다. EU의 조치는 다른 지역과 국가들이 뒤따라야 하는 중요한 모범 사례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이런 국제적인 흐름과 거리가 멀다. 이번 EU의 규제 목록에 포함되는 최루탄과 물대포 등 시위진압 무기를 한국은 분쟁 중인 국가와 독재 정권에 대량으로 수출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바레인, 튀르키예,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케냐, 페루 등에서 한국산 시위진압무기가 평화적 시위대를 진압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데 사용됐다.
국내에서는 이한열 열사부터 백남기 열사에 이르기까지 최루탄과 물대포 등 시위진압 무기로 시민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이런 무기들이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위험성이 명확히 입증된 장비임에도, 한국 정부는 이 장비들을 계속 해외로 수출하고 있으며 수출통제체제는 여전히 허술하다.
매년 인천 송도에서 열리는 국제치안산업대전에서는 유엔 고문 특별보고관이 금지 품목으로 분류한 전기충격봉과 엄지수갑을 버젓이 전시·홍보되고, 통제 품목인 최루탄도 자유롭게 소개된다. 물대포와 수갑 등 구속장치는 경찰청의 허가조차 받지 않고 수출이 가능하다. 이를 방치하면 한국은 ‘고문 무역’의 공급국으로 낙인 찍힐 것이다.
한국 정부는 EU의 강화된 고문 방지 규정을 참고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즉각 시행해야 한다.
- 고문 및 가혹행위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장비의 수출을 전면 금지하거나 엄격히 통제할 것
- 경찰청 및 관계기관의 수출 허가 절차를 강화하여, 인권침해 우려가 확인될 경우 수출을 전면 불허할 것
- 무기 및 치안산업 박람회에서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품목의 전시·거래를 전면 금지하고 관리·감독을 강화할 것
고문과 가혹행위는 국제법상 금지된 행위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장비의 거래를 차단하는 것은 국가의 명백한 의무다. 인권을 침해하는 장비와 무기의 거래를 중단하고,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법·제도 정비에 나서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EU의 결단이 한국 정부의 정책에도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를 촉구한다.
2025. 8. 8. 전쟁없는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