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
4월 첫 주, 윤석열이 파면되자 우리 동네 나무들은 벚꽃을 예쁘게 터뜨리기 시작했다. 일찍 퇴근한 저녁이면 일부러 한 정거장 전에 전철역에서 내려, 꽃을 보며 집까지 산책을 했다. 예쁜 걸 보며 예쁘다고, 느린 걸음으로 감탄하며 걸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참 반가웠다. 탄핵정국이었던 지난 겨울 동안에는 하루종일 뉴스를 틀어놓은 채 속으로 쌍욕을 하고, 주말이면 데모에 체력을 옴팡 쏟아버리곤 했으니까 말이다. 흐드러지게 핀 봄꽃을 보며 다시 일상의 속도로 삶을 돌려놓을 수 있겠다 싶을 때 쯤, 생리가 사나흘쯤 늦어졌다. 호르몬 질환을 겪고 있어서 대수롭지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찜찜한 마음으로 지내긴 싫으니까. 출장을 앞둔 휴일 아침, 약 서랍을 뒤져 임신테스트기를 꺼냈다.
난생 처음 보는 새빨갛고 선명한 두 줄. 올해는 윤석열이 파면되면 할 일 다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일생일대의 과업이 내 삶에 찾아온 것이다. 삶을 송두리채 바꾸게 될 어마무시한 결정이었지만, ‘봄’과 함께 찾아온 선물을 나와 짝꿍은 기쁘게 맞이하기로 했다. 태명은 (파면 파면) 팜팜이. 아기가 세상에 올 때 까지 9개월 남짓의 시간이 남았으니, 그동안 필요한 준비를 부지런히 해가기로. 마음먹은 건 뭐든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내가 기깔나게 멋있는 임산부가 될 줄 알았다. 활동도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고, 잘 먹고 잘 움직여서 체력 짱짱 임산부가 되리라, 그래서 원정 데모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슈퍼 임산부가 되리라 상상했다. 그게 얼마나 우습고 바보같은 다짐이었는지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덧이 시작되자 하루종일 울렁거리는 속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속이 계속 메스꺼우니 업무에 집중이 될리도 만무했고, 그렇게 하루를 버티다보면 체력을 옴팡 써버려서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널부러져 한두시간을 누워있어야 겨우 샤워할 기운을 차리곤 했다. 저녁이면 전쟁없는세상 회의에 가서 신나게 작당모의를 하다가 막차가 끊기기 직전까지 뒷풀이를 해야 살 맛이 나는 삶이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원격으로도 겨우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부산으로 무기박람회 저항행동을 갔던 동안에는 한 시간 데모하고, 한 시간 현장 모니터링을 했다고, 씻지도 못한 채로 잠들어 새벽 4시에 겨우 눈을 떠서 샤워를 하고 다시 잠들었다. 겨우 7센치 남짓한 태아가 내 몸과 정신을 그 정도로 지배할 줄이야.
임신 사실을 가족들에게 처음 알렸을 때, 우리 엄마는 기쁨에 겨워 내게 말했다. “네가 태어나서 한 일 중에 제일 잘했다.” 임신 전에 누군가 그런 말을 타인에게 하는 걸 들었더라면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했을텐데, 신기한 건 나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스물스물 하게 된다는 거였다. 처음으로 산과 병원에 가서 아기집을 확인하던 날, 아기 심장소리를 처음 듣던 날, 주기마다 병원에 가면 몇 주 사이 쑥쑥 커있는 아기를 만나는 게 너무 행복하고 신비로웠다. 특별히 잘 한 것도 없는데 빠른 속도로 씩씩하게 커가는 아기가 기특했고, 아기를 열심히 키워내고 있는 내 몸이 자랑스러웠다. 살면서 이렇게 내 스스로가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던 적이 있을까. 아마도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주인공인 줄 알았지
나의 임신과 동시에, 파트너를 비롯한 가까운 가족과 동료들은 곧바로 ‘팜팜모드’에 돌입했다. 성남으로 재판을 받으러 갈 때는 먼 곳까지 최대한 편히 이동할 계획을 짜고, 출장이 무리가 될지 아닐지 함께 고민하고. 집에는 임산부에게 좋다는 음식과 영양제들이 택배로 도착하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고는 한번도 누려본 적 없는 주인공 놀이를 나는 내심 즐겼다. 그 땐 몰랐다. 주인공은 사실 내가 아니라는 걸.
미국이 이란의 핵시설을 공격한 날, 두려움에 휩싸여 이른 시간부터 뉴스를 틀어놓고 TV 앞을 떠나지 못하던 아침이었다. 마침 엄마가 전화를 걸어 내 안부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팜팜이 듣는데, 뉴스는 보지마.” 나는 순간의 짜증을 감추지 못하고 엄마에게 곧바로 쏘아 붙였다. “엄마, 내가 평화활동가인데, 어떻게 지금 뉴스를 안봐!” 나를 둘러싼 세상이 뱃속에 있는 아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공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것이었다.
나를 잘 아는 가족들과 친구들은 나의 임신과 동시에 나의 일 욕심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땡볕, 기자회견, 행진, 저녁회의. 나의 직업과 떼려야 뗄 수 없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들을 해내면서도, 가장 가까운 파트너에게, 나를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이 일들을 해도 괜찮음을 수시로 어필해야 했다. 나 자신 역시 임신이 처음이라 괜찮음 레벨을 미리 예측하는 데 실패하기도 했다. 평소라면 거뜬히 해냈을 야외 기자회견을 치르고는 옴팡 더위를 먹어 갑자기 휴가를 내거나, 행진 중에 머리가 핑핑 도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때면 나는 뱃속의 아기와 나를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한없이 죄를 지어버린 기분이 되어버리곤 했다. 슈퍼 임산부 활동가가 될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친 내 현실은 골골거리는 임산부고. 태아 돌보기도, 활동도 어중간하게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슈퍼 임산부 활동가가 될 수 있을까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내 주변 활동가 중에서 어린이를 양육하는 동료들을 한 명씩 꼽아보았다. Y와 G, S… 그리고 또 누가 있더라.. 아, J도 얼마 전에 파트너가 아기를 낳았다고 했었지. 직장생활로 얽혀있는 인권활동판에서는 양육자 동료들이 꽤 여럿 있었지만, 평화활동의 바운더리에 들어오니,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얼굴들이 정말 별로 없었다. 사람이 적기도 적거니와 결혼을 하거나 어린이를 양육하는 사람이 ‘평화판’엔 특히나 더 적은 것 같았다. 덜컥 겁이 났다. 엄마가 되고도 평화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까. 지금은 업무 시간엔 다른 일을 하고, 업무가 끝난 시간에야 겨우 시간을 쪼개어 회의에 가거나 글을 쓸 수 있는데, 아기가 태어나고 난 뒤에도 평화활동가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생은 우주와 같다고들 한다. 새로운 우주를 품은 내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게 될 거다. 이미 내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은 온갖 육아와 출산 정보, 그리고 이성애 기혼 커플의 양육이야기로 가득 찼고, 내 피드 역시 그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 되어 가고 있다. 앞으로도 내가 원래 속했다고 생각한 세상과는 조금씩 다른 모양의 세상을 마주하게 되겠지. 전혀 낯선 세상 앞에 서서 이따금씩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 세상과 동화하고 불화하면서 나름의 균형을 찾아가기 위해 애쓸 거다.
슈퍼 임산부 활동가가 되고 싶은 내 욕망은, 머지않아 슈퍼 엄마 활동가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바뀌어 있을 거다. 그리고 그 욕망은 종종, 아니 자주 좌절되고 말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내 삶의 주인공 몫으로, 내가 사랑하는 ‘활동가 김한뭉치’의 지분을 넉넉히 남겨두고 싶다. 막상 아기가 태어나면, 내 인생의 주인공 자리를 온통 내어주어도 하나도 안아까울만큼 아기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조금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언젠가 슈퍼 엄마 활동가가 되기를 욕망했다는 기억 조차 희미해질 때, 지금 남겨둔 이 기록이 스스로를 찾는 하나의 불빛이 되어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