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이 ‘전쟁통’, ‘난리통’과 유사성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다들 직관적으로 느끼고 계실 것 같습니다. 저는 의사이긴 하지만, 병원 같은 보건의료현장을 떠난 지 오래 됐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을 느끼고 바라보는 것은 의료인이라기보다 ‘시민’의 입장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그런 저에게도 코로나바이러스와 관련한 지금의 상황 속에서 전쟁과 군사주의에 대한 고민을 나누자는 ‘전쟁없는세상’의 고민은 반가웠습니다.

감염병은 쉽사리 ‘온전한’ 신체의 방어선을 쳐들어오는 ‘외부’에 대한 싸움이라고 이미지화됩니다. 이것이 실제 생체에서 벌어지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 역시 오래 됐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장 내에 서식하는 미생물들은 인간의 소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인체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부 바이러스 감염은 다른 병원성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외부 침략자 대 ‘온전한 우리 몸’이라는 단순한 이미지는 힘이 셉니다. 어린이들에게 백혈구의 역할을 알려주기 위해 나온 ‘전쟁이다! 세균 vs 백혈구’ 같은 동요도 있더군요. 우리 편과 상대편을 가르는 전쟁의 논리가 진실을 가리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특히 인체 밖에서는 생명력조차 없어,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바이러스는 우리 몸에 ‘침투’해서 생명력을 얻고 감염시킨다는 점에서 이런 비유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죠.

감염을 전쟁으로 다루는 것은 개인 차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는 ‘바이러스와 싸우는 보건의료인 이미지’를 매일 신문에서 만나게 됩니다. 감염병이 창궐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지키는 의료인은 전장의 영웅으로 떠오릅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전쟁에 비유되는 순간, 우리는 전쟁이 불러오는 원칙과 권리의 붕괴도 떠올려봐야 하지 않을까요?

2015년 메르스가 유행했을 때 역시, 의료진들은 ‘메르스 전사’로 묘사되고, 그들의 ‘사투’는 영웅시됐지만, 이후 진행된 많은 연구들은 ‘비상 상황’이라는 이유로 원칙과 권리가 무력화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감염병동에의 근무 투입 여부에 대해 사실상 ‘선택’을 할 수 없었고, 그런 와중에 안전교육과 보호조치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휴게시간이나 쉴 공간 또는 잠잘 공간 등을 포함한 규칙 없이 일단 대응이 시작되었다고 지적합니다(각주1). 그 결과는, 메르스 진료에 참여한 간호사 22%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방호복을 입은 의료인이 병동 벽에 몸을 기댄 채 휴식하고 있다.

 

이렇게 일부 의료진들의 노고는 영웅적 행위로 추앙받을 때, 서울대병원 돌봄 노동자들은 마스크 지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메르스 때도 위험에 대한 안전교육, 예방조치가 가장 부족했던 것은 미화, 간병 등을 맡은 외주・ 용역・하청・파견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영웅을 호출하고, 총동원령을 내리는 듯 하지만, 사실 그 영웅 뒤에는 숨겨진 그림자가 있고 총동원령에는 배제가 숨어있다는 점이 재난의 또 다른 특징, 전쟁의 한 면모인 것 같기도 합니다.

심각한 배제는 이번 COVID-19 과정에서도 한국사회가 뚜렷하게 마주한 현실 중 하나였지요. ‘중국인 출입금지’ 팻말과 같이 중국 출신 이주민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발언이나 행동 뿐 아니라 ‘재난 대응’ 자체가 ‘온전한 우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쉽게 배제하게 되는지를 일상적으로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전국 이주민인권단체들이 공동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정부가 발표한 ‘마스크수급 안정화대책’에서 외국인 이주민은 ‘건강보험증과 외국인등록증’을 함께 제시해야만 공적 마스크를 구매할 수 있습니다. 정주민 입장에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조항은,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6개월 미만 체류 이주민, 유학생, 사업자등록 없는 사업주 특히 농어촌지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미등록 체류자 등 수십만 명의 이주민들이 공적 마스크를 ‘구매할’ 권리로부터도 배제된다는 뜻입니다.

재난 상황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문제가 빠르게 진행되고 어떤 게 더 좋은 방법인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알기 어렵다는 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 어떤 마스크를, 언제 써야 하는가’하는 문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격한 논쟁이 되기도 했습니다. 메르스 때와는 달리, 처음으로 ‘투명한 의사소통’을 한다면서 확진자의 나이와 성별, 시간대별 동선을 공개했지만 그 중 어떤 정보가 중요하고 어떤 것들은 지나치게 많은 정보인지 판단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는 기간 내내, 마사회 비리를 고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문중원 기수의 뜻을 잇기 위한 투쟁에 참여했는데요, 50여 명도 안 되는 사람이 모인 추모 문화제에도 경찰들은 ‘감염병 예방법’에 근거한 불법집회라는 방송을 계속 해댔습니다. 급기야 추모 분향소까지 행정대집행이라는 이름으로 철거됐을 때는 크게 분노했지만, 그 전까지는 ‘왠지 집회를 줄여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국가 혹은 사회가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노동권․ 사생활보호권․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어디까지 유보해야 하는지 등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고민도 듭니다. 하지만, 그 전문가의 결정이라는 것이 실은 매우 유동적일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역사의 많은 장면을 통해 이미 알고 있기도 합니다. 전문가가 적절한 결정을 제대로 내릴 수 있는 것은 분명 결정의 근거가 민주적 가치에 튼튼하게 기반하고 있을 때일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상황은 코로나, 메르스 같은 감염병 유행에만 특이한 것도 아닙니다.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뒤나,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태풍 상황에도, 항상 재난은 전쟁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전쟁을 반대하는 우리가 재난 상황에서 정말 중요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들을 가장 잘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 혹은 감염병이 가진 인간이라는 생명체 자체를 파괴하는 힘에 반대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일구어 온 가치들, 이를테면 민주주의, 연대, 평등, 말 그대로 우리 사회를 파괴하는 힘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는 우리들 말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이 상황을 ‘함께’ 잘 살아낸 후,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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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김영선, 재난불평등과 노동인권 침해, 문화과학 98호, 2019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