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아정(독립연구활동가)
전쟁없는세상 주:
창작과 비평 2020년 봄호(통권187호)에 수록된 글을 저자가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낯선 서사의 장소, 푸순전범관리소
이 책의 저자 김효순은 학문의 장에서조차 제대로 조명되어오지 못했던 사건들을 천착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에 귀 기울이는 작업을 해왔다. 신작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일본인 전범을 개조한 푸순의 기적』에서 저자는 패전 후 시베리아 억류를 거쳐 중국 푸순(撫順)전범관리소로 이송되었거나, 산시성에 남아 일본의 재건과 방공(防共)을 기치로 옌 시산(閻錫山)과 협력해 인민해방군과 싸우다 포로가 된 타이위안(太原)전범관리소로 보내진 일본인 전범들, 그리고 그들이 귀국 후에 만든 중국귀환자연락회(이하 ‘중귀련’)의 활동에 주목한다. 낯선 서사인 만큼 이 주제에 관한 국내의 선행연구는 거의 전무한 상태다. 저자는 방대한 일본어 사료와 수기를 비롯한 면밀한 조사를 토대로 하면서도 간명하고 친절한 필치로 독자들 앞에 섰다.
중국은 다른 전승국에 비해 전범재판 시기가 늦었다. 1956년의 특별군사법정에서 대부분의 전범은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났고, 45명만이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사형수도, 무기형도 없었다. 극형을 받아 처형된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다른 전승국의 일본인 전범재판과 크게 다른 점이다.(각주1) 전범들에 대한 전례 없는 예우와 관대한 판결에 분노한 중국인이 많았지만, 전범 관리의 총책임자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제재나 복수로는 증오의 연쇄를 끊을 수 없다”(각주2) 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푸순에서 전범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푸순으로 이송된 969명의 전범들이 가장 놀란 것은 파격적인 처우였다. 관리소 직원은 수수밥을 먹는데도 자신들에게는 흰쌀밥과 고기와 채소 반찬이 나왔고, 강제노동도 없었다. 충분한 자유시간 속에서 전범들은 “일본군 현역 시절이나 시베리아 억류 기간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허덕였는데, 중국에 와서 여유 시간이 넘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됐다”고 한다.(각주3)
중귀련이 일궈낸 또 하나의 전후사(戰後史)
전범들은 귀환 후 증언을 하고 수기를 모아 출간했다. 중국의 피해 유족들을 직접 찾아가 사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대다수 일본인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였다고 할 수 있다. 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은 채 경제개발에 몰두했던 시대를 지나,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라는 복류(伏流)가 1990년대 중반에 일본사회의 표면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중귀련은 주류 사회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가해자들의 말하기와 쓰기’를 통해 과거의 ‘전쟁책임’을 물었고, 계간지 『중귀련(中歸連)』을 발행하여 역사수정주의에 대항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자위대의 해외 파병 등 ‘현행의 전쟁’ 또한 반대하는 이질적이고 독보적인 행보로 빛을 발했다.
푸순에서 시작된 속죄의 나날들은 1957년 ‘중귀련’의 결성으로부터 2002년의 해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1988년에 천황 히로히토가 위독해졌을 때 전 국민의 자숙(自肅)이 강요되는 사회 분위기에 맞서 중귀련이 ‘천황제 반대’를 외치며 천황의 명령으로 수행한 자신들의 가해경험을 증언과 수기로 공론화했다는 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각주4) 국가의 서사와는 ‘다른’ 서사를 창안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천황의 명령에 의해 저질러진 자신의 전쟁 범죄를 자각하고, 그 책임의 일단을 맡은 사람으로서 천황의 전쟁책임을 추궁할 의무를 다한 것이다.
탄바이(坦白),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
학살극을 벌여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일본인 전범들이 어떤 계기로 잘못을 알아차리게 되었을까? 가해자들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소환한 사례들 중 하나인 도미나가 쇼조(富永正三)는 어차피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생각에 한두 시간 만에 주요 죄행을 빠짐없이 나열하여 제출했다고 한다. 이에 관리부장이었던 김원(金原)은 “이것은 탄백서가 아니다. 탄백이란 고뇌에 찬 격렬한 자기투쟁 끝에 심각한 반성 위에”서 가능한 것이라 질타했고, 도미나가는 일주일 만에 스무 장의 탄백서를 다시 제출했다. 그는 상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해도 인명을 살상한 실행자로서의 책임을 피할 수 없으며, 그 책임을 피하려는 자는 명령자를 비판할 자격 또한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각주5)
전범들은 ‘탄바이’(탄백) 학습을 통해 자신의 경험에 뒤늦게나마 제대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가해 행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며, 잔학행위에 대한 인정은 사회적 낙인을 스스로에게 불러들이는 것과 같다. 이에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가해의 ‘기억’을 말한다는 것은 가해 ‘사실’에 대한 증언과는 다른 층위에 있으며, 자신이 누군가를 억압하는 편에 있었음을 뒤늦게나마 자각하고 더 이상의 가담을 거절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잘못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공론장에서 말함으로써 ‘가해자들의 말하기’는 ‘존엄의 선언’이 된다.(각주6)
‘일중우호’만으로는 다 말해질 수 없는 이야기- 식민지와 여성 대한 폭력
저자가 전범을 교육하는 관리소 직원들의 경험 또한 놓치지 않고 조명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전쟁이 끝나고 뒤집힌 권력관계 속에서 전범들과 함께 지내게 된 직원들은 전쟁에서 일본군에게 가족이 죽임을 당했거나 그러한 폭력에서 살아남은 중국인들과 조선족들이었다. 일본인 전범들이 ‘런쭈이(認罪)’와 ‘탄바이’에 이르게 된 것은 700명에 이르는 동북공작단이 심문과 조사에 투입된 기획의 성과이기도 하지만, 그 토대를 일구어낸 것은 실제로 전범과 부딪히며 생활한 관리소 직원들이었다. 그들 중 전범들의 수기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은 김원, 오호연, 최인걸, 장멍스인데, 이들 중 앞의 세 명은 조선족이다.
전범 인수단계부터 통역으로 시작해 관리소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김원은 훗날, “전범 개조가 스스로를 개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각주7)고 밝힌 바 있다. 그는 푸순에 부임한 후에도 한동안 마음의 갈등이 심했고,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미원조전쟁(한국전쟁)에 의용군으로 나가게 해 달라고 상사에게 요청할 정도였다고 한다.(각주8)
이렇듯 전범들이 가해 행위를 인정하고 이에 대한 성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는 ‘보복’이 아닌 ‘다른’ 관계를 만들어내려고 고군분투했던 관리소 직원들의 노력이 스며있다. 푸순에서의 개조는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전범들은 귀환 후 일본 각지에서 중귀련 활동을 하면서도 가해 행위와 사죄의 대상을 ‘중국인민’ 혹은 ‘중국’으로 한정한다. 중귀련 40년의 발자취를 기록한 책에서도 오호연의 훌륭한 인간상을 언급하면서 “중국 인민의 위대함에 압도당했다“라고 되어 있다.(각주9) 가장 가까이에서 지냈을 조선족 직원들이 ‘일본어’ 통역을 하는 상황에 대한 식민지적 상상력의 결핍은 그들이 지려고 했던 책임이 전쟁을 넘어 식민지로 이어지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중귀련의 한계를 말할 때 1992년부터 조직적인 차원에서 시작한 위안소에 대한 증언을 빼놓을 수 없다. 2000년 도쿄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증언한 일본인 가해병사 두 명 또한 중귀련 소속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중귀련 전체를 대상으로 ‘위안부 조사카드’의 작성을 요청했을 때, 제출한 회원은 15%에 그쳤다고 한다.(각주10) 이러한 반응은 당시에 전시성폭력이 ‘가해’ 혹은 ‘폭력’으로 인식되고 있지 않았다는 한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이야기의 말문을 열며
이 책에는 전범관리소를 둘러싼 남성들의 서사에 미세한 균열을 내며 드문드문 여성들의 이야기가 출몰한다. 수감 중 뇌혈전을 일으켜 누워 지내야했던 전범을 돌본 간호사, 일본적십자사 간호사로 전쟁에 동원되었다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여성들, 중일간의 정부접촉이 없던 1952년에 민간 교류의 물꼬를 튼 고라 도미(高良とみ),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위생부장관이 되어 1954년 중국홍십자회 대표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한 리더취안(李德全), 전범 처리의 총괄을 담당했던 초대사법부장 스량(史良),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도 동지를 밀고하지 않은 조선의 여성전투원과 일본인 전범의 아내들까지. 아직도 다해지지 못한 채 지면(紙面) 밖에서 웅성거리는 그들의 말은 저자가 건네준 이름과 사건 하나하나를 단서로 이 책을 읽은 누군가가 길어 올릴, 도래할 역사다.
책의 후반부에는 중귀련의 해산과 동시에 후속 세대들이 ‘푸순의 기적을 이어가는 모임’을 결성하고, 사이타마(埼玉)현 카와고에(川越)시의 변두리 창고를 빌려서 중귀련 평화기념관을 지었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곳에는 방대한 관련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증언할 수 있는 당사자들이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푸순에서 전범들과 관리소 직원들이 일궈낸 ‘다른’ 관계의 흔적들이 깃든 기록물은 아직 말해지지 못한 ‘다른’ 이야기들이 시작되는 기점(起點)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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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순,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서해문집, 2020년) 38쪽.
- 于文, 「’鬼’から’人’になった戦犯たち」『人民中國』인터넷판,
http://www.peoplechina.com.cn/zhuanti/2015-09/14/content_704058.htm (최종검색일: 2020년2월14일) - 김효순, 앞의 책, 222쪽.
- 후지이 다케시,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사례」, 『베트남전쟁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자료집』(2018년) 49쪽.
- 앞의 책, 208-209쪽.
- 인권활동가 미류는 2018년 4월 20일에 열린 베트남전쟁시기한국군에의한민간인학살진상규명을위한시민평화법정 국제학술대회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베트남전쟁에 연루된 우리>의 3부 플로어토론에서 가해자들의 말하기가 ‘존엄의 선언’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해 주었다.
- 김효순, 앞의 책, 163쪽.
- 김효순, 앞의 책, 175쪽.
- 후지이 다케시, 위의 글, 52쪽.
- 中国帰還者連絡会編, 『帰ってきた戦犯たちの後半生』(大阪: 新風書房, 1996) 667~6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