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쭝 (비폭력 트레이너 네트워크 망치)
“너 메갈이지?”
“이 사람 말하는 거 보니까 이거 완전 한남이네.”
“지금 일베 인증하냐?“
“그러니까 님은 조국 찬성입니까? 반대입니까?”
종종 세상에는 ‘우리편’과 ‘반대편’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특히 인터넷 댓글이나 SNS를 볼 때 더 그렇다.) 이 세계에서는 ‘수구 꼴통’ 아니면 ‘좌빨’이고, ‘메갈’ 아니면 ‘한남’, ‘친일파’ 아니면 ‘애국자’인 듯하다. 중간은 없다. 여성운동을 지지하지만 세부 이슈에 대해 이견이 있는 사람,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해 반대하지만 야당을 지지하진 않는 사람. 일본 정부의 극우적 언행에 반대하지만 일본 제품을 사고 일본 여행을 가는 사람. 아주 흔한 보통의 사람들 말이다.
흑백의 세계는 종종 더 선명하고 진한 흑백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우리편인지 아닌지 검증하려 나서고, 우리편이 아니다 싶으면 저 극단의 반대편으로 규정해 비난하고 조롱한다. 내몰린 상대방은 반격을 시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나온 언행은 다시 그가 ‘반대편’이라는 증거로 활용된다. 말은 점점 더 험해지고 격해진다. 이렇게 서로는 점점 더 멀어진다. 일종의 악순환이다.
‘우리편’과 ‘반대편’밖에 없는 흑백의 세계
사실 이렇게 뚜렷한 반대편을 설정하는 방식은 우리편을 결속시키고 ‘전투 의지’를 드높이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다. (바로 그래서 전쟁이나 혐오 선동에서도 자주 활용된다.) ‘좌표’가 찍힌 대상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화력을 생각해 보자. 그 놀라온 자발성과 참여정신이라니!!!
효과성이 높다는 것은 매우 큰 장점이다. 오랫동안 억압받아온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런 방식의 싸움을 통해서 문제는 우리편이 아니라는 것, 기득권을 가진 반대편이 문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반대편에 대해 반격하면서 자신감과 자긍심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운동에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운동에서 우리편은 어차피 소수이기 때문이다. (마치 대부분의 사람이 우리 편 같아 보이는 착시를 SNS가 자꾸 일으키지만 말이다.) 운동에서 이기려면 반대편을 모욕해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편을 조금씩 늘려가야 한다. 아직 우리편이 아닌 사람들을 저 먼 반대편으로 내몰아서는 이길 수 없다.
또한 이렇게 확신에만 가득 찬 태도는 운동의 수많은 논점들, 진지한 고민과 성찰의 기회를 제거해버린다. “우리의 주장이나 방식이 정말 옳을까? 다른 관점으로 볼 수는 없을까”, “지금의 방식이 혹시 다른 소수자를 배제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우리의 신념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중요한 질문들 말이다. 이럴 때 운동은 교조주의와 정파주의로 빠지기 쉽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을 차별하려는 사람과 손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쟁에 찬성하는 사람, 환경을 파괴해 제 잇속을 챙기는 사람과도 마찬가지다. 그런 어설픈 절충과 화해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꾸준히 사람들을 우리편으로 설득하되 반대편과 타협하지 않는 것, 그것이 운동의 정도(正道)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운동을 하려고 할 때 첫번째 질문은 ‘어디까지가 우리편이고 어디까지가 반대편이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분석 툴을 소개하려고 한다.
적극적 반대편을 설득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위에 보이는 그림은 사회운동 전략 수립 워크숍 중 ‘연대의 스펙트럼’ 프로그램에서 쓰이는 그림이다. ‘연대의 스펙트럼’은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누구이며 반대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고, 어떤 사람들에 대응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려준다. 프로그램은 매우 쉽고 간단하다. 4~6명씩 모둠을 나눈다. 반원을 그린 뒤 5등분을 한다. 왼쪽부터 ‘적극적 우리편’, ‘소극적 우리편’, ‘중립’, ‘소극적 반대편’, ‘적극적 반대편’을 적는다. 그리고 각 칸에 그에 해당하는 그룹이나 인물을 쓴다. [용3]
여기서 ‘적극적 우리편’은 우리의 주장에 동의하고 내 편에서 서서 함께 싸울 사람이다. ‘소극적 우리편’은 우리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관련 활동은 거의 안 하는 사람’이다. ‘중립’은 입장을 정하지 않은 채 관망하거나 문제를 잘 모르고 알아도 무관심한 사람이다. ‘소극적 반대편’은 우리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우리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는 사람이다. ‘적극적 반대편’은 우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우리를 막아서는 사람이다.
각 칸을 채울 때에는 되도록 세부적으로 쓰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특정 정당이나 단체 안에도 다양한 입장과 역할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럴 때는 ‘OO당의 ☆☆한 당원들’, ‘ㅁㅁ단체 △△위원회’ 등으로 적어도 된다.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잠재적인 그룹이나 인물을 떠올려도 좋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우리편을 발굴할 수도 있다.
이 분석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소극적 우리편’, ‘중립’, ‘소극적 반대편’이다. 흔히 활동가 혹은 운동의 지지자들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적극적 반대편’의 막돼먹은 언행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이런 사람들은 설득되지 않는다. 이들과 소통하는 것은 대부분 소모적이다.
게다가 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모든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도 없다. ‘소극적 반대편’이 적극적인 반대에 나서지 않거나 중립적 자세를 취하고, ‘중립’적인 사람들이 우리의 주장에 조금씩 동의하고, ‘소극적 우리편’이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와 함께 저항하면 우리는 이길 수 있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에서는 이러한 칸에 속한 사람들을 보다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각각의 입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들이 왜 그러한 입장에 서는지, 어떤 그룹 또는 인물들과 더 많이 연대해야 효과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지, 이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에 대해 모둠 안에서 함께 토론하고 전체와 공유한다.
더 많은 사람들을 ‘우리편’으로 불러들이고 싶다면
‘연대의 스펙트럼’ 프로그램은 운동의 지형을 조금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특히 장기적으로 운동 및 캠페인을 준비할 때, 네트워크를 새로 만들거나 확대할 때 유용할 것이다. ‘우리들끼리 외롭게 싸우고 있다’고 느끼던 활동가들이라면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감을 얻을 수도 있다.
또한 이는 좁은 의미의 당사자주의가 가져오는 한계를 넘어서는 도구이기도 한다. 소수자운동이라고 해서 꼭 해당 소수자만이 ‘적극적 우리편’에 서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도 함께 운동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여성운동에서도 “생물학적 여성”은 ‘적극적 우리편’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다양한 입장을 견지하기도 하고, 심지어 ‘적극적 반대편’에 서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스펙트럼 안의 다양한 맥락을 끌어안는 활동가, 그에 맞는 언어로 소통하려는 활동가, 망설이는 ‘소극적 우리편’을 좀 기다려주는 활동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 운동에 대한 나의 확신이 과연 맞을까?’ 때때로 고민하는 활동가들도 늘어났으면 좋겠다. 그러한 활동가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우리편’으로 불러들여 기어코 운동의 외연을 넓힐 것이라 믿는다.
* ‘연대의 스펙트럼’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이나 다른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 등은 ‘https://guide2change.org’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