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희정 (문화평론가)

 

“군 가산점 폐지는 한국 온라인 여성혐오의 마르지 않는 샘.”

2015년 <시사IN>의 전혜원·천관율 기자는 온라인 여성혐오 문화를 진단하면서 이렇게 썼다. 실제로 1990년대 말 본격적인 www의 시대가 열리고 한국사회의 여성혐오가 새로운 미디어와 만나 변이되기 시작할 때, 군 가산점제 폐지는 남성들의 화력을 집중시키는 주요 논쟁거리였다. 이후로도 “여자들은 대한민국 발전에 무임승차했다”거나 “의무는 다 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찾는 김치녀”, “여자도 군대 가라” 등 각종 여성을 공격하는 수사의 중심에는 징병제의 문제가 놓여있었다. 그렇다고 “까짓 거 가고 만다”라고 응수할 수는 없다. 한국사회에서 여성과 군대가 맺는 관계에 대한 사유는 “국가는 어떻게 군대를 통해 ‘정상국민’을 규정하고 재생산해 왔는가”와 “여성은 왜 군역으로부터 ‘소외’되어 왔는가” 등 좀 더 복잡한 질문을 경유한 군사주의 자체에 대한 비평이 되어야지, 단순히 ‘권리와 의무, 그리고 자격’에 대한 논의로만 축소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파퓰러 페미니즘을 견인했던 할리우드 산(産) 각종 여성영웅의 형상과 그를 둘러싼 페미니즘 담론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퓨리오사, 원더우먼, 캡틴마블, 대니·그레이스… 이들은 우리가 여성을 ‘제 2의 성’이 아닌 ‘보편인간’으로 상상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각자의 매력을 가지고 있고, 꽤 근사하다. 하지만 질문은 계속 자라난다. 어째서 여성영웅을 상상하는 방식, 그리하여 보편인간을 상상하는 방식은 이토록 군사화되어 있는 것일까.

미국 파퓰러 페미니즘의 분수령이 되었던 2014년을 전후하여 할리우드는 빠르게 페미니즘을 흡수해서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없는 시대”에 페미니즘 패치를 일종의 치트키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젠더벤딩이나 미러링 등을 신선함의 전략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등장한 작품이 국내에서도 “페미니즘 영화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였다. 페미니즘에 호의적이지 않은 이들은 이 영화가 “여성혁명이 아닌 보편혁명을 그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혁명과 보편혁명은 도대체 어떻게 구분되는 걸까?) 이보다 더 흥미로운 해석은 페미니즘 내부에서 나왔다. 퓨리오사의 신체성과 군인 정체성이 그를 ‘유사 남성’으로 만들며, 따라서 이 영화는 페미니스트 텍스트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등장한 것이다.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질주> 스틸컷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질주> 스틸컷

무엇이 정답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나에게 <분노의 도로>는 충분히 페미니스트 비전을 가지고 있는 작품으로 다가왔다. 일단, 건장한 신체와 무기를 다룰 줄 아는 능력, 그리고 친절하지 않은 태도를 ‘유사 남성’으로 칭한다는 것은 ‘역사적 남성성’(각주1)을 의학적으로 남성으로 식별된 이들만의 자질로 환원시키는 본질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식이라면 여성은 언제나 둘 중 하나에 머물 수밖에 없다. ‘유사 남성’이거나 ‘비(非)남성’이거나. 따라서 퓨리오사를 유사 남성이라고 폄하하는 것에는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퓨리오사의 근본적인 혁명의 수단이 전쟁이라기보다는 그린랜드의 어머니들이 보존하고 있었던 ‘씨앗’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심고 기르고 먹이는 능력을 길러왔으되 언제든지 싸움의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는 존재로서, 그렇게 평화를 위해서는 갈등을 불사하지 않는 자들로서 그린랜드의 어머니들은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신화를 넘어선다. 그들의 후예인 퓨리오사는 좀 더 넓은 젠더 스펙트럼을 실천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영웅의 형상은 이미 젠더화되어 있고, 따라서 여성 역시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총을 쏘고 트럭을 몰고 폭탄을 터트려야 한다. 퓨리오사는 이처럼 젠더화된 영웅의 형상과 타협하고 교란하면서, 그 영웅의 경계를 다소간 오염 시킨다.

퓨리오사는 DC의 <원더우먼>, 마블의 <캡틴마블>, 그리고 폭스의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끝에 총 대신 씨앗을 쥔 퓨리오사와 달리 원더우먼이나 캡틴마블, 대니·사라·그레이스 중 누구도 군대로부터 탈주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군인의 형상으로 탐구되면서, 인간 젠더의 설정값이 ‘역사적 남성성’에 맞춰지는 것은 전혀 도전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열광은 ‘역사적 여성성’에 대한 혐오와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군사화된 상상력 속에서 오히려 <다크 페이트>에서 아놀드 슈월츠제네거가 연기한 ‘터미네이터’만이 군사주의로부터의 탈주를 ‘해방’이라고 말한다. <코만도>(1985)로부터 ‘터미네이터 시리즈(1984-2019)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할리우드의 THE SOLDIER 였던 그가 이런 대사를 말한다는 건 마찬가지로 흥미롭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한 축을 담당하는 아이콘으로 그야말로 보편이었던 자만이 그 보편으로부터 안전하게 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군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여전히 그 ‘역사적 남성성’만이 보편의 자리를 견고하게 차지하고 있다.

영화 스틸컷

영화 <원더우먼> 스틸컷

물론 여성영웅 서사가 군사화되는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다크 페이트>는 그 맥락을 잘 보여준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1984년 작 <터미네이터>에서 사라 코너는 인류를 구원할 존 코너를 낳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미래 로봇 터미네이터의 표적이 된다. 그로부터 35년 후.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라는 <다크 페이트>에 이르러 인간을 위협하는 터미테이터를 제거하는 전사로 거듭난다. 로봇을 사냥하던 중 그는 ‘가임기’ 여성 대니가 터미네이터 Rev-9에게 쫓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미래에서 온 군인 그레이스와 함께 대니를 지키기 위해 나선다. 사라는 Rev-9이 (자신이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니의 “자궁”을 쫓는다고 판단하고, “나도 대니와 같은 상황에 놓여봐서 아는데, 그건 엿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이는 지금까지 이 세계에서 여성이 어떻게 ‘인간’이 아니라 ‘인간(=아들)을 낳는 자궁’으로만 여겨져 왔는지에 대한 비평이자,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구태의연함에 대한 자조적 코멘트다.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사라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사라

영화는 이에 더해 여성은 그저 어머니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 기꺼이 총을 드는 전사일 수 있다고 강변한다. 반군의 지도자는 대니의 아들이 아니라 대니 자신이었던 것이다. 오직 남성뿐이었던 영웅의 얼굴을 여성의 얼굴로 반전시키는 것. 그것이 스크린의 남성중심성을 비판하고 여성이 ‘영화적 시민권’을 얻는 방법 중 하나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그러나 “평화란 상대보다 더 큰 막대기(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토니 스타크/아이언맨)이라는 믿음을 뒤집지 못한다면, 여성영웅 역시 군사주의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 군사주의의 매트릭스 속에서 여성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만이 남아 있다. 군인을 낳고 키움으로써 군역의 의무를 다하거나, 스스로 군인이 되어 군역의 의무를 다하거나.

인류학자 엄기호는 온라인 여성혐오에 대한 비평인 <신자유주의 이후, 새로운 남성성의 가능성/불가능성>(2011)에서 임노동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시민권을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여성혐오를 해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는 자유시장(자유)과 대의제 민주주의(평등), 그리고 이 두 개를 연결하는 남성중심민족(우애)이 보로메오의 매듭으로 얽히며 등장한 근대국가 시스템 외부를 상상할 때에야 가능한 기획이다. 그런데 이 근대국가는 기본적으로 국가 간 전쟁이라는 군사주의의 거대한 판 위에서 가능해진 것이기도 하다. 이때 남성 시민들 간의 배타적인 ‘우애’에 기반하고 있는 내셔널리즘은 지속적인 전쟁을 통해서 형성, 강화되었다. 페미니스트가 여성의 시민됨을 주장할 때 “여자도 군대 가라”는 말이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건 현재의 시민권 자체가 군복무를 근간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군역에 대한 논의를 “군리와 의무, 그리고 자격”이라는 테두리 너머로 가져간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근대국가 시스템 외부를 상상해야 한다는 의미일 터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시스템 외부를 사유하는 “능력과 배짱”(김엘리), 그리고 새로운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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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짧은 머리, 근육질, 뛰어난 신체적 능력, 바지” 등이 남성다움의 스테레오타입이자 남성성의 모델로 여겨지는 것은 문화적인 문제이며, 인간의 특정한 역사 속에서 그렇게 여겨져왔다는 의미에서 이 젠더 스테레오타입을 ‘역사적 남성성’이라 칭하고자 한다. 반면 “꾸밈, 긴 머리, 섬세함, 치마” 등은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역사적 여성성’으로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