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재난이 일깨워준 안보에 대한 새로운 감각
코로나 19 시대를 살며 새삼 놀랐던 사실은 사람들이 정말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한 지역에서 발생한 바이러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누군가가 가지고 있던 바이러스가 2차, 3차를 넘어 5차, N차 감염까지 발생시켰다. 바다 건너 낯선 땅에 사는 이름 모를 사람은 물론이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눈인사조차 하지 않던 이웃이 나의 삶에 이렇게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인 줄은 그 전에는 미처 감각하지 못했다. 살아남기 위해 경쟁에서 이기고, 불필요한 교감을 피해가며 각자도생해 왔던 현대의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할 수 없게 되었고, 한 사람이 안전하지 않으면 나 역시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코로나19로 인해 드러나게 되었다. 나의 안전과 동시에 나의 이웃, 이웃의 이웃의 안전을 도모해야함은 인류가 부정할 수 없는, ‘생존을 위한 임무’가 되었다.
소리 없이 우리의 삶을 덮친 듯 보이는 코로나19는 사실 여러 해 전부터 기후과학자들로부터 예견되어왔던 재난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어 서식지를 잃은 동물들과 사람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인수공통감염병이 창궐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경고였다. 석탄연료 기반의 산업과 발전이 초래한 기후변화는 기존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며 우리 사회의 여러 층위에서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높아진 해수면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기후난민들이 발생했고, 온종일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폭염으로 사망했다. 고갈된 수자원을 둘러싼 분쟁 또한 기후변화가 가져온 새로운 갈등의 양상이다. 어느 한편에서 사람들이 냉난방 시설에서 쾌적한 일상을 지내며 공장식 축산물을 소비하고, 석탄에너지 산업이 배를 불리고 있는 동안 벌어져온 일이다. 기후변화의 실질적 위협은 거대한 사회구조 아래 인류가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보여주면서 안전을 위해서는 위험에 당장 직면한 사람들만이 아닌, 기후변화에 기여한 모두가 함께 책임지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이러한 감각은 우리에게 필요한 안보가 무엇인지 강력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일상을 덮친 재난은 별다른 무리 없이 ‘전쟁’이라 빗대어 지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흔히 생각해온 전쟁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현대사회에서 인류에게 닥친 실질적 위협은 전투기나 미사일이 아닌 바이러스와 기후위기다. 현재를 사는 인류는 기존의 군사안보 관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위험 속에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안보는 다른 존재의 안전이 나의 안전이라는 인식에서 시작해,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위기대응을 위해 적극 협력하는 방식으로 다시 쓰여져야 할 것이다.
군사강국 5위 공약이 간과한 성적표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지난 3년 동안 국방비는 연평균 7.5%씩 매년 증가해왔다. 2019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국방비 지출은 세계 10위로 7년째 같은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 (<2019년 세계 군사비 지출 보고서>,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 2020년 책정된 국방예산은 사상 처음으로 50조원을 넘겼다. 이 가운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3월 총선을 앞두고 “세계 5위 국방 강국”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미국의 군사력 평가기관인 ‘글로벌파이어파워’가 발표한 2020년 세계 군사력 랭킹에서 한국이 6위를 기록한 것을 고려하면, 이 공약의 실현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여당의 총선 압승으로 문재인 정부의 군비 증강 행보는 더욱 힘 있게 추진되리라 예상된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군비 증강을 통해 ‘안보강국’이 되기를 꾀하는 동안, 정부와 국회에 날아온 중요한 성적통지서가 있다. 2019년 9월, 한국 정부는 기후를 위한 결석시위에 나선 청소년들이 매긴 기후대응 성적표에서 그 어렵다는 ‘올빵’을 맞았다. 문제 파악력, 의지와 적극성, 신뢰성 및 구체성, 모든 영역에서 0점을 받은 것이다. 같은 해 ‘기후변화대응지수 (CCPI) 2020’에서도 한국은 “온실가스 배출과 에너지 소비 저감 노력이 매우 미흡”하다는 혹평을 받으며 기후위기 대응지수 전체 61위 중 58위를 차지했다. 지난 3월 청소년기후행동은 “정부가 알면서도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음으로써 헌법이 보장한 생명권과 행복 추구권 및 정상적인 환경에서 살아갈 환경권 등을 보장하지 않는다”며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시프리, SIPRI)는 2019 시프리 연감에서 “기후변화가 국가의 안보와 국제적 안정에 심각하고 불가피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을 우려하며 “탄소배출 저감을 위한 시정조치와 기후변화적응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것이 안보를 위한 핵심 과제임을 지적한 것이다. 기후변화가 안보적 위험으로 대두되고 있는 현 시점에 한국정부가 청소년들과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기후대응 성적표’는 군비를 늘림으로써 ‘안보강국’이 되겠다는 정부와 여당의 야심찬 포부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고스란히 드러낸다.
각국의 군대는 막대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면서도 1997년 교토의정서에서 정한 탄소배출 감축 책임에서 면제되어왔다. 군사시설을 운영하고, 군사훈련과 작전을 수행하는 데에 막대한 석탄에너지를 소비하지만, 이로부터 얼마만큼의 탄소를 배출하고 있는지는 군사 기밀이라는 빌미를 들며 공개조차 하지 않는다. 또한 군비 증강은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과 인적 자원을 빼앗는다는 점에서 기후위기 대응과는 반대로 향하는 방침이라고 볼 수 있다. 2019년 기준으로 환경부의 기후변화프로그램으로 책정된 예산은 792억 원이다. 50조 규모에 육박하는 국방비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수준의 금액이다. 안보가 소수가 아닌 모두의 안전을 위하는 데 목적이 있다면, 기후위기 해결은 안보가 풀어야 하는 최우선 과제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21대 국회의 인간안보 실현을 기대한다
재난은 그동안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군사안보 성역’에 균열을 내고 있다. 한국 정부는 코로나19로 비롯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최초로 국방비를 삭감해 코로나19 재난대응을 위한 재원을 마련했다. 1, 2차 추경을 통해 삭감된 국방비는 총 1조 4700억 원으로 F-35A전투기와 해상작전헬기 등 외국 무기 도입에 쓰일 예산이었다. 21대 국회 개원 이후 3차 추경이 이뤄지면, 7000억 가량의 국방비가 또다시 삭감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이후에도 국방비 삭감이 이뤄질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점쳐지지만, 당장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것이 전투기가 아닌 재난지원이라는 것을 인정한 결과다.
21대 국회에서는 재원의 평등한 분배와 차별철폐 역시 시급한 과제로 남겨져 있다. ‘K-방역’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공적마스크 제도와 재난지원금은 이주민, 유학생 등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재외국민에 대한 차별과 사각지대를 남겼다. 또한 소수자를 겨냥한 혐오와 낙인은 이들의 고립을 불러오며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심각한 위험으로 대두되었다. 차별금지법과 같이 기본인권을 보장하는 법제도가 부재한 가운데, 오래도록 용인되어온 차별과 혐오가 재난상황에서 증폭된 결과다. 안전의 사각지대가 발생할 때, 이는 당연한 권리를 침해받은 사람에게는 물론, 사각지대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위험한 신호가 된다. 안보가 연결을 감각할 때, 비로소 모두의 안전으로 향할 수 있다. 안보가 사람의 존엄을 중심에 두어야만 하는 이유다.
문재인대통령은 취임 3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인간 안보를 중심에 놓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국제협력을 선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 구체적인 이행의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분단 체제 아래 강력한 군사주의에 기반해 왔던 한국 정치사에서 인간안보가 정부의 기조로 언급된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인간안보는 “오늘날 사람들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더 큰 원인은 세계의 파멸에 대한 공포감보다는 일상생활에 관련된 불안감(유엔개발계획 <인간개발보고서>, 1994)”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군사적 안보를 넘어 직업, 건강, 교육, 환경, 인권 등 “안전한” 일상의 토대가 되는 요소들을 보장하고 적극적 평화를 실현하는 데 중점을 둔다. 안보가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 쓰여질 때, 군사비 축소는 필수적이다. 군비경쟁이 아닌 평화체제를 기반으로 한 안보정책에서는 차별 없는 자원 분배와 모두의 안전을 위한 사회안전망 확충, 기후위기 대응이 우선과제가 될 것이다. 재난은 인류에게 안보에 대한 새롭고도 중요한 도전을 던졌다. 21대 국회가 군축과 평화체제 실현, 인권보장이라는 국가차원의 실천으로서 이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답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