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화(서울대학교 국사학과 BK조교수)

 

강인화 선생님의 글은 6월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작성자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조금 늦어졌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정의 역사를 연구해온 우테 프레베르트는 과거 독일에서 명예라는 감정이 남성들의 군복무를 독려하고 병사되기를 추동했던 주요 원천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신사로서의 성역할에 대한 자부심과 명예가 남성들 스스로 군인이 되도록 하는 동력이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군복무를 추동해온 감정도 이와 같을까?

지금까지 한국의 군복무자들이 병역에 대해 토로해온 감정들은 피보호자를 지키고 안위를 제공했다는 보호자로서의 명예의식과 자부심으로 충만해있지 않다. 그보다는 민주화 이후 본격화된 병역 공정성 추구에서 드러나듯, 병역이 ‘돈 없고 빽(back) 없는 이들’에게 부과·전가된 부담이라는 인식 하에서 계급·계층적 차별로 인해 피해를 받았다는 열패감과 울분에 더 가깝다. 이에 더해, 최근 제기된 병역 대상에 여성을 포함시키자는 ‘여성징병제’ 또는 ‘남녀평등징병제’ 주장은 군복무자로서의 명예와 자부심을 여성들과 평등하게 공유하겠다는 ‘신사적’ 태도라기보다 병역이 남성에 대한 역차별로 작동하고 있다는, 피해자로서의 토로에 가까워보인다.

한편, 이렇게 병역을 피해와 차별로 인식·경험하는 당사자들이 느끼는 열패감과 울분은 징병제 운영의 ‘공정성’과 ‘평등’을 추구하도록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해왔다. 그리고 이와 함께 병역의무의 확대·보편화가 이루어져왔다. 이제 남성 ‘내부’의 계급·계층적 평등에 더해, 병역 평등과 공정성 추구의 대상이 ‘여성’으로 확대되는 중이다. 이 글은 한국 징병제를 틀지우는 중요한 기능을 해왔던 병역 당사자들의 군복무에 대한 인식과 감정의 형성 과정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1950년대 징병제 운영과 학력·계급 차별 논란을 살펴본다.

한국 최초의 징병제 시행은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서 이루어졌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식민 당국은 일본으로의 동화가 완성된 뒤에야 식민지 조선에 병역을 부여할 수 있다던 초기의 계획을 접고, 전장 동원을 위해 조선 청년의 징집을 단행하였다. 이때 일본은 서구에서처럼 병역이 참정권 및 여타 권리의 기초가 아니고, 의무를 부담할 수 있는 자격 그 자체가 권리이자 특권이라는 논리를 폈다. 권리 없는 의무로서의 병역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차별이자 피해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바탕 하에서 해방 이후 새롭게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징병제 시행은 좀처럼 추진되기 어려웠다. 또한 1949년 8월 6일 남성의 병역의무를 명시한 병역법(법률 제41호, 1949.8.6) 제정 뒤에도 의무 대상자 모두를 징집하는 현재와 같은 방식의 보편적 징병제는 작동하지 않았다. 당시 병력규모는 대략 10만 정도로 이후 한국전쟁이 경과하면서 규모가 증대되었고 전쟁 직후에는 최대 72만으로 늘어났다. 대량 병력 유지를 위해 복무기간이 장기화되면서 일반 병사들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그런데 총력전이 한창이던 당시 병역의무의 대상자임에도 징집으로부터 연기·유예조치를 받은 이들이 있었다. 대학 재학생들이 징집연기조치의 주요 대상자들이었다. 이는 1949년 8월의 병역법 제정 및 1950년 2월 병역법시행령이 공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령으로 공포·실시된 재학자징집연기잠정령에 따른 조치였다. 병역법(법률 제41호) 제40조에 의하면 대통령령의 규정에 따라 지정된 학교에 재학할 경우 만26세에 이르기까지 징집을 연기할 수 있었다. 재학자징집연기잠정령(대통령령 제283호, 1950.2.28)은 ‘대통령령의 규정’의 적용 사항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이에 따르면, 6년제 중학교・고급중학교・사범학교 재학자는 만22세, 초등교사양성소・중등교사양성소・초급대학생은 만23세, (의과 및 치과를 제외한 법・문학계통) 대학은 만24세, 치과대학・의과대학・대학원생은 만25세까지 각각 징병을 연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초기에 계획된 징병제의 운영 방식은 병역을 부담하는 데 있어, 남성이라는 성별과 일정한 연령이라는 기본 조건에 더하여, 학력에 따른 그리고 학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계급・계층에 따른 차등 배분에 기초하였다. 정책 입안자의 관점에서 재학생 징집 연기는 개인의 교육권 보장이라는 측면보다는 전체 인구 차원에서 고려된 것으로, ‘국민의 실력저하를 우려’한 조치로 설명되었다. 이에 근거하여 한국전쟁의 전개 속에서도 재학생들은 징집을 연기 받았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9월 현재 징병 연기 대상이 되는 ‘전시(戰時)학생’은 대학생 24,570명, 중・고등학생 120,000명으로, 모두 14만4천5백7십 명의 학생에게 전시학생증을 교부하고, 졸업생에 대해서는 졸업 이후 60일간의 징병 유예 기간이 주어졌다. ‘엘리트’ 양성을 목적으로 전쟁 시기 학업 지속을 위한 징집 연기가 보장되었던 반면 병역법에 명시된 경제적 사유 등으로 인한 징집 연기 및 면제 조치는 입증의 어려움과 병무 비리 등으로 인해 거의 보장되지 않았다. 이에 더하여,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징집되었던 대다수가 제대 조치를 받지 못하였다.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국전쟁 시기 병력동원 과정에서 누적된 문제들이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복무기간의 장기화와 이로 인한 미제대자 문제의 해결이 시급했다. 제대를 도와준다면서 금품을 갈취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보도될 정도로 복무기간의 장기화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1956년 7월 12일 당시 국방부장관인 김용우가 국회의장에게 제출한 ‘제대실시 질의사항에 대한 답변에 관한 건’에 의하면, 대량 병력의 유지를 위해 병역법에 규정된 현역 복무연한을 지킬 수 없었고, 32세까지의 청년층을 소집 충원하는 외에도 징집 또는 소집된 자의 복무기한을 2년 내지 3년 이상으로 연장하고 있었다. 같은 문서에서 1956년 7월 현재 복무연한별 인원을 살펴보면, 전체 470,471명 중에서 5년 이상 복무자가 546명, 4년 이상 복무자는 8,298명, 3년 이상 복무자 108,189명, 2년 이상 복무자 168,352명, 1년 이상 복무자는 185,086명을 차지했다.

이에 국방부는 재학생 징집보류 조치를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국방부는 장기화된 복무기간과 미제대자들의 처지만큼이나 현역병 연령의 ‘고령화’를 심각한 문제로 여겼다. 재학생 징집보류제 폐지 방침을 밝힌 국방부 입장에 찬성하는 가장 큰 목소리는 병역 당사자인 군복무자들로부터 나왔다. 대다수가 연한을 초과하여 복무하고 있는 상황을 개선하라는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등장했다. 특히, 신체와 생명의 훼손까지도 감내해야하는 전쟁 기간 동안의 군복무는 목숨을 담보한 학력·계급 간의 불평등한 조치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재학생에 대한 징집보류제의 폐지야말로 병역제도 운영의 공정성을 확보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기본적인 조치로 주장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 당시 재학생의 징집연기 및 복무연한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또한 징집보류제 폐지를 주장하는 배경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다. 군복무 중인 당사자들과 군제대자들은 차별 시정이라는 점에서 ‘재학생 징집보류제’ 폐지를 요구하였다. 반면에 국방부는 병사 연령의 ‘고령화’로 인한 전투력 저하를 가장 크게 우려하였다. 재학생에 대한 징집보류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주로 ‘국민교육’의 중요성과 ‘엘리트’ 양성의 필요성에 기초하였다. 국방부가 폐지 입장의 선두에 있었다면 문교부는 존치 또는 부분 개정을 주장했다.

1950년대의 군복무자들은 당대의 징병제 운영 방식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보았다. 학력에 따라 병역 배분을 차등화 하는 징집연기 조치는 그것이 병역법에 근거한 적법한 것이라 하더라도 총력전의 전개 속에서 복무자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도록 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거대해진 병력 규모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복무기간 장기화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군복무자들은 누적된 분노에 기초하여 학력·계급에 따른 차별을 시정하라는 ‘사회정의’ 구현을 요구하였다. 징집된 당사자로부터 제기된 병역 부담의 불평등을 시정하고 징병제 운영의 공정성을 확보하라는 요구는 재학생 징집보류제 폐지 요구로 단일화되었다. 이들은 학력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계급・계층에 따른 병역 배분의 차등을 없애고, 징집을 ‘전면화’하라는 요청을 통해 이러한 ‘부정의’를 시정하고자 했다.

군복무자들의 응축된 분노와 이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사회적 여론을 바탕으로 마침내 1956년 11월 ‘재학자징집연기잠정령’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1957년 병역법(법률 제444호, 1957.8.15) 개정 결과 ‘징집보류제’가 유지되었을 뿐 아니라 대학 재학생의 복무기간이 일반 병사의 복무기간 보다 단축된 1년으로 법제화되었다. 그밖에도 국민학교 정교사 및 사범대를 졸업한 정교사들에 대한 6개월 복무를 허가하는 ‘단기현역병’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 기간을 포함하여 1950년대의 징병제 운영이 병역 배분의 차등에 기초하였던 반면 대량병력 유지를 이유로 일반 병사의 부담이 가중되면서, 다수가 병역을 학력·계급에 따른 차별과 피해로 인식하였다.

1950년대의 의무병역제도 운영 과정에서 형성된 당사자들의 인식과 감정은 이후 징병제가 확대·강화되는 중요한 감정적 자원으로 기능하게 된다. 차별과 피해를 주장하며 해결을 요구하고 정부가 이에 호응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징병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병역 대상자 남성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해왔다. 민주화의 진전은 남성의 사회적 우선권에 동요를 가져왔지만 징병제는 더욱 공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는 현재 병역을 역차별 또는 피해라고 주장하는 물질적 조건이다. 다만, 과거와 같은 방식의 차별 시정 요구로 문제 해결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